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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38)화 (38/185)

#38

재키는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었다는 듯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대단한 의뢰기에 간부 한 둘도 아니고 전원이 필요하단 말인지.

그녀는 메이블린을 가리키며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그러세요? 그냥 죽이고 입 싹 닦으면 안 돼요? 저는 얘 별로 맘에 안…….”

“재키.”

낮은 울림이 재키의 뒷덜미를 선득하니 훑었다. 메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언제나 정중하고 나긋하던 음이 아닌, 차갑고 엄격한 목소리.

“부탁합니다.”

정중한 말투임에도, 은근한 위압감이 실려 있는 어조.

그의 한 마디에 재키는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클라인은 난감한 기색으로 앉아 있는 메이블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시킨 일은 곧 잘하는 녀석들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메이블린은 방금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다시 되짚어 봐야만 했다.

‘원래 간부가 한 마디 했다고 이렇게 쪼나? 다 간 정도는 필수 아이템 마냥 배 밖으로 꺼내들고 다니는 암살자들이라 끄덕 안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속속들이 도착한 간부들이 클라인 앞에 죄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보스.”

‘방금 뭐…. 보스? 보스라고?’

메이블린은 클라인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수박이 굴러간대도 받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는 말없이 그녀의 시선을 슬 피했다.

클라인은 암흑가에서 가장 큰 길드, 제르덴의 길드장이자 간부들의 보스였다.

하지만 그가 존경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인 건 단순히 지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보스라는 자리에 큰 권력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명령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의 말에 수긍하는 것도 아니고, 베인처럼 절대적으로 복종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쌍둥이를 비롯한 간부 전원이, 그들의 주인인 베인과는 별개로 클라인을 따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베인 에스카로트는 왕국의 유일한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라인이 도착한 간부들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는 이미 베인을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가 주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힘을 숨기고 몸을 낮추었다.

주인의 말에 충성하는 개는 보살핌을 받지만, 감히 그의 자리를 넘보는 개는 비참하게 죽임당하거나 버려질 뿐이니까.

그는 자신의 자리가 베인보다 아래라는 것을 매번 확인시켜 주어야만 했다.

알아도 모르는 척, 할 수 있어도 불가능한 척.

그렇게 스스로를 죽여가며 납작 엎드려 살았다. 좁디좁은 상자에 기어이 몸을 욱여넣었다.

자신은 딱 그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놈이라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세뇌시키면서.

하지만 그의 성정이 타고나길 본디 맹수의 것.

애초에 폭탄을 십 년 넘게 끌어안고 산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숨겨도 이따금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새나올 때마다, 간부들은 그가 그저 이빨만 드러내지 않은 짐승일 뿐이라는 것을.

친절함을 가장한 말씨와 태도는 그 욕구를 억누르기 위한 눈가리개용일 뿐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오직 그만 제외하고.

베인 역시 일찍이 이를 알고 유독 클라인에게만 더 엄격하게, 모질게 채찍을 휘둘렀다.

분수를 자각시키고, 기어오를 생각 따위는 털끝만큼도 담지 못하도록.

때문에 그는 이제 자유를 얻었음에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베인의 그림자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억압으로 클라인의 기억을 꽉 붙들고 있었다.

열일곱 살의 기억 중 하나가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몸이 좀 컸다고, 베인의 발길질을 막으며 고개를 쳐들었던 날이었다.

-어디 다시 한 번 더 내 앞에서 그리 눈을 떠 보거라. 너의 두 눈은 물론이고, 사지까지 전부 찢어 들개들에게 던져줄 터이니.

그는 벌로 한 달을 독방에 갇혔다.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하루 식사로 겨우 나왔고, 끔직한 악취가 코를 찔러댔다.

베이고 찢겨 썩어가던 살이 부패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그는 간신히 숨만 붙인 채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 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인에게 대항했던 날이 되었다.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간부들은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이질적인 메이블린을 한 번씩 훑으며 자리에 앉았다.

온통 새까만 사람들 사이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그녀는 꼭 흙탕물 속에 잘못 떨어진 별사탕 같았다.

휑하던 공간이 어느새 꽉 찼다. 그럼에도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의자가 하나 남아있었다.

“한 자리가 비는군요.”

클라인의 물음에, 어깨까지 오는 검붉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여자가 답했다.

“켈른은 요즘 왕세자의 약혼 일로 바쁜 모양입니다.”

셀턴의 대답을 들은 메이블린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켈른? 우버왓츠 경이랑 이름이 똑같잖아. 거기다 왕세자의 약혼 일이라니? 설마.’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메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메이블린.”

예상치도 못한 만남에, 켈른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는 궁에서 빈틈없이 유지하던 말끔한 차림이 아닌, 단색 상의에 밋밋한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늘 정돈되어 있던 머리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채였다.

메이블린은 그가 왜 여기 있는지를 이해하려 애썼다.

왕궁과 암흑가. 왕세자의 보좌관과 암살자.

