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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42)화 (42/185)

#42

「거래와는 따로, 감사인사를 하고 싶어 편지를 씁니다. 나는 내일이면 새로운 자리에 오릅니다. 더 이상 예전과는 같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만, 슈트레커 영애에겐 한결같고 싶습니다. 이제 그대가 원하는 것을 나 또한 원합니다.

나는 당신이,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언제나 행운이 함께하길 바라며, 슈타커 에스카로트로부터」

거친 듯 정갈한 필체는 딱 그녀를 떠오르게 했다.

호수처럼 잔잔한 얼굴로, 속에는 검을 품고 사는 여인.

슈타커는 이제 에스카로트 영애가 아닌 에스카로트 공작으로 불릴 것이다.

‘잘됐다.’

뿌듯한 마음으로 편지를 다시 집어넣으려는데, 불룩 튀어나온 뭔가가 손끝에 걸렸다.

“뭐지?”

봉투를 기울이자 반짝이는 머리핀이 하나 툭 떨어졌다.

기다란 핀 위에는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사파이어가 세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핀을 꽂았다. 공녀의 안목이 좋은 건지, 아니면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건지는 몰라도. 제법 잘 어울렸다.

그리고 다음날, 슈타커가 정식으로 공작위에 오르던 때. 새로운 스킬을 받았다.

[타인의 간절한 욕망을 충족시켰습니다!]

[새로운 스킬 ‘재능의 축복’이 활성화 됩니다.]

[재능의 축복 Lv.1: 관심을 얻기 위해선 눈에 띄어야 하는 법! 맞춤형 재능을 뽐내 관심을 끌어보세요.

효과: 1분간 상대의 가장 뛰어난 재능에 대한 이해도 소폭 증가 / 쿨타임: 72시간]

타인의 능력을 차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 * *

나는 재빨리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후두둑. 찬장 위의 물건들이 화염마법을 잘못 맞아 머리 위로 떨어졌다.

“으아악.”

마탑의 구석진 창고 안. 나는 근래 소홀했던 공격마법 연습에 한창이었다.

마도구나 스크롤 제작, 치유마법은 웬만큼 할 줄 알았지만 공격마법은 아직 신참 마법사 수준이었다.

퍼엉! 요란한 파공음이 귀청을 때렸다.

“콜록, 콜록!”

으, 평소에 좀 해둘걸. 나는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며 나의 나태함을 반성했다.

힘 조절하기가 어려워서 연습을 게을리 했더니,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난 것이다.

“불이야!”

나는 결국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방이 통째로 불타고 있었다.

빨리 이디스나 벤이라도 찾아서 불을 꺼달라고 해야…….

“가만 보면 우리 졸부님은 사고치는 데 일가견이 있어.”

단단한 가슴팍이 갑작스레 시야를 덮었다. 허미, 이게 뭐시당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그의 가슴팍만 뚫어져라 봤다. 어쩔 수 없이 본 거다, 어쩔 수 없이.

소리도 없이 나타난 루치펠은 타오르는 방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거센 바람이 공간을 덮침과 동시에, 방금 전까지 활활 치솟던 불길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그라들었다.

타닥, 탁. 작은 불씨가 튀는 소리만 이따금 들렸다. 루치펠의 시선이 아래로 주르륵 내려왔다.

나는 머쓱하게 눈을 돌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케이크 좀 구워 본다는 게 화력 조절이 잘 안 돼서…….”

“반죽은 졸부님 몸을 직접 구워서 쓸려고 했어?”

“내가 장인정신이 좀 철저하잖아.”

당치도 않은 내 변명에 그는 날 타박하는 대신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지지?”

“날 이기려고 했어?”

“아니.”

“그럼 됐네.”

루치펠은 그러게, 하고 짧게 답하며 밖으로 날 이끌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마탑을 방문했지만 아예 밖으로 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들뜬 학생처럼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루시, 어디 가는 거야?”

