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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55)화 (55/185)

#55

메이블린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별다른 말도 남기지 않고 느닷없이 사라졌다.

신수 가족들은 그녀가 사라진 텅 빈 공간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좀처럼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휘잉-

허공을 맴돌던 썰렁한 바람 한 줄기가 망부석처럼 서있는 그들을 일깨웠다.

용용이는 메이블린이 사라진 자리를 가리키며 실버를 돌아봤다.

“얘 지금… 거기 간 거야?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그런 것 같군.”

“환장하겠네.”

용용이가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옛 주인이 죽은 뒤로 이렇게 노심초사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어쩜 그렇게 별 재주란 재주는 다 가져서 환장하게 만드는지.

용용이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출했으면, 다시 데리고 와야지.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과 함께 그녀가 일어났다.

곁에서 낌새를 눈치챈 실버도 몸을 일으켰다.

“콜린, 집 잘 지키고 있어. 잠깐 나갔다 올게.”

어떻게 만난 녀석인데.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어쩌면 이럴 때나 쓰라고 만난 걸지도 모르고.’

아니라고 해도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메이블린을 찾고 싶었다.

찾아서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 말라고 꾸중이라도 해야지, 원.

콜린이 마당으로 나와 막 떠나려는 용용이와 실버를 배웅했다.

“조심하세요.”

“걱정 말고 들어가 있거라.”

용의 모습을 한 용용이 대신에 실버가 대답했다. 양쪽으로 펼쳐진 검은 날개가 마당을 전부 뒤덮었다.

“늦지 않게 다녀오마.”

실버의 짤막한 인사가 떨어졌다.

곧 거대한 몸체가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 * *

‘미친…….’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지난 번 던켈하이트에서 열렸던 공허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공허였다.

그런 게 한 개도 아니고 수십 개가 다발적으로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어떻게 여길 혼자서 올 생각을 하지?

우리 저하께선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치신 모양이었다.

“일단 어떻게든 여기만 벗어나요! 이 지대에서 멀어질수록 마기가 옅어져요! 그럼 하급 마물들만 나올 테니까 훨씬 수월할 거예요!”

아직 두 사람 이상의 텔레포트는 나에게 무리였다. 최대한 사력을 다해 마물들을 쓰러뜨리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급한 대로 칼리안을 대충 치료해 주고서 나는 눈앞의 마물을 걷어찼다. 마력이 실린 하이킥에 마물이 저만치 밀려났다.

조금 이동할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한 순간.

“윽…!”

칼리안이 신음을 토해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재빠르게 그를 살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다만 그는 질식한 사람처럼 숨을 거칠게 헐떡이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그 주변을 맴돌았다.

‘이건…!’

나는 다급하게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킬 ‘무관심(Lv.1)’이 발동됩니다!]

[마물 ‘세이렌’의 공격을 무력화시킵니다.]

스킬이 발동되자마자 나는 세이렌을 향해 달려들었다. 곧장 칼을 휘둘러 주둥이처럼 생긴 기다란 부분을 잘라냈다.

철퍽! 무게중심을 잃은 세이렌이 옆으로 쓰러지고, 오징어 먹물처럼 왈칵 쏟아져 나오던 검은 연기가 차츰 옅어졌다.

상급마물, 세이렌.

공격력만 놓고 보자면 중하급과 다를 바 없지만 괜히 상급이 아니다.

세이렌이 뿜어내는 검은 연기를 마시면, 환영이나 환청에 시달리게 된다.

심지어 별다른 해독법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효력이 약해져 저절로 풀려나는 식이었다.

세이렌은 먹잇감이 환각에 시달리는 그 사이에 공격해서 아주 손쉽게 인간들을 죽였다.

하지만 그 말인 즉, 강한 정신력만 있다면 그 시간을 대폭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지금으로선 칼리안이 부디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

나는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마물들을 막아내며 외쳤다.

“정신 차려요!”

허공을 헤집는 칼리안의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는 뭐가 그리도 괴로운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환각이 이미 시작된 모양이었다.

나는 임시방편으로 보호막을 치고 그 앞에 앉았다.

투웅, 텅! 마물들이 보호막을 내리치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나는 칼리안의 어깨를 붙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칼리안! 나 봐요. 내가 누구예요?”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눈꺼풀을 깜박거린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메이블린… 슈트레커…….”

“맞아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누구예요?”

“칼리안… 드웨인… 로마노프…….”

“좋아요.”

쩌저적.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나는 계속 질문을 하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끊임없이 말을 건 덕분에 초점이 아까보다는 조금 돌아와 있었다.

칼리안이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불완전해. 검 하나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지도 못 하고…….”

잘게 진동하던 검은 검기가 실리다 말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격이 없어…….”

칼리안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나는 그의 두 뺨을 붙잡고 들어 올려 날 보게 했다.

“칼리안. 당신은 이 나라의 하나뿐인 왕세자고, 나는 당신을 구하러 왔어요. 당신이 왕세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당신의 신하여서가 아니라. 내 약혼자이자 친구라서요. 알겠어요?”

