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공주님의 키스로 마법에서 풀려난 왕자님
#53
톡, 톡. 유려한 손끝이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규칙적으로 까딱거렸다.
평탄한 하루만 지속되던 와중, 칼리안에겐 고민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의 보좌관인 켈른의 부재.
일이 많지 않은 한가로운 시기임에도 근래 들어 켈른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다.
베인이 죽고, 암흑가의 수장이 교체되면서 새로운 체제를 정립하고 밀린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쁜 탓이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는 칼리안은 켈른을 의심스럽게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충성스러운 제 신하에게 몰래 사람을 붙였다. 자신의 사람을 의심해야만 한다는 게 속이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의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관계를 썩히는 것보다야.’
그저 기우일 뿐일 것이다. 아마 괜한 시간 낭비를 했다며 자신을 자책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일단은 실상을 알아야만 했다. 켈른의 상사로서, 혹은 오랜 친우로서라도.
똑똑. 정갈한 노크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은밀한 발걸음으로 들어온 기사가 그 앞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켈른의 뒤를 밟게 했던 기사였다.
평소라면 수고했다는 말이라도 했겠지만, 칼리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래서, 수상한 점은 없었나?”
그는 한시바삐 제 사람이 온전한 제 편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한데, 기사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이…….”
불길한 예감이 뱀처럼 발목을 휘감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왜 그런가?”
“송구합니다, 저하. 우버왓츠 경을 놓쳤습니다.”
“켈른을 놓쳤다고?”
“예. 분명 줄곧 시야에 계셨는데, 어떤 마을 어귀에 다다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기사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칼리안은 혼란스러워졌다. 갑자기 사라져?
자신이 아는 켈른은 절대 그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연무장을 한 바퀴만 돌아도 기력이 딸려 쓰러질 약골.
더불어 기척을 지우는데 능숙한 정예기사를 따돌릴 수 있을 만한 실력도 없었다.
만약, 도중에 누군가 도와준 것이 아니라면.
“그 마을, 이름이 뭔가.”
“던켈하이트라고, 살펴본 결과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켈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예, 저하.”
“알겠네. 이만 돌아가 보게.”
기사가 고개를 꾸벅이고 물러났다. 그가 나가자마자 칼리안은 곧장 켈른의 집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발걸음이 퍽 성급했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군.’
작은 혹에 불과했던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떼어내든 파헤치든 진상을 마주해야만 했다. 막연히 덮고 넘어갈 순 없었다.
집무실에 도착한 칼리안은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내가 켈른이라면… 어디에 중요한 물건을 보관할까.’
그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꽁꽁 숨기는 것보단 오히려 예상치 못하게 드러내 놓을 확률이 컸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기 힘들게 하려면 저곳이겠군.’
칼리안은 유독 빽빽하게 꽂혀있는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개중에서도 크기가 큼지막한 책들만 자리한 구역을 모두 비우자, 작은 틈새가 보였다.
자칫 책장이 조금 어긋난 거라 여길 수 있는 작은 틈.
그 까만 실금을 앞에 두고, 칼리안은 심호흡을 했다.
망설여졌다. 손대선 안 될 상자를 여는 기분이었다.
이것을 열면, 돌이키지 못할 수렁으로 빠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열어야만 했다. 무지는 결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니까.
칼리안은 조심스럽게 선반을 누르며 맨 끝에 박혀 있는 서적을 잡고 끌어당겼다.
틈이 철컥,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숨겨진 서랍이 나타났다. 자주 사용한 모양인지 서랍은 쉽게 열렸다.
나온 물건은 나름 평범하다면 평범했다. 두꺼운 서류 뭉치와 단검.
다만 서류는 그 출처를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고, 단검은 출처를 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막대한 자본과 재원을 빼곡하게 정리해둔 서류. 왕국 어디에도 이만한 자원을 굴리는 영토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겨진 문양이 낯익은 단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을 독살하려던 암살자가 자결하는데 사용했던 검에 새겨진 것과 똑같았으니까.
‘내가… 어리석었군.’
칼리안의 손가락이 문양이 파인 음각을 지그시 쓸었다. 그 얇은 선을 따라갈수록 자신 안에서 뭔가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하…?”
때마침 방으로 들어오던 켈른이 단검을 들고 있는 칼리안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저하가 저것을 어떻게…….’
서늘한 식은땀이 켈른의 등줄기를 더듬었다.
켈른은 몸을 바짝 곧추세우며 칼리안에게 다가갔다.
“저하. 제가, 제가 다 설명 드리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네. 나가게. 지금 당장.”
“저하, 잠시만…!”
칼리안이 더 이상의 접근은 불허한다는 듯 손을 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켈른. 내가 널 지금 이 자리에서 즉결 처형 시키지 않는 것은, 널 아껴서가 아니야. 순전히 지난 10년간의 시간 때문이지.”
연보라빛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짙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주체하지 못하고 끓어올랐다.
그 흉포한 기세에 켈른이 걸음을 주춤했다.
칼리안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뗐다. 벌어진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어느새 켈른은 책장을 뒤로 한 채 궁지에 몰려 있었다.
칼리안이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 터럭만큼 남은 그 알량한 신의에 기대서라도,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팍! 단검이 켈른의 목덜미를 스치고 책장에 꽂혔다.
“나도 더는 참지 못하겠으니.”
