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31)화 (31/185)

7. 원작이 망했다

#31

일전에 본 적 있는 여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구름이 가리기라도 한 것인지 여자의 얼굴은 온통 뿌옇게 흐렸다.

[죽어. 그냥 죽어. 나는 네가 죽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눈앞에 영영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 이게. 꼴 보기 싫으면 자기가 죽을 것이지 왜 자꾸 시비야?

아무리 꿈이라지만 기분이 나빴다.

그때, 누가 말하는 건지 모를 목소리가 대답으로 돌아왔다.

[너 아니랄까 봐 욕심이 많네. 미안한데, 둘 다는 못 들어주고 하나만 들어줄게. 죽는 거. 어때?]

또다시 그에 응수하듯 한껏 비웃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후벼 팠다.

[생각 없이 멍청한 줄로만 알았더니, 너도 네가 여기에 필요 없다는 자각은 있구나. 아버지께선 왜 너 같은 걸 이제껏 내버려 두셨는지 몰라.]

[아버지께서 정말 모르실 거라고 생각해?]

[상관없어. 너만 없으면 그 옆자리는 내 차지야. 이제 얼마 안 남았지? 잘 가.]

[모두의 소원대로 죽어는 줄 텐데, 다시 돌아올 거야. 잊지 마. 그리고 각오해. 내가 받은 상처만큼, 아니 그 곱절보다 더 처절하게 갚아줄 테니까.]

담담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묘한 희열감이 느껴졌다.

……잠깐. 뭐라고? 희열감?

설마… 저 악독한 말을 하는 사람이 난가?

막 뭐 내 전생, 이런 건가?

이곳에서 눈을 뜨기 직전에도 꿨던 꿈임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아예 없는 가정은 아니었다.

내가 전생에 못된 짓을 해서 지금 이런 거지같은 시스템에 갇혀 벌을 받는 거야? 그런 거야?

혼란스러워 하는 찰나, 무언가 펄럭거리며 시야를 뒤덮었다.

까맣던 시야가 다시 밝아졌을 때는 꿈속이 아닌 익숙한 천장이었다.

슈트레커 저택 2층의 해가 제일 잘 들어오는 끝 방.

오래도 잤는지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하얗고 커다란 게 무슨 날개 같기도 했는데…….

“천사?”

“뭐라고?”

몽롱한 정신으로 중얼거린 말에, 누군가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꽤나 의외의 얼굴이어서 나는 눈만 꿈벅였다. 한 번, 두 번.

그래도 남자의 신형은 사라지지 않았다. 뭐야, 꿈이 아니야?

‘여긴 내 방인데… 왜 루시퍼가 있지?’

나는 힘겹게 팔을 뻗으며 몸을 일으켰다.

“으으… 무슨 일 있어?”

특별한 일 없이는 만날 이유가 없는 사이였기에 당연한 물음이었다.

조금 찌뿌둥하긴 하지만 몸도 잘 움직이고. 내 침대에서 눈을 뜬 걸 보면 칼리안이 뒷수습도 알아서 잘 해준 것 같은데.

그냥 안부 차 온 건가? 이열, 참우정인데 짜식.

머쓱함에 코를 쓱 훔치는데, 루시퍼가 팔짱을 꼬고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왜 그랬어?”

퍽 가시가 돋아있는 말투였다.

“…뭐가?”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왜 그런 멍청한 짓을 사서 했냐고.”

이제 보니 말투만 그런 게 아니라 얼굴까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그가 무서워서는 아니고, 조금 전의 꿈이 생각나서.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착하게 좀 살아보려고. 아무래도 나, 착하게 살아야겠어.”

왕세자의 독을 대신 마신 게 사심이 좀 들어갔긴 했다만. 결과적으로는 사람 하나 살린 거니까 전생의 내 죄, 어떻게 삭감 안 되려나.

그러자 루시퍼의 미간에 진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착하게 사는 게 독 마시고 저승 문턱까지 갔다 오는 거야? 너, 꼬박 사흘을 누워있었어. 결혼이 그렇게나 중요해?”

