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46)화 (46/185)

11. (외전) 그 남주의 속사정

#46

사람의 인적이 드문 한적한 숲. 달빛 하나 새들지 않는 깊은 새벽.

마물 토벌이 끝나고 기사단이 물러간 자리엔, 마물의 사체가 부서진 나무의 잔해들과 뒤섞여 있었다.

어두운 정적만이 감돌던 그때.

어둠 속에 잠자코 웅크리고 있던 더미 하나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디스가 베인의 시체를 감추기 위해 쌓아놓은 더미였다.

더미는 금방이라도 무언갈 토해낼 듯 더 격렬하게 떠들리더니,

팍!

이윽고 잔해를 뚫고 한 손이 튀어나왔다.

“허억,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죽는 거야.”

음산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퉁한 중얼거림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체들을 걷어차며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으익, 더러워. 하여간, 인간의 몸은 너무 불편하다니까.”

몇 시간을 파묻혀 있느라 온몸이 여간 뻑적지근한 게 아니었다.

남자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깨달았다.

“참. 머리 걔가 떼갔지.”

목 위가 어쩐지 허전하더라니.

무릎 위에 발목을 얹은 자세로 앉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리가 없어서 생각에 잠길 수 있다는 표현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무튼 일단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완전히 죽었고… 할 일도 다 마친 것 같고. 어차피 내일이면 이 놈 시신을 찾기 위해 에스카로트 기사단이 수색을 시작하겠지. 그땐 이미 마물들 뱃속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

고심 끝에 그냥 두고 가도 괜찮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만 퇴장할까.’

왕국의 유일한 공작을 죽이고 그의 자리를 꿰차 폭군 행세를 한 지도 어언 일 년.

볼 일을 다 마쳤으니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동안 맞지도 않은 일 억지로 하느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하루빨리 쉬고 싶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풀썩. 별안간 남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얀 빛무리가 그 위로 몽글몽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온전한 사람의 형상을 갖춘 빛 속에서 커다란 날개 두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수고했어, 라파엘.”

느른하게 앉아있던 남자가 그를 반겼다.

라파엘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그 옆을 빙빙 맴돌았다.

“후아, 쫄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제 연기 괜찮았어요?”

“훌륭했어. 아무도 중간에 바뀐 거 눈치 못 채던데.”

“다행이다. 저 뭐 빼먹은 건 없겠죠? 메이한테 암호 뜻도 알려줬고, 암흑가 간부들이랑 슈타커한테도 잘 일러뒀고, 성검 좌표도 경연 문제로 흘려놨고, 또… 음. 얼추 다 한 것 같네요.”

아이 모습의 천사는 짧은 팔을 쭉 뻗으며 허공에서 늘어졌다.

“휴, 이제야 좀 편히 살겠어요.”

“그렇게 힘들었어?”

“들킬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특히 채찍으로 클라인을 내려칠 땐 정말이지… 으, 다신 하고 싶지 않아요.”

“잘만 하던데.”

“죽는 줄 알았다고요.”

눈부신 은발이 바람에 살랑였다. 겨우 열 살 정도나 돼 보이는 아이의 얼굴은, 누군가와 굉장히 흡사했다.

베인 에스카로트. 그의 어린 시절이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똑닮은 얼굴의 천사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칼질이랑은 느낌이 다르다고요, 느낌이! 그 기다란 줄을 통해서 끈적한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데…!”

“너 꼭 변태같이 말한다.”

“흥, 별로 타격 없거든요.”

라파엘이 입술을 비죽였다.

“처음 에임왕국 시나리오 작업할 때 기억 안 나세요? 주인공 얼굴을 제 얼굴로 만들자고 바락바락 우기는 바람에, 다들 절 변태로 본 지 오래라고요. 이런 천사 같은 얼굴로 그런 가학적인 표정을 짓게 하다니.”

라파엘은 시나리오 중반부터 투입되어 베인의 흉내를 내야만 했다.

그러려면 애초부터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만들어 놓는 것이 연기하기 편했다.

신들은 물론이고, 빙의된 메이블린의 영혼조차 눈치채지 못하도록 인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시나리오가 초반부를 넘기자, 인간계로 내려가 베인을 죽이고 그 자리를 꿰찼다.

어차피 사는 꼴이 흙탕물만도 못했던 놈이라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완벽하게 같은 얼굴로 만들었기에 의심하는 자 역시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제 취향이 다소 음흉하다고 소문난 것은 억울했지만.

울상을 짓는 라파엘을 놀리듯 남자가 턱을 괸 채 웃었다.

“잘 어울리던데, 뭘.”

“안 돼, 티케님이 싫어하실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라파엘. 그렇지 않아. 기억 안 나?”

웬일로 아버지께서 내 편을 들어주시지?

라파엘의 동그란 눈망울이 기대감을 품고 커졌다.

“뭐가요?”

“티케는 원래 널 썩 좋아하지 않았잖아. 나이는 질리도록 먹은 게 가증스럽게 어린애 모습이나 하고 다닌다고.”

“……정말 너무하세요.”

한이 꾹꾹 눌러 담긴 시선과 함께 라파엘은 남자를 쏘아붙였다.

속이 상한 얼굴로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는, 남자가 앉아있는 옥좌의 팔걸이에 매달리듯 내려앉았다.

라파엘의 얼굴이 아이답지 않게 무거운 빛을 띠었다.

