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이디스와 눈을 마주쳤다.
“이디스. 지금 어때?”
“뭐가… 요?”
“삶의 만족도가 어때? 행복해?”
내가 왜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답을 구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눈동자가 루시퍼가 있는 쪽을 향해 굴러갔다가 돌아왔다.
“음… 지금은 선생님이 칼부림만 안 하신다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요.”
“…그래?”
새로운 고민에 부닥쳤다.
이렇게 밝고 예쁜 여주를… 굳이 그 쓰레기랑 엮어야 할까? 모로 봐도 백덤블링하며 봐도 갱생불가인 그 쓰레기와?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랬는데…….
길지 않은 고민 끝에 결론이 나왔다.
‘길들이는 맛, 좋지, 좋아. 근데 것도 정도껏이지, 여주가 정비공도 아니고. 똥차 고쳐봤자 중고차밖에 더 돼? 온갖 고생 다하며 차바퀴나 갈아 끼우는 게 무슨 주인공이야. 처음부터 벤츠를 대령하란 말이야, 어?’
나는 루시퍼를 힐끔거렸다.
훤칠한 키에, 착한 얼굴에, 신입답지 않은 능력, 거기다 같은 마탑 소속이라는 것까지.
사람 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똑 따는 게 약간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건 이디스도 마찬가지니까 패스하고.
음, 완벽하군. 좋아, 남주로 승격이다!
이번엔 내가 이디스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이디스, 인연은 어디든 있을 거야. 운명의 상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폭군갱생설은 이제 영 못미더웠다.
그래! 대세는 주연보단 조연이지! 루시퍼X이디스 가자!
“음… 하하. 아직 머리가 아프신가 봐요.”
강렬하게 타오르는 내 의지에도 불구하고 이디스는 난처한 기색으로 슬쩍 손을 뺐다.
내가 베인의 죽음으로 불안증세를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루시퍼가 신경 쓸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뭐, 들킬까 봐 그래? 걱정 마. 내가 얠 왜 데리고 왔는데. 네가 전에 이디스만 오면 다 해결된다고 그랬었잖아.”
“……?”
옆에서 이디스가 자랑스럽게 허리를 폈다.
“제가 위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잖아요. 탑주… 아니, 루시퍼는 그런 섬세함이 좀 부족하다니까요. 마탑에서 위장 관련 임무는 주로 제가 맡아서 절 필요로 하신 거 아니었어요?”
아…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하지만 사실은 그 놈이 너의 운명의 배필이라서 그랬다, 하고 속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별수 없이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렇지…….”
내 긍정에 이디스가 더욱 신이 나서 설명했다.
“마물의 급작스런 공격으로 인한 사망으로 잘 꾸며놨으니까 걱정하실 것 전혀 없어요. 시체 찾는 데만 며칠 걸릴걸요? 제가 왜 마물토벌 기간이 될 때까지만 기다리자고 매달렸었는데요.”
그런 거 뿌듯하게 말하지 마…. 차라리 루시퍼가 충동질시켜서 그랬다고 해줘 제발…….
눈 뜬지 십 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다시 잠들고 싶어졌다.
너무 엄청난 정보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니 그새 진이 다 빠졌다.
“헤헤, 저 잘했죠?”
눅눅해진 김쪼가리 같은 내 상태와는 달리, 이디스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그나저나 선생님, 드디어 저한테 말 놓으셨네요. 저번에 말 놓아달라고 부탁했을 땐 거절하시더니. 더 친해진 거 같아서 기뻐요.”
핫. 그랬나?
급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다시 공손모드로 들어갔다.
“경황이 없어서 그랬나 봐요. 미안해요.”
“에이, 그러지 마세요. 거리감 느껴지게. 탑… 아니, 루시퍼하고는 스스럼없이 지내시면서.”
이디스가 손을 내저으며 섭섭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크윽 여주야, 그런 거 가지고 속상해하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럼 이디스도 편하게 말 놔요.”
“그래도 명색이 선생님이신데 그럴 수는 없죠. 대신에…….”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씩 웃었다.
“메이블린… 이라고 부르는 건 허락해 주실 수 있나요?
“당연한걸요.”
내가 말끝마다 계속해서 요를 붙이자 이디스가 고개를 저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대답해야만 했다.
“당연하… 지.”
“좋아요.”
이디스는 샐쭉 웃으며 루시퍼를 돌아봤다.
음… 저 표정은 뭐랄까…. 너만 친구냐? 나도 친구다. 하는 느낌인데.
뭐, 여주가 좋다는데 별수 있나. 주인공 말 들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나도 괜스레 웃던 차에, 이디스가 갑자기 헉소리를 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한쪽에서 나와 이디스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루시퍼도 벽에 기댔던 등을 뗐다.
뭐야, 뭔데 그래. 나도 좀 알려줘 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이디스가 속사포로 말을 내뱉었다.
“저희가 몰래 온 거라서요. 깨어나신 거 확인했으니 이만 가볼게요. 며칠 더 푹 쉬셔야 해요! 꼭이요!”
슉.
요란스러웠던 공간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이디스는 언제 내 옆에 찰싹 붙어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적막이 감도니 바깥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슈트레커 자작 치고는 빨랐고, 다니엘이나 미하일보다는 무거웠다.
백구십이 넘는 키에 기사훈련으로 단련된 체격. 집안사람들 중에 저렇게 묵직한 발소리는 노아밖에 없었다.
코어를 단련할수록 감각이 예민해지는 게 느껴졌다. 임무 때문인지 촉각을 항상 곤두세우고 있는 둘은 그가 계단을 오를 때부터 느낀 모양이었다.
“메이블린.”
상체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마주한 루시퍼가 이마를 톡 쳤다.