“아니이… 꼭 그게 목적이라기보다는… 목숨을 살려주는 김에 결혼도 하면 겸사겸사 좋다, 이거지이…….”

“너 진짜…!”

루시퍼는 분통을 터뜨리다 말을 말자는 듯 억눌린 한숨을 내뱉었다.

“네가 정말 사람 짜증나게 만든다는 건 알았으면 좋겠다.”

평소 투닥거리긴 했어도 내게 화를 낸 적은 없었는데. 요즘 마탑에 안 풀리는 일이라도 있는 건가?

오늘따라 상당히 날카로웠다. 때문에 나는 조금 주저하다 물었다.

“그… 있잖아, 이디스는 안 왔어?”

“걔는 왜 찾는데.”

루시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아 왜. 또 뭐가 불만인데.

나는 다시 쭈그러들었다.

“아니, 뭐… 그냥…….”

탁. 말하기가 무섭게 창문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종달새처럼 날아온 이디스가 창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놈 시원하게 따왔어요-!”

전에 없이 말간 낯이었다. 나는 이디스가 저렇게나 밝은 얼굴을 한 채 루시퍼에게 인사하는 것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그 놈? 뭘 따와?’

그녀가 쭉 내민 팔에는, 정체 모를 붉은 액체를 덕지덕지 묻힌 포대자루가 하나 들려있었다.

순간, 섬뜩한 감각이 식은땀을 따라 등줄기를 훑었다.

설마, 설마.

아닐 거야. 말도 안 돼.

‘이디스는 여주야. 그럴 리가 없잖아.’

어차피 나는 죽어도 회귀한다.

꼭 그뿐만이 아니더라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코어를 지키기 위해 근 한 달 동안 치유 마법만 내리 팠고, 란슬롯에게도 미리 언질을 해두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일을 벌인 건데…….

나는 이디스가 들고 있는 자루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안에 들어있는 거, 뭐야?”

붉은 액체가 스며나오는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루시퍼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목.”

“어… 사람 목? 나무 목 아니고 진짜 사람 목?”

다소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물음이었다. 루시퍼와 이디스는 당연하다는 듯 시선교환을 했다.

제기랄.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환장하겠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뭐겠냐는 표정 짓지 마, 이놈들아.’

정황상 누구의 목일지 예상은 갔으나 진심으로 아니길 바랐다.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며 이불을 쥔 손을 그러모았다.

제발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누구… 목이야?”

“이상한 질문을 하네. 졸부님 죽이려고 했던 놈한테 딴 목이지. 수고비는 안 받을 테니까, 사양하지 않아도 돼.”

베인 에스카로트의 목이라는 소리였다.

나는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야! 누가 이런 거 따오래!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뭐야, 신선하지 않을까 봐 그래?”

그게 문제야?! 그게 문제냐고! 지금 남주가 죽었다고!

척추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기분이었다.

믿었던 이디스마저 포대자루를 덜렁덜렁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오늘 아침에 따서 굉장히 신선해요!”

이런 미친. 누가 들으면 아침에 사과라도 수확한 줄 알겠네.

‘혹시 마탑 병문안 전통이 사과 대신 목 따가는 거니? 어?’

여주야.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게 네 미래의 낭군님 목이라고.

네가 사랑했어야 할 사람이었다고!

‘죽어도 싼 놈이긴 했지만 너의 사랑으로 개조되어 재탄생했을 운명이었단 말야.’

잠시 잊고 있었다.

여주 또한 만만찮은 멘탈의 소유자라 개차반인 공작을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쯤으로 뜯어 고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근데 정말 물리적으로 뜯어고칠 줄은 몰랐지!’

밀려드는 상실감에 절로 고개가 푹 떨궈졌다.

아, 어떡해. 이런 전개가 있을 수가 있나?

여주와 남주의 첫 만남이 이미 똑 떨어진 목으로 시작하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여주가 남주를 만나기도 전에 목을 따버리는 결말이 나올 확률은?

어느 쪽이든 내겐 데드엔딩이었고, 유감스럽게도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머릿속에서 거대한 종이 사정없이 울렸다.

“다 끝났어…. 전부 다 끝났다고…….”

