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39)화 (39/185)

9. 저택의 주인

#39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대답이었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선언이었지만 그만큼 우직했다.

주인이 바뀌었으니, 새로운 주인을 따른다. 그 자리에 앉은 자가 누구든 간에.

그는 이게 어찌된 일인지 묻는 대신, 앞으로의 일에 대해 걱정부터 했다.

“지금은 다행히 잘 넘어갔지만, 암흑가의 많은 이들이 갑작스런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이 틈에 한 자리 잡아보려는 놈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중입니다.”

수장이 공석인 불안정한 이 상황에, 메이블린의 느닷없는 출현을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게 분명했다.

설령 간부들이 전부 나서서 그녀를 인정한다고 해도.

게다가 그들 역시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수뇌 자리를 놓고 큰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겠습니다. 암흑가에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길 원하는 길드가 꽤 있습니다.”

클라인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실황을 읊었다.

메이블린은 턱을 괸 채 설명을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이 한 번에 받아들여지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사실 정말로 먹히는지 거의 실험 차 온 것에 더 가까웠다. 실패한다고 해도 시간을 돌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성공했다. 다 된 밥상에 이제 수저만 놓으면 됐다.

‘여기서 멈출 순 없지.’

그녀는 곧 강구책을 떠올렸다.

“그럼,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의 지지가 있다면요?”

모두가 납득할 만한 사람이라.

클라인은 머릿속으로 포위망을 좁혀갔다.

베인이 죽은 시점에서, 그럴 수 있을만한 위치의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공녀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으십니까?”

“아뇨.”

“…….”

“이제부터 나눠봐야죠.”

얼굴 한 번 마주한 적도 없으면서 저리 당당하게 말하는 것인가.

이번만큼은 클라인도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 * *

“으으…….”

해가 중천이었지만 나는 아직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제 암살자들 사이에서 기 빨리지 않으려고 애쓰다보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공녀하고는 나중에 얘기하지, 뭐.’

점심도 내려가서 먹기 귀찮아서, 달리아에게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십여 분간 더 미적거리다가 겨우 이불을 걷고 일어나자 달리아가 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포크를 들고 아무거나 찍어 입에 쑤셔 넣었다. 아침부터 운동하는 나, 아주 칭찬해.

여기서 대체 뭐가 운동이냐 묻는다면, 씹는 것도 운동이다. 입운동.

꼴에 꽤 허기가 졌는지 수프 그릇은 곧 바닥을 보였다.

달달한 오렌지 주스까지 한 모금 넘기자 음식을 두고 나갔던 달리아가 다시 돌아왔다.

손님이 왔다는 소식과 함께.

태평하게 앉아 닭고기를 천천히 우물거리고 있던 나는 그대로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챙강! 유리잔과 부딪힌 식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누가… 왔다고?”

내가 들어도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반면 달리아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반듯한 태도로 답했다.

“에스카로트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슈타커 에스카로트가, 나를 먼저 찾아왔다.

‘대체 왜?’

나는 서둘러 간단히 치장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밟았다.

저택에서 가장 좋은 응접실. 이곳을 사용하는 건 지난번 칼리안이 다녀간 이후로 두 번째였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나름 패기 있게 문을 열어 재꼈다.

슈타커는 고아한 동작으로 소파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슈타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제가 경황이 없어, 대책 없이 굴었습니다. 무례했던 첫 인상을 부디 바로잡을 기회를 주어 감사합니다.”

“네? 그게 무슨…….”

그건 오히려 제가 해야 할 말 같은데요. 우리,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이 사족보행하는 저의 뒷모습 아니었나요.

나를 짐승으로 착각했어도 할 말이 없었는데. 사과하러 굳이 찾아오다니?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저 또한 어릴 적 어미를 잃어 어떤 심정인지 압니다. 그대가 그대의 어머니와 조우하는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했습니다.”

맞다. 때마침 옆에 있던 자작부인의 묘비를 방패로 썼었지. 정말로 내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이러시니까 어째 패륜아가 된 기분인데.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부인. 대신 이 집 식구들에게 앞으로 잘 할게요.’

속으로 기도를 올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휴, 아녜요. 어차피 막 떠나려던 참이었는걸요.”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그제야 슈타커가 살풋 미소를 띠웠다.

용건이 끝난 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왕국에서 이렇다 할 또래 친구가 없는 내게 그녀와의 대화는 퍽 재밌었다.

그러다 퍼뜩 의문점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공녀님께서는… 에스카로트 공을 기리기 위해 그곳엘 가신 건가요?”

“…….”

슈타커는 쉬이 대답하질 못했다. 눈에 띄게 몸이 굳은 것도 같았다.

공작, 필요, 인정.

어제 묘지에서 들었던 그녀의 속마음이었다.