크르륵! 캬악! 갈라진 결계를 비집고 마물들이 팔다리를 집어넣었다.

결계가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나는 그가 알아듣기 쉽도록 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지금부터 칼리안 드웨인 로마노프는 어마어마하게 쎈 검사구요, 메이블린 슈트레커는 무지막지하게 쎈 마법사예요. 그리고 이 결계가 부서지자마자, 나는 전력을 다해 싸울 거예요.”

결계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이제 겨우 1분 남짓.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제발 정신 차려 줘, 이 양반아!

나는 떨어진 검을 집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니 당신도 여기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가 죽게 내버려두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어서 칼리안의 두 귀를 막고,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읍…….”

맞붙은 입술 새로 먹힌 신음이 흘렀다.

멍하니 가라앉아 있던 연보랏빛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짧고도 긴 입맞춤 끝에, 나는 입술을 뗐다.

“일어나요. 누구 좋으라고 당신을 비난하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여줘요? 똑똑한 저하께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으시겠죠?”

그가 멀뚱히 눈을 꿈벅였다. 꽤나 얼떨떨해 하지만, 아까보단 한층 더 또렷해진 빛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이제 겨우 한 숨 돌렸네. 근데…….

‘저게 뭐지?’

이렇게 가까이 오랫동안 붙어있는 것은 처음이라 그런가.

그의 가슴팍을 덮고 있는 검은 덩어리가 보였다.

마치 엑스레이 사진처럼 투시되어 보이는 요상한 아지랑이. 그것은 뭔가를 감싼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키 차이 상 시선이 자연스레 가슴팍 쪽으로 간 것이지, 일부러 본 것은 아니다.

‘세이렌의 독기인 건가?’

뭐든 간에 좋은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쥐어뜯듯 그것을 세게 잡아당겼다.

찌익!

별안간 까만 벌레가 툭 튀어나왔다. 벌레는 발발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칼리안의 가슴께로 들어가려했다.

이게 어딜. 운 좋게도 마침 무기가 있었다.

나는 신수 가족의 집에서 발견한 검으로 벌레를 콱 찍었다.

벌레의 몸통에 닿은 검이 일순 푸르게 빛났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토막 난 벌레는 새까만 액체를 팍 튀기는가 싶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창.

[성검 사용으로 ‘블로킹’이 소멸됩니다.]

[‘세계의 잠금장치’를 해금하였습니다!]

[불가의 영역에 침범하여, ■■■들이 당신에게 분노합니다.]

쩌저저적!

마지막 창이 뜸과 동시에 결계가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우리를 보호해주던 막이 소멸되면서 결계에 매달려있던 모든 마물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더불어 그들의 기세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흉포해져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거대한 비가 내리는 듯했다. 물론 이 비는 한 방울이라도 맞았다간 즉사하겠지만.

나는 다급하게 공격 마법을 읊었다.

한데, 몰아치던 마물들이 급작스레 사체가 되어 주변에 힘없이 툭툭 떨어졌다. 내 마법이 채 발현되기도 전이었다.

스가각!

‘뭐지?’

공격을 맞은 것도 아닌데 손끝이 찌르르 떨렸다. 일전에 던켈하이트에서도 경험한 바 있었다.

벌써 두 번이나 겪어봐서 이젠 이 감각을 잘 알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검기.

고개를 돌리니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털고 있는 칼리안이 보였다. 마물의 체액이 날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지나가는 산들바람에 땀에 젖은 백금발이 들썩였다.

비가 한바탕 쏟아진 후, 맑게 갠 하늘을 담은 표정.

그가 쥐고 있는 검이 보랏빛으로 공명하고 있었다.

칼리안의 오러가, 개화했다.

나는 순수히 감탄을 내뱉었다.

“오, 멋진데요.”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칼리안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 그 많은 마물들을 도륙내고서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지난 20년 동안 미칠 듯이 노력했음도 검기가 피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감상에 젖어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다행히 멀쩡해 보이시네요.”

나는 칼리안을 한 번 툭 치고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도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 이제부터 다시 2차전 시작이었다.

‘블로킹이고 뭐고 어디 마음대로 조종해보라지. 뜻대로 움직여주나.’

그동안 어렴풋이 의심하기만 했던 가정.

벌레가 죽자마자 칼리안의 오러가 개화하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책의 줄거리대로 가야만 하는 어떤 강제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현재. 베인은 죽었고, 칼리안은 살았다. 줄거리는 벌써 틀어지는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고.’

나는 칼리안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 성검을 땅에 꽂았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를 중심으로 퍼져나가 땅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푸르게 빛나는 대지를 등지고 서서, 나는 칼리안을 힐끔 돌아보았다.

“물론 저하가 아무리 바보 같다고 해도 버리고 갈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저하는 절대 죽지 않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던 마물 떼가 우리를 다시금 덮치기 직전.

콰콰쾅!!

땅이 꺼질 듯 요동치고, 부옇게 흙먼지가 일었다.

완성된 마법진이 모든 마물을 집어삼킬 기세로 천지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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