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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41)화 (41/185)

#41

윽.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찌 된 게 얘길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뭐 재미… 그런 거야?”

시종일관 태연자약하던 그가 내 물음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을 반쯤 내리깐 것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뭘 묻든 언제나 망설임 없이 답하던 루시퍼였다.

대답을 위해 말을 골라내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드문 풍경이어서, 나는 잠자코 답을 기다렸다.

허공을 훑던 붉은 눈동자가 다시 내게로 향했다.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럼 뭐 같은데?”

“……잘 모르겠어.”

똑똑, 저기요. 댁이 모르면 누가 아나요. 차라리 남의 잔치 뒤엎는 괴팍한 취향이 있다고 하시지 그래요.

“아무래도 나한테 독특한 취미가 있었나 봐. 덕분에 알게 됐네. 고마워, 졸부님.”

방금 그런 생각한 지 일 분도 안 됐는데 그러기 있어?

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관종한테 그러는 건 아니지.

내 손을 쥔 루시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인사 안 해줄 거야?”

“음…….”

내가 말끝을 흐리자, 루시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마탑주든 루치펠이든 난 여전히 나야. 졸부님의 신입님이라고.”

벌어진 사이는 금세 좁혀졌다.

그의 말마따나 그가 내게 권위적으로 굴지 않는 이상 달라질 건 없었다.

그조차도 내가 먼저 쭈뼛거렸으면 거렸지, 루시… 아니. 루치펠이 먼저 그럴 것 같지도 않았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익살스러운 투로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루치펠 씨.”

그러자 그도 덩달아 내 장단에 맞춰 우아하게 인사했다. 연극배우처럼 노련한 동작이었다.

“영광입니다, 메이블린 아가씨.”

손등에 그의 입술이 짤막하게 닿았다 떨어졌다.

나는 유쾌한 연극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키득거렸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요.”

언제나 한결같아줘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내가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 * *

호롭. 나는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소파에 앉아 슈타커를 기다렸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내가 공작저를 찾아왔다.

뭣하면 쫓겨날 각오도 하고 왔는데. 의외로 순순히 들여보내줘서 조금 놀란 참이었다.

‘마탑과도 이미 얘기를 마쳤고, 이제 남은 단계는 이것뿐이야.’

속을 달래며 차를 한 모금 더 넘겼을 즈음. 슈타커가 들어왔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피차 시간 낭비하기는 싫으실 테니, 인사치레는 제쳐두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갈게요.”

“…뭐죠?”

“거래를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슈타커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휘었다.

“거래라면, 무슨?”

“만들어드릴게요, 공작. 에스카르토 영애가 아닌. 에스카르토 공작으로 불리게 해드릴게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내 말이 들어선 안 될 저주라도 되는지, 슈타커의 안색은 눈에 띄게 굳어갔다.

“이 이야기는 일전에 끝난 걸로 압니다만.”

“끝나지 않았어요.”

“……하.”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미간을 짚었다.

“그러니까, 그대가 대체 무슨 수로?”

살짝 가시 돋친 어투였다. 계속해서 끈질기게 달라붙는 내가 성가실 만도 했다.

그렇다고 굴할 순 없었다.

본격적인 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영애도 알겠지만, 저는 마석이 샘솟는 동굴을 소유하고 있어요. 그간 채굴량이 상당히 쌓여서 이젠 무역을 좀 해볼까 하고요.”

며칠 전, 마탑에 다녀온 후 나는 마석 동굴을 세상에 공개했다.

더불어 내가 마석을 정제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사실도.

이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마석 주문은 빗발쳤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주문량을 체계적으로 처리해줄 상단이 필요해졌다.

‘며칠 간 저택 앞이 문전성시였지.’

아직 마땅한 상단이 없는 내게 여기저기서 계약하자며 손을 내민 탓이었다.

심지어는 폭발적인 잠재량을 알게 된 제국에서도 먼저 거래하길 자처하며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제안을, 모조리 거절했다.

슈타커도 이를 모르진 않을 터였다. 그래서 더욱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제국이 제안을 해왔을 때 거절하지 않았나요? 대륙에서 가장 큰 공급처를 마다할 정도로 더 좋은 거래는 없을 텐데요.”

없긴요. 어제도 다녀왔는걸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답니다. 공녀님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죠.’

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한껏 내걸었다.

“있어요. 마탑.”

“……!”

딱 떨어지는 대답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영애에겐 상단이 있죠. 당신의 상단에 앞으로 발생할 마탑과의 모든 교역을 제 대행으로 위임하겠습니다. 왕국에서 제일가는 상단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나는 태연스럽게 그 시선을 받아쳤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인정받고도 남을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빈말로라도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마탑과의 교역권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특별한 의뢰가 아닌 이상 전쟁을 비롯한 모든 분쟁, 어떠한 상황에도 중립을 지키는 독자적인 세력.

그럼에도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곳.

그런 마탑과 최초로 교역을 튼 상단이 슈타커 소유의 상단이 된다면 제 아무리 빳빳한 스테반 에스카로트라도 그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떠올린 묘책은 바로 이것이었다.

‘부디 넘어와야 할 텐데.’

슈타커는 이해관계를 착실하게 따질 줄 아는 상단주답게 날카로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법. 그녀는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뭐죠?”

“간단해요. 당신은 반드시 이 거래를 성사시켜야만 하는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고, 그러니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테죠. 중간에 마석을 빼돌리는 비열한 짓 따윈 하지도 않을 거고요. 무엇보다도.”

한 템포 말을 쉰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충분히 능력 있잖아요. 슈타커 에스카로트, 당신.”