그녀가 가족을 잃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면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나는 그녀를 돕고 싶었다. 나 역시 그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기도 했고.

그러려면 일단 슈타커 에스카로트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이해가 동반되지 않은 어쭙잖은 도움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으니…….’

나는 확신을 얻기 위해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킬 ‘박수갈채(Lv.1)’가 발동됩니다!]

[30초간 ‘슈타커 에스카로트’가 당신에게 동조합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박수치는 손 모양의 작은 아이콘이 뜨자, 나는 그녀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말해주세요, 공녀님.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한 3초 정도 지났을까. 머뭇거리던 그녀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후사를 보지 않고 오라버니가 죽은 바람에 아버지께서 다시 공작 일을 맡고 계십니다. 나이가 꽤 있으신 지라, 그 자리를 맡아줄 마땅한 사람을 얻기 위해 제게 어서 결혼하길 종용하고 계시죠. 이게 문젭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슈타커의 덤덤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정작 저한테는 물려줄 생각을 애초에 하지 않으신다는 것. 나는 능력을 인정받고 공작이 되고 싶습니다. 자리를 채울 사람을 데려오는 도구로 사용되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녀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알림음이 울렸다.

[스킬이 해제됩니다!]

30초가 지났다.

슈타커는 깊숙이 파묻어 두었던 속내를 꺼냈다. 내가 원했던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닌 모양이었다. 슈타커의 얼굴이 목부터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이제야 퍼뜩 정신이 든 듯했다.

그녀가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속이 복잡해 나온 말이니 그냥 흘려들으세요. 그리고 앞으로 제가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웬만하면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슈타커가 차가운 얼굴로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꼭 치부라도 들킨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렇군요. 그럼, 빠른 시일 내에 제가 다시 찾아뵐게요.”

“…지금 내 말을 듣긴 한 건가요?”

슈타커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다시 보지 말자고 한 게 불과 몇 초 전인데, 곧바로 찾아가겠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겠지.

문까지 세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서 우리는 멈춰 섰다.

“네. 아주 잘 들었죠. 공녀님은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다는 거.”

“그건 그저 헛소리일 뿐…!”

“정말 헛소리로 치부하고 싶으세요?”

뭐라 쏘아붙이려던 그녀가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꼭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높은 권세와 남부럽지 않은 배우자와 넘치는 재물이 있으면 뭐하나요. 당신이 직접 쥔 것이 아닌, 온통 주어진 것들뿐인데. 그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당신이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 건 뭐죠? 진정한 당신의 소유라 말할 수 있는 건?”

슈타커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일궈온 모든 것이 내 소윱니다. 내가 쌓아온 시간이, 걸어온 길이. 진정한 납니다.”

“맞아요.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죠. 그러니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드릴게요.”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억눌린 욕망을, 이대로 둘 순 없지.

“에스카로트의 주인이 되게 해줄게요.”

“……!!”

슈타커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끓어오르는 욕망을 애써 꾹꾹 눌러 담는, 그럼에도 그를 기어이 비집고 새나오는 의지.

그녀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노려보다가, 돌연 몸을 홱 돌렸다.

“즐거웠습니다, 슈트레커 영애. 그럼 이만.”

* * *

공작저로 돌아온 슈타커는 쓰러지듯 앉아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이게 대체…….”

마치 폭풍 속에 휩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해주세요, 공녀님.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온통 터무니없는, 이루어질 리가 만무한 말이었다.

허황된 꿈을 짓누르고 아버지 스테반의 목소리가 슈타커를 옥죄였다.

-슈타커. 넌 아무 생각 하지 마라. 이 아비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

원하는 게 뭐냐고?

말해봤자 뭣하나. 갈망해봤자 어쩌나.

어차피 자신은 아버지가 물어온 적당한 신랑감 옆에서 장단이나 맞추며 살게 될 텐데.

그럼에도 제게 원하는 바를 말하길 종용하는 그녀의 눈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에스카로트의 주인이 되게 해줄게요.

당당하기 그지없는 그 태도는, 마치 이미 그렇게 될 미래를 다 안다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었다. 자꾸만 머릿속에 울리는 그 목소리를 뚝 잘라내 버릴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오히려 기대되었다.

“……미쳤군.”

슈타커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간 제 심장을 이토록 뛰게 만든 이는 없었다. 그녀의 말이 터무니없는 희망이 아니었으면 했다.

정말로 그런 미래가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문을 위해 팔리듯 시집을 가지 않아도 된다면.

아버지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굴복하지 않아도 된다면.

‘내가, 에스카로트의 주인이 된다면.’

쿵, 쿵. 한 손 가득히 느껴지는 심장소리가 야망에 찬 머릿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아무리 외면하려 애써도 그녀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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