“케이크 굽는 법 제대로 알려주려고.”

오, 일대일 과외라 이건가. 완전 꿀인데?

오래 걷지 않아 도착한 곳은 마탑 인근의 숲이었다.

소슬거리는 바람이 머리를 빗기듯 광대한 숲을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바람소리가 꼭 빗소리 같았다.

숲은 아직 이른 오후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빽빽하게 엉긴 나무들로 인해 어두웠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메이 네 마법은 아직 불안정해.”

“얼마나?”

불안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간 마법이 자꾸만 내 의지를 벗어나 날뛰는 망아지마냥 발현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내 물음에 루치펠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보통 공격마법의 화력이 이 정도라면.”

화르륵. 옆에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새까맣게 타 재가 되어 흩날렸다.

‘음… 이것도 보통은 아닌 것 같은데.’

이어서 그는 허공에 손바닥을 펼쳐 살짝 비틀었다.

“졸부님은 지금 이 수준이야.”

콰콰쾅!

돌연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시야를 가득 메우던 나무들이 벼락처럼 퍼부어진 폭발에 일제히 누웠다. 숲의 반절이 날아간 것만 같았다.

왓 더…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환상의 벼락쇼? 환장의 폭발쇼?

루치펠은 태연스럽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뒤를 돌아 입을 떡 벌린 채 굳어있는 날 응시했다.

“네가 코어를 단련할수록 더욱 심해질 거야. 나중엔 숲 하나 정돈 일도 아니게 될 걸.”

그럼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리 반문하려는 나보다 이어지는 루치펠의 말이 더 빨랐다.

“근데 문제는, 이게 조절이 안 된다는 거.”

그의 손가락이 정확히 내 중심을 가리켰다.

“적에게 향해야 할 화력이, 만약 너 자신에게 떨어진다면? 공허에 쏟아져야할 공격이, 왕궁에 떨어진다면? 조절할 수 없는 힘은 힘이 아니야.”

나도 알아, 안다고. 안 그래도 저번에 서재 홀라당 태워먹어서 다니엘한테 한 소리 들었단 말이야.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물론 나 말고 책.

‘표정이 심각했던 걸 보면 상당히 중요한 서적들이었겠지. 미안요, 오라버니. 오늘 잘 배워 갈게요.’

루치펠은 뼈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독이지. 스스로에게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인 꼴이니까. 명색이 마법산데, 매번 그런 위험을 안고 마법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으윽, 충분히 아프다 이놈아… 그만 때려라…….

가차 없는 팩트체크로 전치 24주는 선물할 듯했던 루치펠은 고맙게도 그에 맞는 솔루션 역시 제공해주었다.

“또 그렇다고 해서 마법을 아예 안 쓸 수는 없고. 저번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되니까.”

마침표를 찍는 목소리가 미묘하게 날카로웠다.

‘저번이라면… 베인이 날 죽이려고 급습했던 때를 말하는 건가?’

짜아식, 은근 기특하단 말야. 그런 것까지 다 신경써주고.

장성한 손자를 보는 기분으로 흐뭇하게 웃는데, 팔에 뭔가가 찰칵 소리를 내며 채워졌다.

“그러니까 공격 마법사용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이거 차고 있어. 리미터 같은 건데, 마력이 약해지긴 해도 조절은 될 거야.”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마력을 조절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마도구였다.

일전에 이디스가 잠깐 찬 것을 봐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나는 시험 삼아 루치펠을 향해 마법진을 그렸다.

방을 통째로 날려버릴 뻔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마법은 내 의지대로 순조롭게 발현되었다.

파박! 폭죽처럼 터지는 불꽃을 쳐내면서 루치펠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 뭐하는 거야?”

“나무가 맞으면 아야하잖아.”

“나는 괜찮고?”

“여기서 괜찮은 사람이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는 방어하길 멈추고 가슴께를 문지르며 능청을 떨었다.

“나도 아파.”