일말의 의심도 없는 내 대답에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래도 내게 원하는 것이 없진 않을 텐데요.”

좋아, 드디어 틈이 보인다.

철옹성 같던 그녀의 태세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이를 잽싸게 파고들었다.

“이아베 나폴가.”

“!”

조용한 호수에 파문이 인 것 마냥 슈타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미 간부들은 날 받아들여 줬어요. 하지만 암흑가의 모든 이가 날 인정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 둘 다 후계자의 위치기는 하지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죠. 당신은 공작님으로부터, 나는 암흑가로부터.”

“…….”

관심법으로 읽은 속내에서 대충 짐작은 했다만. 별다른 말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수장 자리를 딱히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것은, 서로가 원하는 자리에 앉기 위한 일종의 계약인 것이다.

나와 칼리안이 약혼의 탈을 뒤집어 쓴 거래를 한 것처럼.

“베인의 대리인이나 마찬가지인 당신이 날 공공연한 후계자로 인정해 준다면, 나도 도와줄게요.”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는 거,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 * *

슈타커는 떨리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지금 눈앞에 내밀어진 저 손이, 꼭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동아줄처럼 보인다면 미친 걸까.

‘후회하지 않는다고…….’

문득 슈타커는 그것이 착각이든, 자신이 정말로 미친 것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몇 년을 아득바득 애를 썼던가.’

검술, 학업, 승마, 예술, 사업…. 그 분야가 무엇이든 간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베인을 단 한 번만이라도 제치고 싶었다.

그보다 앞에 서면, 아버지도 언젠간 자신을 먼저 봐주리라고 생각했다.

‘그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해도, 검술 대회에서 1등을 해도, 하물며 상단을 터무니없이 적은 자본으로 시작해 예상치 못한 규모로 키워도.

그 긴 시간동안 스테반의 눈빛이 제게 먼저 닿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껏해야 돌아오는 말이라곤 베인이었다면 더 훌륭하게 해냈을 텐데, 네 오라비였다면 더 완벽했을 텐데, 따위의 같잖은 비교타령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스테반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껏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 말곤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보더라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귀족 영애가 힘들게 무슨 상단이냐. 차라리 상단을 가지고 있는 신랑감을 찾는 게 편하지 않겠느냐. 그만한 외모와 재력을 가졌으면서 뭣하러 힘든 길을 가려 하느냐.

참으로 이상하고 우스운 일이었다.

자신은 편하고 싶다고 말 한 마디 던진 적도 없는데.

힘든 기색 한번 내비친 적도 없는데.

다들 멋대로 재고 저들 입맛대로 맞춰선 그딴 소리를 잘도 지껄여댔다.

하지만 메이블린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충분히 능력 있잖아요. 슈타커 에스카로트, 당신.

온전한 능력을 봐주었다.

슈타커 에스카로트. 왕국의 공녀도, 어여쁜 외모를 가진 여인도 아닌 한 사람.

그냥 그 한 사람 자체의 능력을.

“내 손을 잡는 거,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길수가 없는 선택지였다.

슈타커는 손을 뻗어 메이블린의 손을 잡았다.

‘암흑가의 후계자라…….’

애초에 원하지도 않던 자리였다. 후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클라인이나 셀턴에게 알아서 하라고 맡길 생각이었다.

한데 매번 억하심정만 주던 오라비가 그래도 보는 눈은 있는 모양이었는지, 꽤나 멋진 사람을 데려다 놓았다.

암흑가를 잘 이끌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메이블린을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가 거대한 바다처럼 넘실댔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직 시작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슈타커는 그리 말했다.

아주 확신하고 또 확언하면서.

* * *

“메이, 좀 쉬거라. 물자 검토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러세요, 누님.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잖아요.”

다니엘과 미하일이 한 마디씩 던지며 날 방으로 떠밀었다.

보던 서류까지만 검토하고 싶었지만 슈트레커 자작까지 가세한 통에 서류도 빼앗겼다.

“어서 들어가거라. 실수 없이 마쳐놓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3대 1의 대결에서 밀린 나는 결국 방에 강제로 감금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미하일이 맡겨만 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닫고서 나는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다.

그들 말대로 요즘 수면량이 부족해서인지 조금 피곤하긴 했다.

‘그래도 한가로운 것보다는 낫지.’

슈타커와의 모종의 계약이 끝난 후, 무역은 순풍을 단 배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동굴에서 나온 마석들은 전부 슈타커의 상단을 통해 마탑으로 납품되었다.

그 과정이 다소, 아니 상당히 떠들썩하긴 했지만.

신문은 온통 슈타커와 내 소식으로 가득했고 어딜 가나 우리 이야기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어느 정도는 이미 각오했던 터라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다름 아닌 마탑과의 거래였으니까.

‘오히려 관심수치를 수월하게 채울 수 있어서 좋았지.’

왕세자의 약혼녀라는 위치와, 왕국의 유일한 마법사라는 명성 덕에 이제 수치를 채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관종력이 한 단계 더 오른다면 몰라도, 당분간은 숨 좀 돌릴 만했다.

날 부르는 이는 많았고, 갈 수 있는 파티는 넘쳐났다.

때문에 아직 시스템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침대 위를 뒹굴면서 모처럼의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설탕에 절인 호두알을 입안에서 굴리며 내 앞으로 온 수십 통의 편지를 뜯었다.

너무 많다보니 이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막 열여섯 번째 편지를 뜯으려던 찰나, 유독 존재감을 내뿜는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은은한 펄감의 두꺼운 봉투 위에는 슈타커 에스카로트라는 글씨가 멋들어지게 휘갈겨져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속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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