#56
뿌옇게 날리는 흙먼지 사이에서 고고하게 나부끼는 머리칼을 보며 칼리안은 웃었다.
웃지 못 할 상황임에도 그냥 웃음이 나왔다.
“영애께 그리 보였다니, 송구스럽군.”
그런 볼썽사나운 모습이나 보이고 말이야.
평소와 같은 자책이었으나 그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그저 좋았다.
흔들리는 천지를 가르듯 메이블린이 한걸음씩 칼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럴 것 없어요, 저하. 완벽하지 않아도 돼요. 꼿꼿한 것일수록 더 부러지기 쉬운 법이거든요.”
그녀의 손가락이 칼리안의 입꼬리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적어도 제 앞에서는 가면을 쓰실 필요가 없다구요.”
그 짧은 사이에 마법이라도 건 걸까. 칼리안은 애매한 심정이 되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지금 웃고 있어서?’
가면 따윈 그녀를 마주친 순간 깨져버렸다.
즉, 자신은 지금 정말로 웃고 있었다.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사실이었다.
조금 전 세이렌의 독기를 마셨음에도 정신이 또렷하고 전에 없이 가벼운 몸.
일 분 일 초가 급박했던 상황이 즐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면 같은 게 아니야, 영애. 나는 지금 진심으로…….”
스각! 날렵한 검선이 허공을 수놓았다.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달려들던 마물이 순식간에 분산했다.
그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즐거워.”
칼리안은 엄청난 무력으로 마물들을 찍어 내렸다. 단순히 블로킹의 소멸로 얻게 된 힘만은 아니었다.
베인을 따라잡기 위해 이 악물고 칼을 갈았던 세월의 대가였다.
그간 피나는 노력으로 쌓아올린 모든 시간이, 드디어 장애물을 딛고 피어난 것이다.
‘내가 밀릴 수야 없지.’
유쾌해 보이는 칼리안의 모습에 메이블린 역시 마물을 처치하는 데 다시 집중했다.
둘은 서로 등을 맞대고 싸웠다. 허허벌판 한가운데였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그 온기가 서로를 버티고 설 수 있게 해줬다.
그렇게 마물을 해치우며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이거, 좀, 너무한데요.”
“나도, 슬슬, 벅차는군.”
끝도 없이 밀려오는 마물에 호흡이 점차 흐트러졌다.
죽이고 또 죽였지만 그 수는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칼리안의 블로킹을 메이블린이 제거한 탓이었다. 베인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신들이 걸어놓은 것이었다.
아무리 베인이 죽었다지만, 한낱 인간이 시나리오를 멋대로 비틀고 건드리다니.
노한 신들은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더는 무리야.’
메이블린이 다리를 휘청거렸다. 마력을 한꺼번에 한계 이상으로 소진했다. 너무 지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거라면, 이대로 죽어도 다행히 시스템 기간이라 리셋이 가능하다는 사실 정도일까.
메이블린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까무룩 주저앉았다.
“영애!”
칼리안이 다급하게 부축했으나 동시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마물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벌써 그 짧은 순간에 그녀를 보호하느라 어깨가 찢겼다.
메이블린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다음번엔 반드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영애! 정신차리게! 메이블린!”
칼리안의 다급한 외침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려던 찰나.
휘오오-
별안간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펄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찬 바람이 안면을 강타했다.
그리고 보이는 건….
“실버?!”
커다란 늑대가 은빛 털을 휘날리며 검은 드래곤에서 뛰어내렸다.
실버는 착지하자마자 마물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눈 깜짝할 새 난장으로 쓸어버렸다.
화르륵!
메이블린은 문득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칼리안에게 접근하는 마물을 막기 위해 흑염을 내뿜고 있는 용용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드래곤과 신수를 처음 목격한 칼리안은 검을 휘두르던 것도 잊고 그들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저건 대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실버가 메이블린과 칼리안을 물고 뛰어올랐다.
용용이 위에 깔끔하게 착지한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둘을 태우자마자 용용이가 엉겨 붙는 마물을 떼어내며 지상에서 멀어졌다. 칼리안은 더욱 말문이 막혔다.
얼빠진 표정을 한 그를 뒤로한 채 실버가 메이블린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괜찮나?”
“와줘서 고마워요, 실버.”
“안 괜찮은 것 같군. 피가 많이 난다.”
피? 메이블린은 붉게 물든 제 옷을 살피다가 팔다리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잔상처와 생채기가 좀 나긴 했지만 어디 부러진 곳은 없었다.
뭔가에 찔리거나 베여 피가 흥건히 난 곳은 더더욱 없었고.
“음… 제 피가 아니에요.”
그녀의 시선이 구석에 앉아있는 칼리안에게 향했다.
메이블린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그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오세요, 저하. 치료해 드릴게요. 아직 응급처치 할 정도 힘은 남아있어요.”
신수 가족 곁에 있으니 방전되었던 체력이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칼리안은 괜찮다며 극구 거부했지만 그녀의 굳센 고집과 실버의 거센 손길에 떠밀려 결국 질질 끌리다시피 대령될 수밖에 없었다.
메이블린은 너덜거리는 제복을 벗기고 상처를 살폈다. 칼리안이 움찔 몸을 떨었다.
“애도 아니고, 참. 안 아프니까 가만히 계세요.”
“영애. 거, 거긴…….”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졌다.
이를 본 실버가 답지 않게 못 볼 걸 봤다는 듯 인상을 썼다.
“쯧.”
