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54)화 (54/185)

#54

“네가 발견했으니 네가 가지는 것이 맞다.”

“그래요. 누나가 가져요.”

신수 부자는 자기들은 어차피 가지고 있어봐야 과일 깎을 때나 쓸 거라면서 검을 내게 떠넘겼다.

“둘 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예의상 한 번 쯤 사양할 법도 하건만. 그러기엔 검이 너무 눈부셨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검을 챙겼다.

앗싸, 이게 웬 횡재냐. 이 광채 좀 봐. 오늘부터 나의 엑스칼리버다.

시험 삼아 허공에 몇 번 휘둘러보는데 무겁지도 않고 손에 착착 감겼다.

마치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뜻밖의 아이템도 얻었겠다, 공사도 깔끔하게 마치고 콜린과 노닥거리는데 밖에서 쿵 소리가 났다.

곧 거대한 그림자가 창가에 어른거렸다.

“엄마다!”

콜린이 창가로 쪼르르 달려가 창문에 코를 붙였다. 나도 슬그머니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밖을 살피니 용용이가 날개를 접고 인간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실버 말로는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가끔 인적이 없는 황무지에서 비행을 한다고 했다. 용용이는 드라이브를 즐길 줄 아는 드래곤이었다.

만족스러운 비행이었는지 용용이가 팔을 쭉 피며 들어왔다.

“아, 개운하다. 한 번씩 몸을 풀어줘야 한다니까.”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그녀는 콜린과 나란히 서있는 내 모습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뭐야, 또 왔어?”

“여기 공기가 좋아서, 요양하기 딱이지 뭐예요.”

내가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용용이가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숨을 내뱉었다.

“넌 가끔 속에 백 살 먹은 늙은이가 들러붙어 있는 거 같아.”

“그럼 용님이랑 나이 차가 팔십 살이나 줄어들겠네요. 어때요, 우리 사이가 더 돈독해진 느낌이 들지 않아요?”

나는 턱에 꽃받침을 하고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나 용용이는 뛰어난 드라이브 실력을 겸비한 것은 물론, 먹금도 할 줄 아는 드래곤이었다.

그녀는 내 말을 쌈박하게도 무시하고 실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참, 근데 헤스턴우드 쪽에 웬 얼간이가 하나 돌아다니더라?”

헤스턴우드? 어디서 들어봤는데.

뭔가 접근 금지 구역 비슷했던 걸로 기억한다. 옛날에 땅을 살 때 다니엘이 알려줬었다.

아무리 수련이 좋아도 위험하니까 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신신당부 했던 곳이 거기였나?

내 기억이 맞았는지 실버의 반듯한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거긴 마물들이 들끓는 곳 아닌가?”

아, 맞다. 헤스턴우드는 공허가 허다하고 열리는 통에 마물들이 팝콘마냥 튀어나오는 곳이었다.

언제 어디서 쏟아져 나올지 몰라 왕궁에서 토벌대를 파견할 시에도 가장 철저하게 준비시켜 보내곤 했다.

그럼에도 사상자가 매년 상당수 나올 정도로 굉장히 위험한 지대였다.

“그러니까. 나도 기 빨릴 때 마기 충전하러 잠깐 있다 오는 덴데. 죽으려고 갔겠지, 뭐.”

그런데 그 곳을 혼자 간 사람이 있다고?

그녀의 말마따나 정말 죽으려고 간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무척이나 과신하는 얼간이거나.

용용이가 먼지 묻은 머리를 털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생긴 건 좀 반반하더만. 옛날 능구렁이 놈 생각나는 게, 좀 아쉽긴 하네.”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은 과거의 어느 한 장면을 되풀이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뒷말을 곱씹듯이 물었다.

“능구렁이요?”

“내 과거를 봤으면 알 거 아냐. 넉살좋던 황태자놈. 아슬란.”

아슬란은 용용이의 어린 시절을 함께했던 제국의 황태자였다. 나는 책에서 읽었던 아슬란의 외양을 떠올렸다.

햇살처럼 찬란한 백금발에 금빛 눈동자… 누군가 떠오르는데.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단 걸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어떻게 생겼어요? 방금 봤다는 남자요.”

설마가 사람 잡는 건 일상다반사인데다, 드래곤의 동체 시력은 웬만큼 뛰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까마득한 창공에서 남자의 얼굴까지 확인하고 아슬란을 떠올릴 정도니까.

예상대로, 용용이는 남자의 외양을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연보라색 눈동자에, 좀 엉망이긴 했지만 제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어. 가슴팍에 달린 문장이 사자 모양이라 기억해. 아슬란도 그랬거든.”

보라색 눈동자, 백금발, 사자 문장이 달린 제복. 로마노프 왕가의 문장 역시 사자였다.

제기랄. 귀 막고 들어도 칼리안이잖아. 왕세자씩이나 되는 분이 대체 거긴 왜 간 거람?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난 나는 급한 대로 금전에 발견한 검을 챙기고 용용이의 팔을 다급하게 붙들었다.

“정확히 헤스턴우드 어디쯤에서 봤어요?”

“숲 동부 쪽이었나… 아마 그랬을걸.”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에 용용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실버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근데 그건 왜?”

“그게…….”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텔레포트 술식을 전부 마친 뒤였다.

잠깐 어딜 갔다 오겠다는 말도 남기지 못하고 마법진이 발현됐다.

이번엔 의도치 않게 내가 먹금을 해버렸네,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헤스턴우드였다.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제발 죽지만 말았어라.’

* * *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가 몇 번 움직이지 못하고 멈췄다. 입맛이 없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입맛이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정상이 아닐 것 같았다.