“그나저나, 이제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긴 완전히 글렀잖아요. 조연도 아니고 주인공이 죽었는데. 모로스님은 우리랑 한통속이니 그렇다 쳐도, 다른 신들과 천사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세계는 신들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야만 하는 방향이 존재했다. 일종의 개연성이 부여된 시나리오였다.

그들은 각 구역별로, 세대마다 짜놓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 막대한 힘은 인물들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지배하고 이끌었다.

슬쩍 어긋난다 싶으면 신탁을 내리거나 간접적으로 힘을 사용해서 방향을 조절했다.

한데,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메이블린 슈트레커라는 변수가.

그녀는 이 세계의 개연성을 해치는 인물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묻혀가야 할 엑스트라 주제에, 끊임없이 줄거리를 비틀고 시나리오에 관여했다.

처음엔 한낱 인간일 뿐이라 귀여운 발악쯤으로 여기며 넘어가던 것이, 이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작았던 눈송이는 어느새 커다란 눈덩이로 불어나 시나리오의 길을 턱 막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예정대로 무사히 마치기 위해선 장애물을 치워야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세계를 관장하는 신들에게 인간 하나 죽이는 것쯤은 개미를 밟는 것보다 손쉬웠다.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를 위해, 불순물이 걸러질 때까지. 그들은 수십, 수백 번의 위협을 가할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메이블린에게 시스템을 걸었다.

어차피 불가피한 죽음. 몇 번을 겪더라도 다시 살리기 위해서.

메이블린이 이 세계에 온 순간부터 시나리오를 뒤흔들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또 그러기를 바랐고.

지금까지의 족적을 보니, 초반엔 조금 고전하는 듯했으나 그녀는 시스템을 퍽 잘 활용하고 있었다.

능력 복원이 완벽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괜찮아. 걱정 안 해.”

누구보다도 굳센 녀석이니 잘 헤쳐 나갈 것이다.

별거 아니라는 듯 구는 남자의 태도에, 라파엘은 걱정스러운 투로 우물거렸다.

“그래도 예상에 없던 녀석까지 튀어나왔는데…….”

“그딴 시나리오, 쓰레기통에 처박혀도 싸. 주인공한테 온갖 능력은 다 갖다 주면 뭐 해. 성격이 완전히 썩은 개뼉다구만도 못한데. 글러먹은 건 시나리오가 아니라 설정값을 그딴 식으로 짠 걔네들이야. 네가 연기해봐서 잘 알거 아냐.”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라고 하기엔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베인으로서 그간 해온 짓들이 너무 끔찍했다.

남자는 것 보라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걸레짝 빨아봤자 행주밖에 더 되겠냐. 진짜 못할 짓이다, 그거. 주인공이면 주인공답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모험이나 떠나게 해주던가. 아니면 지 인생 지가 알아서 맘껏 활개치고 다니게나 해주던가.”

“확실히 이디스도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하긴 하겠네요. 선택지가 없어서 그렇지.”

“내 말이. 허구한 날 정신 나간 놈 신경 안정제나 해주고 앉아있어야겠어? 그런 놈들 구원해주면 정작 본인은? 줄 거면 처음부터 깨끗한 걸 주면 좀 좋냐고.”

남자는 심히 못마땅한 듯 연신 꿍얼거렸다.

“안 그래도 길지 않은 생, 살면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같잖은 놈들 집착에 얽매이는 짓을 왜 시키는지, 나 참.”

“하지만 다들 그런 시나리오를 좋아하는걸요. 아시잖아요.”

불만족스러워도 어쩔 수 없었다. 시나리오는 다수가 선호하는 설정을 따라가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정의로워봤자 모두가 원하지 않는 세계를 굳이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개미만도 못한 인간들의 삶 역시, 굳이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라파엘의 시선이 허공에 떠있던 스크린으로 향했다.

화면에선 검은 벌레 한 마리가 갉작대며 기어가는 중이었다.

까만 몸체는 풀밭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금발머리 소년의 주변을 맴돌다가, 이내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윽고 가슴께에 자리를 잡은 벌레는 뾰족한 침을 들어 여린 피부를 콱 찍어 내렸다. 소년은 숨이 막히는지 밭은기침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벌레가 소년의 가슴팍에 완전히 녹아 스며들자 다시 고른 숨소리가 이어졌다.

벌레는 일종의 제한장치였다. 시나리오대로 세계를 이끌어가기 위해 신들이 걸어놓은.

라파엘을 따라 시선을 옮긴 남자가 혀를 쯧 찼다.

“걔 좀 띄워주겠다고 한 놈은 어릴 때부터 숨죽이고 살게 하질 않나, 죽을 만큼 노력하는 애 혈맥을 막아놓지 않나. 가당키나 해? 하여간 잔인한 것들이라니까. 차라리 삼백년 전 모로스네 시나리오가 나았는데.”

쉬지 않고 말을 이은 남자는 미간을 짚고서 잠시 화를 식혔다.

그러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문득 떠올라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래서, 걘 어떻던?”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라파엘이 조심스레 답했다.

“기억을 아예 못하던데요. 능력도 봉인 돼서 신성계나 치유계 쪽 마법은 못쓰더라고요. 주신들께서도 대적하기 버거워했던 녀석이 그러니까, 기분이 좀 싱숭생숭하지 뭐예요.”

라파엘의 염려에 남자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면 속 시간은 더 과거로 거슬러가, 검은 머리칼을 가진 한 갓난아이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남자는 다소 거칠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시야를 가득 채우던 스크린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색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눈이 오묘하게 빛났다.

“그러니까 반드시 성공시켜야지. 잘 할 거야. 그 녀석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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