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겉으로는 평범한 마을, 별 다를 것 없는 거리에 불과하지만.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눈 깜짝할 새 머리통이 바닥을 구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
푸줏간 주인부터 우물에서 물 긷는 아낙네까지 전부, 한 가닥씩은 하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암흑가란 이름에 걸맞게 낮에는 평범한 시민으로 지내다가도, 거리에 어둠이 깔리면 돌변했다. 옷 사이사이 암기를 숨긴 채 왕국 곳곳으로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아주 은밀하고도 비밀스럽게, 조용하지만 누구보다도 난폭하게.
그들의 주인인 베인 에스카로트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 암흑가의 수장이던 베인이 죽었다.
후계를 위한 암호는 간부들에게 이미 일러두었다곤 하나 따로 정한 후계자는 없는 상태였다.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일 것이 분명한 암흑가.
‘그렇다면 누가 그 공석을 차지하지?’
때 아닌 의문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더불어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슴을 떠밀었다.
나는 그가 남긴 암호를 알고 있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죽을 뻔했으니까.
결국 도출해 낼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누가 차지하냐고?’
나는 위풍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비식비식 웃음이 새나왔다.
‘내가 차지하지!’
내 이름은 메이블린 슈트레커. 주워 먹기의 신이죠.
떨어진 과자도 3초가 안 지났으면 먹는데, 이 먹음직스러운 걸 그냥 둘 리가 있나요.
나는 곧장 파란지붕의 찻집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겉으로는 일반 찻집과 별다를 것 없는 외양이지만, 실상은 암흑가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직원은 평범한 차림의 나를 보고 일반 테이블로 안내했다.
나는 그녀가 준 메뉴판을 두어 번 살펴보는 척 하다가, 주문하지 않고 메뉴판을 덮었다.
“다 맛있어 보여서 그러는데, 결정을 못하겠네요. 혹시 ‘월요일의 차’를 맛볼 수 있을까요?”
레스토랑에서 쉽사리 선택을 하지 못할 때, 오늘의 메뉴를 주문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직원은 확인 차 내게 설명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수요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특별히 요일에 따른 차를 판매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으로 다시 주문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월요일의 차로 주세요. 그걸 꼭 맛보고 싶군요. 오늘, 반드시.”
직원의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그것은 주방 쪽에 있던 다른 직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쌍둥이인지, 생김새가 퍽 닮았을 뿐더러 머리색도 똑같았다.
홀 직원이 한결 은밀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스푼은 몇 개나?”
“‘각설탕’으로 주세요.”
임무를 맡기길 원하는 자들과 확인하는 암호.
개중에서도 각설탕은, 간부를 만나길 원한다는 의미였다.
뚝.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기가 한순간에 돌변했다.
직원들은 물론이고, 테이블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대부분의 손님들까지 일제히 날 주시했다.
수많은 눈동자가 모두 쏜살같이 날 향해있었다. 다들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암살자들인가 보았다.
‘아, 언제나 짜릿한 이 관종의 삶이란.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지.’
나는 보란 듯이 여유롭게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겨주었다.
그렇게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무시무시하게 쏘아지는 기운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죽이는 거겠지, 뭐.
‘죽는 건 내 전문이라고.’
관심 수치를 다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죽으면 시스템이 활성화 된 시점으로 회귀한다. 그래봤자 고작 이틀 전이었다.
이틀이면 뭐 어우, 야. 2분처럼 보낼 수 있었다.
‘이 관종의 짬밥을 무시하면 안 되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직원은 성가시다는 티를 팍팍 내며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마치 내가 불청객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예상했던 취급이라서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쫄래쫄래 그녀를 뒤따라 도착한 주방 창고 구석에는,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음침-한 것이,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입구.
직원은 그보다 더 수상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서 턱을 까딱였다.
“내려가면 긴 복도가 나올 거다. 쭉 가다가 두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자마자 나오는 초록색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돼. 운 좋게도 간부님 한 분이 마침 와계시네.”
“그래요? 그거 잘됐네요.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곤 곧장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허…. 쟤 뭐야?”
뒤에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 * *
잭은 간간이 테이블 쪽을 살피며 재키를 기다렸다.
메이블린을 안내해준 홀 직원이 재키, 주방에서 차를 준비하는 직원이 잭이었다.
일 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차로 먼저 태어난 재키가 첫째고 잭이 둘째였다.
잭은 기분이 좋을 때면 가끔씩 재키를 누나라고 불러주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낮에는 찻집을 운영할 뿐인 암살자들이었다.
“야.”
일을 마치고 창고에서 나오는 재키를 잭이 붙잡았다.
재키는 제 손목에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는 잭의 손가락을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하나하나 떼어내며 대꾸했다.
“왜.”
귀찮음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잭은 지난 18년 동안 한결같은 태도로 저를 대하는 쌍둥이 누나의 미간 주름을 무시하고서 물었다.
“지금 아래에 누가 계시는데?”
“클라인님.”
“뭐?!”
심드렁한 재키와 달리, 잭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펄쩍 뛰었다. 그의 뒤로 잡다하게 늘어진 찻잎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키가 주방을 나가려고 했지만 잭이 그 앞을 다급하게 막아섰다.
“야, 너무한 거 아냐? 딱 봐도 무말랭이 같이 생긴 게 뭣도 모르고 온 거 같더만.”