그의 연결고리를 빠르게 되짚어보던 그녀는 침착하게 속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당황한 티를 내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자격으로 왔으니, 괜한 꼬투리를 주어선 안 됐다.

메이블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인사했다.

켈른하고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마주칠 테니 얘기할 기회는 많았다. 지금은 이곳에 온 이유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했다.

켈른 역시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모든 인원이 모이자, 셀턴의 시선이 클라인에게로 옮겨갔다.

“그럼 보스. 이제 말씀해주시죠.”

많은 설명을 요하는 눈들이 전부 그에게로 쏠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왕세자의 약혼녀씩이나 되는 사람이, 우리를 전부 불렀는지.”

그녀가 채 입을 다물기도 전에 한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쌍둥이 남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뭐요? 약혼녀?!”

“이 무말랭이가 약혼녀라고요?”

“너희들은 조용히 해. 아니면 나가던가.”

셀턴이 쌍둥이를 사납게 째려봤다.

이런 흥미진진한 상황에 쫓겨날 순 없었다. 쌍둥이는 즉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클라인은 메이블린을 향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메이블린은 한 차례 심호흡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베인 에스카로트가, 후계자로 나를 지목했어요.”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벼락처럼 공간을 관통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여기저기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클라인조차 전혀 예측하지 못한 얘기라 적잖이 놀랐다.

“헛소리 할 거면 네 방 침대에 있는 곰인형한테나 해. 짜증나게 여기까지 와서 대화 상대 찾지 말고. 우리가 지금 그 소리 듣는 게 몇 번째 일거 같아?”

“이젠 하다하다 별게 다 설치는군.”

몇몇은 어이없는 얼굴로 혀를 찼고, 또 몇몇은 기가 차다는 듯 그녀를 쏘아붙였다.

하지만 메이블린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어서 다음 폭탄을 터뜨렸다.

“암호. 그가 남긴 암호를 알아요. 이아베 나폴가.”

뚝. 한순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묵직하게 눌린 침묵 속에서, 극도로 날선 시선들만 빗발쳤다.

그 화살들을 고스란히 맞으며 그녀는 또랑또랑하게 단언했다.

“그는 내가 후계자가 되어주길 바랐어요.”

베인 에스카로트가 훗날 이디스를 위해 넘겨줄, 핵심 간부들끼리만 알고 있는 암호.

원래는 여주의 손에 암흑가를 온전히 쥐어주고 싶은 그의 사랑꾼 기질을 돋보이게 할 용도로 쓰일 단어였다.

하지만 현재 그는 죽었고, 여주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다 차려진 밥상이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먹지 않을 수가.

같은 공간에서 숨 쉬던 모든 사람들이 아연실색했으나, 암살자들답게 금세 냉정히 표정을 굳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우리 중에 당신에게 암호를 흘리지 않은 자가 있다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지?”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어요. 나는 베인에게서 직접 들었으니까. 왕세자의 보좌관도 여기 있는 마당에, 약혼녀가 후계자가 되지 말란 법은 없죠. 궁내에 감시하는 눈은 많을수록 유리하지 않나요?”

“흠…….”

메이블린의 실토에도 간부들은 날카로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긴 설명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정 의심스럽다면, 다 말해줄게요.”

메이블린은 책을 통해 기억하는 암흑가의 모든 정보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세탁한 자금을 베인이 어디에 보관하는지, 암호를 말해준 시점은 어느 때인지, 임무 도중 사망한 암살자들의 시신은 어디에 안치하는지 등등.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마석 동굴에서 나오는 자금으로 현재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잠재울 수 있다는 이점까지 여과 없이 얘기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녀를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베인은 죽기 한 달 전부터 마치 오늘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에게 반복해서 일러왔다.

암호를 들고 찾아온 자가 있으면, 두말없이 그를 다음 수장으로 받아들이라고.

그자가 남자든 여자든, 평민이든 귀족이든, 기사든 마구간지기든 간에 상관없이.

셀턴은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정말로… 너 같은 애송이한테 맡겼다니. 믿기진 않지만 주인님의 선택이니 일단은 따르지. 하지만 그게 널 주인으로서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니 착각하지 마라.”

선전포고와도 같은 음성이 차갑게 떨어졌다.

셀턴을 선두로, 간부들은 하나 둘 나가 뿔뿔이 흩어졌다.

갑작스런 모임이 파훼되고 남은 자리엔 클라인과 메이블린뿐이었다.

그는 자리를 떠나는 대신 메이블린을 직시했다. 마주친 시선은 선명하고, 또 분명했다.

“저는 아가씨에게 기꺼이 목줄을 쥐어드릴 겁니다.”

“왜요?”

“아가씨께선 이제부터 제 주인이시니까요.”

그러자 메이블린의 또렷한 목소리가 물음으로 돌아왔다.

“그럼 클라인은 제 편인 건가요?”

어떤 답을 듣던 간에 초연함을 잃지 않을 것만 같은 눈.

그 눈을 마주한 클라인의 담갈색 눈동자가 결연하게 빛났다.

“아가씨의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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