나는 공격을 그만두었다. 그리곤 딱 잘라 일갈했다.

“엄살 부리지 마.”

지금까지 겨우 손가락만 까딱거렸잖아.

* * *

휴우.

암흑가 던켈하이트의 광장 한복판.

단상 뒤편에 서서, 나는 숨을 골랐다. 드디어 대망의 날이었다.

밖은 수다하게 몰린 인파로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클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여러분을 모이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간 공석이었던 수장의 자리를 더 이상 빈자리로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장을 정하겠다는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다들 몸을 낮추면서도 번들거리는 눈에선 은근한 욕망이 읽혔다.

그 자리가 혹시 내 것이 아닐까, 하는.

침 꼴깍이는 소리마저 들릴 침묵 사이로, 그 모든 욕망을 배반하듯 클라인이 엄숙하게 선포했다.

“후계자가, 나타났습니다.”

“……!!”

파도가 친 것 마냥 술렁임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개중엔 불쾌하다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간부들은, 베인 님의 뜻에 따라 그 후계자를 새로운 주인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표 뒤의 짧은 침묵이 날 이끌었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였다. 나는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가 좌중 앞에 섰다.

매섭게 번뜩이는 수백 개의 눈동자가 모조리 내게 쏠렸다.

꼭 먹잇감을 물어뜯을 준비가 된 짐승 떼 앞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무슨 저런…….”

“그래도 베인 님의 뜻이라는데…….”

베인의 뜻에 동의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는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한술 더 떠 낯빛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기 시작한 사내들도 더러 있었다.

이윽고 한 남자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우리와 한 마디도 없이 멋대로 후계를 결정하다니! 그것도 저런 먹다 버린 도토리 같은 것을 데려다가 암흑가를 이끌 수장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아니, 지는 썩은 당근 다진 것처럼 생긴 게!

나는 웃는 낯을 유지한 채 입술만 달싹여 속닥였다.

“누구예요? 지금 소리치고 있는 사람.”

클라인이 내가 듣기 편하도록 살짝 상체를 기울인 채 조용히 답해주었다.

“펜트런 길드의 길드장입니다. 제가 이끌고 있는 제르덴 길드 다음으로 큰 규모의 길드입니다.”

꼴에 길드장이라고, 뒤에 몰려있는 무리가 그의 말끝마다 옳소, 옳소! 하고 맞장구를 쳤다.

길드원들의 성원에 힘입은 남자는 계속해서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뒤에서 당신들끼리 작당해서 조종할지 어떻게 아나! 뭘 믿고 암흑가를 맡긴다고! 어디서 굴러먹다 온 쥐새끼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저 년을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

“없다!”

아니, 대사 표절이야 뭐야. 다들 왜 이리 창의성이 없어.

이제는 급기야 그의 선동에 이끌린 사람들까지 덩달아 나의 퇴출운동에 동참했다. 보다 못한 셀턴과 켈른이 나섰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간부들의 제지에도 달궈진 열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잔뜩 흥분한 사람들은 까마귀 떼처럼 악을 써댔다.

“이제껏 얼굴 한 번 비춘 적 없는 게 후계자라고? 말도 안 된다!”

“한낱 계집에게 암흑가의 미래를 맡기다니! 베인님을 능멸하는 짓이다!”

간간이 추임새로 욕설까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서서 사태를 관망했다.

저쪽에서 이렇게 나올 줄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비록 이렇게까지 거셀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이쪽도 비밀카드를 준비했지.’

나는 괜스레 머리핀을 만지작거리며 비밀카드의 등장을 기다렸다.

또각. 또각.

단상 위로 경쾌한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소란이 차츰 잦아들었다.

마침내 그녀가 내 곁에 다다랐을 때에는, 광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진 후였다.

나를 보호하듯 내 앞에 선 슈타커가 큰 소리로 단언했다.

“내가, 인정합니다.”

이 공간에 있는 누구든 두 귀에 똑똑히 새겨들으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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