“내가 뭘. 아까 못 들었어? 분명히 각설탕 달랬잖아.”
“그래도 좀 유한 분을 소개해주지 그랬어. 켈른님이라던가.”
재키는 팔짱을 꼈다. 자꾸만 쫑알대는 동생 놈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켈른님은 요즘 다른 일로 바쁘시잖아. 반드시, 그것도 오늘 봐야겠다는데 내가 뭘 어째.”
“아무리 그래도…….”
잭이 말끝을 흐렸다.
재키는 잭의 이런 태도가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와락 구겼다. 물론 그녀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클라인은 간부도 아닌 쌍둥이 남매에게까지 꼬박꼬박 말을 높여가며 명령하는, 암살자답지 않게 퍽 신사인 자였다.
그러나 그만큼 제일 가차 없는 짐승 같은 자이기도 했다.
궁지에 몰리는 한이 있어도 그는 자신의 본 실력만은 절대적으로 숨긴 채 활동했다.
그 모습이 소름끼치도록 치밀해, 등줄기가 서늘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매번 이러는 게 지겹지도 않나.
뭣 모르는 햇병아리들이 스스로 지옥으로 기어들어올 때마다 잭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놈이 무슨 암살자를 한다고. 하여간 물러.’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자꾸만 제 앞을 막아서는 잭을 구석으로 밀어냈다.
“아, 몰라. 자기가 판 무덤, 자기가 들어가야지 별 수 있나. 넌 차나 잘 끓여. 새턴 아저씨가 떫대.”
재키가 미는 대로 밀려난 잭은 구석에서 작게 꿍얼거렸다.
“……시체 나오면 네가 청소하기다.”
“싫어, 나 바빠.”
딱 잘라 대꾸한 재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을 나왔다.
잭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운데 손가락으로 마중해주려다 말았다.
어찌 알았는지 재키가 몸을 홱 돌려 매섭게 째려봤기 때문이다.
그는 입을 비죽이며 찻잎을 우린 물을 찻잔에 따라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처럼 그의 불만도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하여간, 골치 아픈 건 맨날 나만 시키지.’
시체를 뒤처리하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었다. 운이 안 좋은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짓거리를 하곤 했다.
‘그냥 넘어가진 않으려나? 오늘은 하기 싫은데.’
잭은 좀 전에 보았던 메이블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약하기가 호통 한 번에도 부서질 유리 공예품처럼 보였던 여자.
그녀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생글거리며 인사까지 하고 들어갔다.
“하이고…….”
그의 잇새로 가벼운 한숨이 새나왔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오늘도 결국 하게 될 것이다.
* * *
잭이 속을 끓이며 차를 우려내는 사이, 메이블린은 세 번째 문 앞에 도달했다.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는데, 개미굴처럼 군데군데 갈림길이 나있는 걸 보면 마을 지하 전체가 암흑가의 비밀 거점인 듯했다.
메이블린은 재키의 말을 따라 이동해 커다란 초록색 문 앞에 도착했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 그녀는 방 안에 있던 인영을 마주하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잇새로 짤막한 탄성이 새나왔다.
“클라인…?!”
메이블린은 내심 기뻤다.
고집불통인 간부라도 만나면 어쩌지 싶었는데. 일이 꽤 수월하게 풀릴지도 몰랐다.
그녀는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 앞에 앉았다. 길쭉한 나무 책상은 클라인 혼자 앉아있는 것 치고 크기가 꽤 컸다.
“클라인도 암살자니까 여기 살겠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 간부였군요.”
내 생각을 따로 했다고? 긴 문장 중에 유독 그 부분만 강조되어 들렸다.
클라인은 우습기 그지없는 속내를 숨기며 태연스러운 낯을 유지했다.
“아가씨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게, 부탁할 게… 아니. 말할 게 있어서요. 아주 중요한 거예요.”
“……뭡니까?”
“일단 부탁 먼저 할게요. 혹시 다른 간부들을 전부 불러줄 수 있나요? 이상하게 들릴 거란 거 알아요. 하지만 모두의 앞에서 이야기해야만 해요.”
클라인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지난 번 왕세자의 독살에 사용할 와인을 귀띔해주러 갔을 때도 보았던 눈빛이었다.
그는 메이블린의 요청 자체에 대한 의문보다, 그녀가 이번에는 무슨 일을 벌일지가 더 궁금해졌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자유를 선물해준 신과도 같았다.
일분일초를 베인에게 묶여 살던 그의 목줄을 끊어준 사람이자, 비겁하게 삶의 끄트머리로 도망친 순간에조차 기어코 자신을 끌어올려준 사람.
클라인은 이제 더 이상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임무에 응하지 않았다.
앞 뒤 안 재고 몸부터 날리는 개싸움도 그만 두었다.
상처가 나면 치료했고, 힘이 부치는 날엔 쉬기도 했다.
그래봤자 고작 한두 시간 더 눈을 붙이는 정도였지만, 그에겐 큰 변화였다.
주인의 명령만 따를 줄 알던 번견에서 스스로의 의지를 따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는, 메이블린이 바라는 것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두말없이 위로 신호를 보냈다.
“부르셨어요?”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재키가 등장했다.
좀 전의 까칠한 태도는 어디가고, 그녀는 얌전히 서 클라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의 담갈색 눈이 그녀를 향했다.
“재키. 지금 당장 모든 간부들을 소집해주십시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