더불어 부딪힌 시선은 퉁명스러운 어투와는 달리 나긋했다.
“다시는 이런 짓 벌이기만 해 봐. 너무 짜증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아니, 나보다 더 시-원하게 원작 말아 드신 분은 넌데 왜 네가 짜증나? 너무 많이 말아먹어서 배가 부른 거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
“……노력해 볼게.”
“아니, 그러겠다고 해.”
루시퍼가 단호하게 일갈했다. 바로 앞에서 와 닿는 숨결이 뜨거웠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입술을 뗐다.
“알았어. 그럴게.”
“약속한 거야, 졸부님.”
그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토끼눈을 홉떴다. 루시퍼 자식은 스릴을 즐기는지 노아가 발을 들이기 바로 직전에 모습을 감췄다. 단 1초라도 늦었으면 들킬 뻔했다.
짜슥. 내 심장이 떨어진다고. 난 이제 곧 남편이 생길 몸이라 처신을 잘 해야 한단 말이야.
“……깼냐.”
나와 눈이 마주친 노아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틀 새 기사단의 훈련 강도가 높아지기라도 했나? 그의 눈 밑이 검었다.
답지 않게 어색한 동작으로 방에 들어온 노아의 손에는 작고 귀여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사실 작은 크기는 아니었지만 노아 손에 있으니 작아보였다.
커다란 덩치로 어울리지 않게 분홍색 상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 꼭 쑥스러워하는 곰 같았다.
그는 쭈뼛거리면서도 상자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어디 가서 맛있다고 다 주워 먹지 말고, 이거나 먹어.”
왕세자 양반, 노아가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내가 일러둔 대로 잘 둘러댄 모양이었다.
나는 의뭉스러운 눈으로 노아와 상자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렀다.
뚜껑을 열자마자 달콤한 냄새가 훅 풍겼다. 전에 같이 갔던 디저트 가게의 케이크였다.
설마… 혼자서 갔다 온 건가? 나 사다 주려고?
나는 멍청해 보인단 걸 알면서도 어벙하게 노아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노아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그럼 난 내려가서 사람들을 불러올게. 아래층에 다들 모여 있어. 너 절대안정 취해야 된다고 해서 달리아 말고는 아무도 못 올라가게 했거든.”
“…사람들? 뭐, 다니엘 오라버니나 미하일 말하는 거야?”
“그리고 아버지도.”
“다들 일할 시간 아니야? 왜 아래층에 모여 있는데?”
그러고 보니 노아가 대낮에 내 방에 있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오늘은 특별한 휴일도 아니었다. 평일 이 시간이면 노아는 기사단, 다니엘과 미하일은 아카데미, 슈트레커 자작은 집무실에 있어야 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내 말투에 노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가끔, 좀 예민해져야 할 필요가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가 그러니까 있는 대로 먹다가 탈이나 나는 거야.”
얘가. 지금 환자 놀리러 왔니?
노아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가 완전히 돌아서려던 찰나, 나는 황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 참. 그래도 감사인사 정돈 듣고 가쇼. 나 생각해서 사왔다는데.
“고마워, 노아 오라버니.”
저 덩치가 온통 여인들뿐인 가게에 불쑥 쳐들어가 고심해서 케이크를 골랐단 말이지.
그 모습을 생각하니,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웃음이 비식비식 새나왔다.
붙박이장처럼 서있던 노아는 여전히 문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누워 있기나 해. 계속 아프면 골치 아파지니까.”
“네, 네. 아무렴요.”
나는 설렁설렁 대답하며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댔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내심 걱정하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웬일이래.’
노아가 큰 보폭으로 방을 나가고서, 케이크 상자를 협탁에 놓으려던 나는 흠칫 손을 떨었다.
협탁 위엔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 있었다.
저번 시계탑 방문 때 바람이 가져갔던 게 분명한, 하얀 모자였다.
내가 알기로 이걸 두고 갈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신기하네.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
아무래도 케이크는 다음 번 마탑에 갈 때 보답으로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 *
“어떻더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느냐?”
“혈색은? 숨소리는 규칙적이더냐?”
“환기를 위해 창문은 열어두셨겠지요? 이제 한 시간 후에는 제 차롑니다.”
정신없이 폭격처럼 쏟아지는 질문세례에, 노아는 이마를 짚었다.
세 부자는 편안한 소파를 놔두고 굳이 일어나 서성이고 있었다.
‘원,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들도 아니고.’
노아는 그들을 진정시켜 자리에 앉히고서 입을 열었다.
“일어났습니다.”
“하…….”
“다행입니다…….”
노아의 한 마디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특별히 상해보이는 곳도 없었고요. 의원도 아무 이상 없다고 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윌리엄은 그제야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잔뜩 곱아있던 등뼈가 하나둘 제자리를 찾아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던 아이가, 갑자기 쓰러져서 실려 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엊그제 밤, 왕세자에게 안겨 마차에서 내린 딸아이를 봤을 땐 거의 숨이 넘어갈 뻔했다.
별 탈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왕세자고 뭐고 주먹질을 할 뻔했으니 메이블린이 무사한 건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그것은 비단 윌리엄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니엘은 일 년에 한 번 쓸까말까한 장기휴가를 요청했고, 미하일은 입학한 뒤로 단 한 번도 빠진 적 없던 아카데미를 결석했다. 노아 역시 번개가 쳐도 철석같이 나가던 훈련에 불참했다.
다들 메이블린의 상태에 전전긍긍해 하는 게 빤히 보여, 달리아는 흐트러지려는 입매를 다잡았다.
‘정말 이상한 집안이라니까.’
물론 그녀가 깰 때를 대비해 시간마다 속을 달래는 데 좋은 차를 준비하는 달리아 자신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