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36)화 (36/185)

8. 들개들의 주인

#36

무거운 공기가 에스카로트 공작저를 감돌았다.

푸르렀던 나무는 낙엽이 지기 시작했고, 쌀쌀한 바람이 이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전 공작, 스테반 에스카로트는 먼 곳을 응시한 채 뒷짐을 지고 섰다. 그는 창 앞에 미동도 없이 찬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제자리에 있었다.

그의 뒤로 기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 아버지.”

“지금은 네 얼굴을 볼 기분이 아니다. 돌아가거라.”

가을바람보다 더 쌀쌀맞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스쳤다.

시중을 들던 하인이 순간 몸을 흠칫 떨 만큼 서늘한 위세였으나,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도, 저도 할 수 있습니다.”

“방금 무어라 하였느냐?”

스테반은 그제야 뒤를 돌았다. 여인을 딱히 반기는 태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을 놓칠세라 다급히 말을 이었다.

“제가 오라버니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간 상단도 안 될 거라 하셨지만 잘 운영해 왔고, 무예도 철저히 갈고 닦았습니다. 오라버니와 똑같은 스승에게 똑같이 교육받았고, 아카데미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저는 준비가 됐어요.”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스테반의 굵은 눈썹이 사이를 좁혔다.

그는 여인의 말을 수긍하는 대신, 결국 노기로 가득 찬 호통을 내질렀다.

“시끄럽다! 베인이 죽었어! 이제 이 에스카로트를 이끌 사람은 여기에 없다! 알겠느냐!”

“그러니 제가…!”

“슈타커!”

벼락같은 호성이 질세라 매달리는 그녀의 말을 뚝 끊어냈다.

여인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고, 스테반은 쌕쌕거리는 숨을 고르며 단호히 일갈했다.

“넌 아무 생각 하지 마라. 이 아비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

주름진 눈매가 한층 깊어졌다.

한 차례 마른세수를 하고서, 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서 있는 제 딸을 바라보았다.

슈타커 에스카로트.

베인 에스카로트가 죽은 이 시점에, 그녀는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럼에도 스테반은 그녀가 직접 대를 이을 바에야 적당한 배우자를 골라 맡기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본디 여인의 의무란 그런 것이었다. 앞에 나서기보단 뒤에서 도움을 주는 현명한 아내로 남는 것.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격양된 속을 가라앉혔다.

“근래 에틸렌의 국왕에게서 혼담이 들어왔다. 잘만 성사되면 문제없을 게야. 어울리지도 않은 짓거리들은 그만두고, 당분간은 혼담에만 신경 쓰거라. 네가 처신을 바르게 해야, 에스카로트도 안정될 것이 아니냐.”

슈타커는 스테반의 잇새로 당연한 듯 쏟아지는 문장들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혼담?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이 내가 고작 형식뿐인 사랑놀음이나 하자고 그 먼 길을 달려왔을까.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에 붉은 손톱자국이 남았다.

그녀의 손은 공작가 영애의 손답지 않게 군데군데 쓸려있는데다 굳은살까지 더러 박혀있었다.

“……오라버니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그보다 더 앞서나가기 위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저 자신을 채찍질해 왔습니다. 저도 오라버니만큼 잘 해낼 수 있다고, 더 뛰어날 수 있다고 보여드리려고요.”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하등 도움도 안 될뿐더러 감정소모만 된다.

터져 나온 감성은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고 방해한다.

너무 힘들어 그만 두고 싶은 마음에 툭 하면 울던 어린 날부터, 슈타커는 그리 눈물을 그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 애썼다.

그 시간에 책 한 자 더 보고, 검 한 번 더 휘둘러 제 오라비를 따라잡는 것이 보다 중요했다.

눈물 대신 독기로 가득 찬 눈동자가 스테반을 향했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선, 여전히 절 제대로 보지 않으시는군요.”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 짙은 원망이 뚝뚝 실려 나왔다.

“제가 너무 과한 기대를 했나 봅니다. 그 모든 시간을 홀로 견뎌오는 동안, 당신께선 이리도 변함이 없으신데.”

그녀는 숨을 고르고 주먹을 폈다. 비틀린 입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꾹 다물렸다.

올 때와 달리, 슈타커는 물러가겠다는 말 한마디 없이 등을 돌렸다.

자신의 아버지가 제게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문 밖을 나서는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곧 싸한 정적만이 공간을 감돌았다.

인기척이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스테반은 우두커니 서있었다.

낙엽이 떨어지고 마른 가지만 남은 나무처럼 꼿꼿하게.

* * *

베인의 장례가 치러진 후로 한 달이 지났다.

다소 충격적인 사건이긴 했으나, 시간이 그의 죽음을 차차 덮어갔다.

일간지의 첫 장에는 더 이상 에스카로트란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다.

‘괜히 싱숭생숭하네.’

나는 눈에 띄지 않는 단출한 옷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저택을 나섰다. 그의 묘지를 방문할 작정이었다.

파렴치한 악당인데다 나를 죽이려들기까지 했다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으므로 애도는 해주고 싶었다.

‘도착했나?’

푸르릉. 마차가 점점 속도를 줄였다. 나는 습한 공기를 한 차례 들이마신 뒤, 마차에서 내렸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묘지는 입구부터 인적이 드물었다.

베인의 묘는 꽤 안쪽에 있었으므로 난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나 그 근처에 도착하기도 전에, 잠시 브레이크를 걸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베인의 묘비 앞에는, 나 말고도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다행히도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피해 걷던 중이라 딱히 인기척을 낸 건 없었다.