칼리안은 도중에 식사를 물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속을 달래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감정들이 고개를 불쑥불쑥 쳐들었다.

개중 그를 단연 지배하는 것을 꼽아 정의하자면,

칼리안 드웨인 로마노프는 우울했다.

이 한 문장만큼 현재 그의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없었다.

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메이블린 슈트레커였다.

약혼을 앞두고 약혼녀가 자꾸만 사라졌다.

약혼 얘기의 서두만 입에 올려도 바로 꽁무니를 내뺐다.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나 곰곰이 되짚어 봐도,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저 약혼조차 무르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싫어진 건가?

칼리안은 더 우울해졌다.

두 번째는 그의 아버지인 에임의 국왕이었다.

그는 베인 에스카로트가 죽어서 왕국에 제대로 된 소드마스터 하나 없다며 통탄해했고, 그 경지에 여태껏 이르지 못한 자신을 못마땅해했다.

베인이 죽으면 그 모든 모욕과 치욕스러운 시선이 거두어질 줄 알았건만. 도리어 더 심해졌다.

-왜 그것밖에 못 한단 말이냐. 이 한심한 것.

경멸스러운 목소리가 시퍼런 날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웃었다. 결코 내색하지 않았다.

열등감에 찌든 모습을 내비치느니 차라리 행복한 왕세자를 연기하는 게 나았다.

비록 그 속은 새까맣게 곪아있을 지라도.

마지막 이유는, 그의 보좌관인 켈른이었다.

언제나 제게 단심을 속삭이던 충신의 정체는 자신을 감시하기 위한 암흑가의 연락책이었다.

‘멍청하게 나만 놀아난 꼴이군.’

세상에 홀로 떨어진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데 길을 잃은 것도 모자라 길이 아예 사라진 듯했다.

이미 왕은 베인이 죽고 난 뒤 만일에 대비한 후사를 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소문이 궁내에 일파만파로 퍼지자 사람들이 제게서 등을 돌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심지어는 가장 믿었던, 제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켈른마저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누굴 믿어야 하지. 대체 누구를…….’

자책은 길지 않았다.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을 나서는 그의 뒤로 그림자가 무겁게 졌다.

‘더는 못하겠어. 지쳤어.’

칼리안은 불안정한 정세에 대비해 수련한다는 명목으로 궁을 나섰다. 간단한 마물 토벌 출정인 것처럼 위장하고서.

이리하면 자신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어도 왕은 명예로운 죽음이었다며 고개를 끄덕여 줄지 모르는 일이었다.

정작 그때면 이미 죽어있을 자신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겠지만.

이 순간에조차 명분을 만들고 존재 이유를 찾는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났으나 별 수 없었다.

‘원래가 이리 생겨먹은 인간인데 어쩌나.’

중간에 기사단을 따돌린 칼리안은 망설임 없이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부디 제 마지막 숨까지 도움이 되길 바라며, 그렇게 스스로를 불모지에 던졌다.

공허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지대 한복판에.

캬아악!

먹잇감을 발견한 마물들이 사방에서 돌진했다.

칼리안은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실망스럽기 그지없구나.

-힘든 기색을 내비쳐선 안 된다.

-버티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웃거라.

그간 얽매였던 모든 부담감과 압박감을 잘라내려는 듯.

베고, 베고, 또 벴다.

칼리안은 더 이상 언제나 단정한 용모의 근사한 왕세자가 아니었다.

살갗은 날카로운 발톱에 짓이겨져 피가 흘렀고, 하얀 제복은 더러운 진흙과 마물의 체액, 자신의 피로 얼룩졌다.

칼리안은 검을 땅에 꽂고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제발,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마지막 힘을 긁어모아 정신을 집중했지만 턱도 없었다.

오러는 물에 젖은 나뭇가지에 붙은 불처럼 조금 불씨를 보이다 꺼져버렸다.

맥이 탁 풀렸다.

‘…여기까진가.’

그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 분 일 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해 갈고 닦아왔다.

무딘 면을 들키지 않도록. 언제나 날카롭게 벼려진 면만을 볼 수 있도록.

그럼에도 검은,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토록 노력했는데. 이 악물고 버텼는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베인은 되고, 모든 걸 쏟아 부은 자신은 외면하는지.

짙은 절망감이 그를 덮쳤다. 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신은 이대로 사라져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내가 죽는다고 슬퍼해 줄 사람이나 있을까.’

세게 얻어맞은 머리가 울려 어지러웠다. 자신의 최후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쓰러지고 나면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겠지.’

캬악!

날카로운 발톱이 둔중한 주먹과 함께 쇄도했고, 칼리안은 죽음이 어서 닥치기만을 기다렸다.

‘이만하면 많이 버텼어.’

언젠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어리석은 미련 하나로 꾸역꾸역 이어온 삶이었다.

그 미련, 더는 붙잡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제 삶에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지친 눈꺼풀이 여린 숨과 함께 감겼다. 완전한 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살갗을 무도하게 파고들 고통을 각오해도.

죽음은커녕 일말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칼리안은 잔뜩 찡그렸던 인상을 천천히 폈다.

‘……?’

그가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본 것은, 죽음이 아닌 자신을 가로막고 선 등이었다.

작지만 그 무엇보다도 든든하게 느껴지는 등.

마물을 상대하며 메이블린이 빽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요? 아주 죽으려고 작정했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죽으려고 왔으니까.

그저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왕국에 도움이 되고자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칼리안은 문득,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죽고 싶지 않아.’

방금 전까지 그토록 죽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그 굳센 뒷모습을 보는 순간.

이대로 삶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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