얼굴과 함께 이불에 파묻힌 한탄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타는 내 속도 모르고 이디스는 능청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제가 그놈이 마물 토벌 떠날 때까지만 기다리자고 탑주님 말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아유, 말도 마세요. 아주 눈이 돌아가 가지고는 그 놈 저택을 통째로 날리려던 걸 탑의 모든 사람들이 몸 날려 막았지 뭐예요. 머스클의 그 튼실한 팔이 부러지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죠, 뭐.”

“이디스.”

“앗, 그게 그러니까… 저희 탑주님께서는 안 그래 보여도 선생님의 건강과 일신의 안위를 나름 걱정하셔서요…. 그런 복지 차원으로다가…….”

곁에서 이디스가 뭐라 뭐라 말을 이어갔으나, 귓구멍에 제대로 꽂히는 말은 없었다.

‘이건 꿈일 거야. 꿈인 게 분명해.’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머리가 멍하고 말소리가 멀어졌다.

‘아니, 이건 꿈이 아니야. 현실이야.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회귀. 회귀해야 돼.’

고개를 들자 이디스에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루시퍼가 보였다.

베인의 모가지는 그새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없고, 횡설수설 말을 내뱉는 중인 이디스도 보였다.

그녀는 어느새 창가에서 내려와 내 옆에 서있었다. 나는 시선을 조금 내려 이디스의 허리춤을 살폈다.

이디스는 임무에 나갈 때면 언제나 작은 단검을 지니고 다녔다. 나는 손을 뻗어 검집에서 단검을 빼냈다.

이디스와 루시퍼는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라 내 쪽을 볼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 틈에 검을 치켜들었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손이 조금 떨렸다.

예리하게 벼려진 날끝이 심장을 향해 직격하는 순간.

나는 헛손질을 하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루시퍼가 고함을 질렀다.

손아귀를 가득 채우던 검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안 돼요, 선생님!”

이디스도 기겁하며 달려들어 내 두 손을 붙잡았다. 나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이거 놔. 회귀해야 돼. 다시 되돌려야 해.”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뭘 되돌린다는 거예요.”

“나 돌아가야 돼. 이러면 못 돌아갈지도 몰라.”

“가긴 어딜 가요! 여기가 선생님네 집 아녜요? 멀쩡한 집 놔두고 어딜 가요!”

자꾸만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는 내게 이디스가 빽 소리쳤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반항하던 것을 멈추었다.

‘내, 집…?’

묘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이 생활을 당연하게 여겼더라?

언제부터 이곳을 돌아올 수 있는 내 집으로 생각했더라?

슈트레커 자작과, 다니엘과, 노아와, 미하일을 언제부터 내 가족으로 여겼더라?

언제부터… 나 스스로를 ‘메이블린’이라 불렀지?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어느새 나는, 자연스럽게 메이블린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굳이 소설 속이라 의식하고 구분 지을 때조차 말이다.

‘정신차려!’

나는 두 뺨을 찰싹 때렸다.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침착하게 생각하자, 한해원. 정말 돌아가고 싶나?

원래 세계로, 구질구질했던 그 때의 생활을 다시 살고 싶나?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엔 메이블린의 책, 메이블린의 침대, 메이블린의 옷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이제는 내 책, 내 침대, 내 옷이라 여기고 있었다.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들.

그리고 내가 스스로 맺은 인간관계들.

고민의 시간의 길지 않았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아니오’였다.

이곳은 무관심할지언정 나를 버리는 부모도, 별거 아닌 화풀이로 나를 학대하던 원장도, 고아인 나를 꺼림칙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또 그런 나를 이용해먹으려 했던 더러운 교수도 없었다.

없기만 한 게 아니라 있는 것도 많았다.

비가 새지 않는 번듯한 집과 가족이 있었고, 생활비에 쪼들려 잠 줄여가며 일하지 않아도 될 돈이 있었고, 안정적인 직장이 있었고, 날 선생님이라 불러주는 마탑 식구들이 있었다.

인정한다.

한해원은 이곳이, 메이블린으로서의 내가, 그녀로서의 삶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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