나는 마침 옆에 자리한 큰 나무 뒤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숨소리를 죽인 채 고개만 옆으로 슬쩍 돌리자, 인영이 자세히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키가 상당히 큰 여인이었다. 그녀 또한 남몰래 온 것인지 검은 레이스로 된 베일을 쓰고 있었다.

휘이잉.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허공에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여인이 베일을 반쯤 걷어 올렸다.

“헉.”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베인과 똑닮은 외모. 그러나 좀 더 얇으면서도 강직한 선.

여인은 베인의 동생이자 공녀인, 슈타커 에스카로트였다.

나는 행여 바람이 저번처럼 모자를 또 앗아갈까, 턱 밑에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서 그녀를 살폈다.

‘베인과 슈타커 사이가 퍽 원만하진 않았다고 들었는데.’

묘비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는 담담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마치 차가운 겨울의 호수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단순히 슬퍼하는 얼굴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한, 억울해하는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마침 이런 상황에 딱인 게 있었다.

흠, 흠. 스킬이나 써볼까.

나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우리 선조님은 안대를 쓰고 나와 주세요!’

[스킬 ‘관심법(Lv.1)’이 발동됩니다.]

[10초간 ‘슈타커 에스카로트’의 생각을 3단어 관심(觀心)합니다.]

‘공작. 필요. 인정.’

10초 동안 슈타커가 생각하고 있던 문장 중 무작위로 걸러진 세 단어였다.

무슨 생각 중이던 걸까.

나는 단어를 조합해보기 위해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굴렸다.

‘베인은 공작이었고, 그는 죽었지. 그러니 새 공작자리를 두고 현재 소문이 무성하지만 딱히 공표된 바는 없어. 인정은 그것과 관련돼서 나온 단어인가?’

슈타커의 표정을 다시 제대로 살피기 위해 나무 밖으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한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 갔지? 분명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동시에 머리 위로 긴 그늘이 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름답던 푸른 눈동자가, 흉흉한 빛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허미! 이런 쩨기랄!

단어 유추에 너무 몰두해있던 나머지 그녀가 다가오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나는 베인의 묘가 있는 곳을 나무 뒤에 숨어 몰래 힐끔거리던 중이었다.

수상하다며 멱살이 잡혀도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나를 더욱 몰아붙였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던 것이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큰 아가씬데 쪼그리고 앉아있는 날 위에서 내려다보기까지 하니 그 위압감이 상당했다.

‘어떡하지?’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지척에 있는 묘비에 시선이 콱 박혔다.

정확히는 회색 돌덩이에 새겨진 묘비명에.

「나디아 슈트레커」

‘나디아… 슈트레커? 슈트레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다 했다. 나디아 슈트레커는 미하일을 낳다 숨을 거두었다는 슈트레커 자작부인이었다.

그 말인 즉슨, 내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부디 용서하세요, 부인!’

나는 다급하게 묘비를 가리키며 통곡했다.

“어머니를 뵈러 왔습니다! 어릴 적에 돌아가셨는데, 이제 잊고 열심히 살아가기로 약속했는데, 흐엉! 너무 그리워서 그만…!”

눈물도 한 방울 찔끔 흘려줬다.

이건 연기가 아니라 양심이 아파서 우는 거다. 착한 사람은 양심이 아플 줄도 아는 법이니까.

나는 눈가를 박박 문지르며 발에 시동을 걸었다.

“아 이런…. 갑자기 눈물이 북받쳐서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잠깐….”

“영애께 콧물이나 찔찔대는 볼썽사나운 꼴을 보여드릴 순 없으니까요. 그럼 전 이만!”

별다른 짐도 없었기에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공녀가 날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나무가 있던 곳은 평지보다 조금 올라와 있는 둔덕이었다.

나는 이미 비탈면을 구르다시피 내려와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중이었고. 품위를 아는 공녀라면, 나처럼 개같이 뛰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비속어로서의 개 말고 뛰는 폼이 정말 개 같은.

‘그렇게까지 할 바에야 그냥 놓치고 말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해서 그곳을 벗어났다.

“헉, 헉. 내 팔자야!”

혹시 몰라 무작정 보이는 풀숲에 숨어서 텔레포트까지 했다.

쿵! 엉덩방아를 찧자마자 나뭇잎이 머리 위로 파스슷 떨어졌다.

“아이고 아파라…….”

루시퍼는 어떻게 이걸 떡 삼키는 것 마냥 쑥쑥 잘도 해내는지 모르겠다. 천재는 천재라 이건가.

나는 아릿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구석진 골목이라 그런지 축축한 흙냄새가 났다.

“근데 여기가 어디람.”

주위를 둘러보니, 처음 보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아선 수도에서도 꽤 거리가 있는 마을인 것 같은데.

급해서 아무 좌표나 떠오르는 대로 욱여넣는 바람에 엉뚱한 데로 와버렸다.

‘뭐, 텔레포트는 이런 묘미가 있지.’

한순간에 미아가 돼버렸지만, 그다지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어차피 집으로 가는 좌표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해가 지려면 시간이 꽤 남은 터라, 나는 마을을 천천히 구경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설렁설렁 한 이십 여분 정도 걸었을까. 마을은 평범했다.

수도보다 규모만 조금 작을 뿐, 사람 사는 그저 그런 곳이었다.

그러다 마을 광장으로 보이는 탁 트인 공간에 다다라서 우뚝 멈춰 섰다.

중앙에 한데 몰려 위치한 수많은 천사 조각상.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아. 맞다.’

익숙하다 했더니 소설 속 묘사와 똑같았다.

하늘을 향해 노래하는 여려 명의 아기천사와 우아한 날개를 펼친 한 명의 천사.

독특한 이 조각상을 마을 중앙에 떡하니 둔 이곳의 실상은, 바로 암흑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