그는 한 차례 혀를 차고서 용용이의 머리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반면 메이블린은 월척을 잡았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매사 덤덤하던 왕세자가 얼굴을 다 붉히다니. 이런 좋은 기횔 놓칠 수야 없었다.
“뭐예요, 저하. 지금 내외하시는 거예요? 고작 어깨 가지고? 정말?”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뭔데요?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시는 건데요, 네?”
슬슬 시동을 걸던 메이블린은 급기야 엑셀레이터까지 밟았다.
“대체 아까 키스는 어떻게 하셨대?”
화아악. 제대로 브레이크 걸린 칼리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타올랐다.
메이블린의 가학심도 더욱 타올랐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엽게 구시는 거지?
“그땐 정신이 없었…….”
실버와 눈이 마주친 칼리안이 말을 하다말고 헛숨을 들이 삼켰다.
짙푸른 눈동자가 흑염이라도 뒤집어쓴 것 마냥 이글거렸다.
“방금… 뭐라 했더냐? 키스를 했다고?”
“하긴 했지만 영애가 먼저…….”
“아무튼, 했다?”
“그게… 저…….”
칼리안의 얼굴이 타오르고, 메이블린의 가학심이 타오르고, 실버의 눈도 타올랐다. 모든 게 다 타올랐다.
신수의 사나운 기세에 눌려 칼리안은 이도저도 못하고 메이블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발사했다.
에이, 재밌었는데. 한창 흥미진진하게 그의 얼굴을 관람 중이던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헤이, 실버까지 고리타분하게 굴지 마요. 삼백 살이니까 이해는 해주겠지만.”
아픈 사람인데 더 괴롭혔다간 쓰러질 지도 몰랐다.
그녀는 인간의 시계로 저승문을 세 번은 더 오갔을 신령을 향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다 큰 성인남녀가 입술 좀 맞댈 수 있죠. 그게 뭐 별거라고. 그리고 사실 키스도 아니었어요. 그냥 뭐, 그 뭐냐. 뽀뽀죠, 뽀뽀.”
칼리안의 뺨에서 쪽 소리가 났다.
“실버랑 콜린이 맨날 하는 거, 이런 거요. 위치만 좀 달랐지.”
메이블린을 제외한 모두가 일동 얼음이 되었다. 잘 날던 용용이조차 순간 휘청거렸다.
실버의 시선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서슬 퍼래졌다. 그를 고스란히 감내하며 칼리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흙먼지로 뒤덮여 있어 귓불까지 붉어진 게 티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영애, 나는…… 윽.”
서둘러 반박하려던 칼리안이 어깨를 부여잡고 상체를 푹 숙였다.
조금 전 용용이가 갑작스레 휘청거려 상처가 벌어진 탓이었다. 엉겨 붙었던 피가 다시 터져 나왔다.
메이블린은 실버에게 이만 앞을 보라고 손을 내젓고는 치유마법을 쓸 준비를 했다.
“우리 저하, 엄살이 심하시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살은 아니었다.
칼리안의 어깨에선 선혈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상당히 깊은 상처였다.
‘하여간 미련한 사람.’
속으로 혀를 차며 메이블린은 그 위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희미한 빛이 은은하게 맴돌며 상처가 차차 아물었다.
칼리안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고맙네, 영애. 전부 다.”
“고마우면 앞으로 이런 무모한 짓 하지 마세요.”
그녀가 상처를 치료하던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윽. 칼리안의 잇새로 옅은 신음성이 새나왔다.
아까는 아픈 줄도 몰랐는데.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온몸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이블린은 봐주지 않고 한 번 더 상처를 건드리며 눈을 부릅떴다.
“대답.”
상처보다 저 시선이 더 따가운 건 기분 탓일까. 칼리안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답했다.
“……알겠네.”
군신관계가 뒤바뀐 듯한 이 기분 역시 착각이겠지. 그리 생각하며 그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 끝났다. 죽으려 왔지만 종래엔 살았다.
너무 벅차서 숨통이 조여들 때면 언제나 그녀가 나타났다.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선 손을 내밀었다. 도저히 잡지 않을 수가 없는 손을.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같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드는 감정은, 상당히 가슴이 벅차오르는 종류의 것이었다. 뭐라 콕 집어서 정의할 순 없었지만.
부드러운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쳤다.
“다 됐어요.”
임시방편으로 치료를 마치고서 메이블린이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아- 하늘 예쁘다.”
“조심해라.”
앞에 앉아 경로를 살피던 실버가 짤막하게 핀잔을 주었다.
메이블린은 개의치 않고 뒹굴거렸다. 말은 저래도 여차하면 그가 잡아줄 테니 떨어질 염려는 없었다.
아까 잠깐의 실수가 있었지만, 용용이가 생각보다 베스트 드라이버이기도 했고.
드러누워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의 일들이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길어야 한 시간 남짓했을 시간. 비현실적인 세계에 잠시 다녀온 듯했다.
그녀는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제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죽는 줄 알았네.’
아무리 죽어도 되살아난다고는 하나, 특별한 메리트가 없는 한 죽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아프기도 아팠고, 똑같은 하루를 반복해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지루한 일이었다.
“휴우…….”
평온한 상상을 하며 숨을 고르던 차에 시스템 창이 떴다.
새롭게 바뀐 칭호가 보란 듯이 깜박였다.
[당신의 칭호는 ‘의지되는 관종’입니다.]
옆에서 또 다른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메이블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처럼 곁에 누운 칼리안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러나 훨씬 더 개운해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메이블린은 새롭게 얻게 된 수식어를 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의지되는… 의지가 된다고…….’
괜스레 속이 간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