“…….”
사이.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거친 숨소리만이 방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송구합니다, 저하.”
무거운 침묵을 뚫고 켈른이 정중한 자세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인사.
정체를 숨기고 두 명의 주군을 모시긴 했지만, 그를 대하는 것에 거짓은 없었다.
칼리안은 난폭하고 포악했던 베인과는 달리 언제나 온화하게 제 사람들을 감싸주었다.
그의 신하여서 언짢았던 적도 없었다.
종종 산더미 같은 업무에 휩쓸려 머리가 아프긴 했어도, 같이 밤을 샐 때마다 먼저 잠들지 않는 이는 언제나 칼리안이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주군이었다. 지금이야 암흑가도 그런 주군을 모시고 있긴 하다만.
때문에 과거 켈른은 이따금 첩보를 내 놓으라 종용하는 암흑가에 부러 잘못된 정보를 흘려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들 뭣하나,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변명거리밖에 안 될 텐데.
켈른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반드시 맞닥뜨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관대한 처사였다.
‘다만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지.’
처음 궁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그새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켈른은 자조적인 미소를 띤 채 칼리안을 마주했다.
“어떤 말을 해도… 아무리 빌어도… 저를 용서하지 못하시리란 걸 압니다.”
정면으로 맞닥뜨린 얼굴은 그의 가슴마저 처참하게 일그러뜨렸다.
입술이 쉬이 떼어지지 않았으나, 억지로 벌렸다.
“하지만 저하를 모신 시간들은, 전부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켈른은 궁을 나왔다.
* * *
“누나, 죄송해요.”
콜린이 귀를 축 늘어뜨린 채 한쪽에 서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렇게 하라고 한 적도 없는데, 꼭 벌을 받는 모습이었다.
“날개가 근질거려서 조금 뛰어다닌다는 게 그만…….”
“아냐, 성장기인데 그럴 수도 있지.”
성장기 특성 상 콜린이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집 안에서 날개를 펼친 게 화근이었다.
솔직히 거기까진 괜찮았다. 하지만 그 상태로 날아다닌 게 문제였다.
콜린과 부딪힌 모든 것이 부서졌다. 작은 컵부터 시작해서, 집을 받치고 있던 벽까지.
나는 그 부서진 잔해들을 마법으로 수습하고 있는 중이었다.
“별것도 아니야. 십 분이면 돼.”
괜찮다는 뜻으로 생긋 웃어보였지만 실버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콜린에게 집안에선 날개 피는 것을 자제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필 경우엔 조심히 다니기로 약속한 거 잊었느냐, 갑갑했으면 아까 엄마를 따라 나가지 그랬느냐 등등 온갖 잔소리를 쏟아냈다.
‘콜린, 파이팅.’
어쩐지 나까지 같이 혼나는 기분이 되어 나는 실버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콜린에게 그렇게 하라고 부추긴 내 탓도 조금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실버가 중간 중간 책임을 묻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일전에 용용이에게서도 느껴본 익숙한 시선이었다.
내가 정말 콜린에게 나쁜 것만 가르치고 있는 건가. 아니 근데 우리 애가 하고 싶다는데 뭐 어째. 우리 애 하고 싶은 거 다해야지 내가 말려?
“말렸어야지, 메이.”
“네, 그랬어야 했죠. 제가 생각이 짧았죠, 참.”
결국 실버에게 한 소리 듣고 말았다.
그래도 그 얼굴에 그 목소리로 들으니까 이게 또, 썩 나쁘진 않았다. 헤헤. 미인 죠아.
내 표정이 전혀 반성하지 않는 표정이었는지 실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하던 거나 마저 해라.”
“넵. 아주 새것처럼 복구시켜놓겠습니다. 저 완전 고급인력이에요, 알죠?”
그간 외면당한 전적이 무수했음에도 나는 윙크를 날렸다.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물론 실버가 나무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비록 말은 없었다만.
그래도 도끼날이라도 들어간 게 어디냐 싶었다. 앞으로 67번만 더 찍으면 완전히 넘어가겠지? 호홍.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바닥에 박힌 자재들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뭐에 걸렸는지 하나가 덜걱거리며 빠지지 않았다.
“뭐야, 왜 안 빠져.”
나는 더 강력한 마법을 써서 단단히도 박힌 나무를 뽑아냈다.
요란한 소리가 귀청을 때림과 동시에, 작고 날카로운 뭔가가 자재와 함께 팍 튀어나왔다.
“이게 뭐지?”
그것을 뒤덮은 흙먼지를 대충 슥 닦아내고 보니, 길지도 짧지도 않은 어중간한 크기의 검날이 반짝였다.
웬 검? 마법으로 들러붙은 녹까지 전부 제거하자 검은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크으, 때깔이 아주 쥑이는구만.
검알못인 내가 봐도 꽤나 고가의 것이라는 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검을 들고 실버와 콜린 앞으로 가져갔다.
“이거 실버 거예요?”
실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콜린?”
콜린도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검을 들고 갸웃거리는 내게 부자가 말했다.
“우리 신수들은 검을 쓰지 않아.”
“검보다 우리 발톱이 더 세거든요. 무기를 딱히 쓸 필요가 없어요.”
그럼 누구 거지?
그 순간 실버와 콜린의 푸른 눈동자가 전부 나를 향했다.
혹시….
나는 슬그머니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