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그레이…….”
아차.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에겐 그가 구면이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생판 초면인 사이에 내가 그의 이름을 덥석 부른다는 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태연스럽게 약초를 꺼내들고 일명 ‘심봤다-!’ 포즈를 취했다.
“그래 이, 거지, 이거야! 그래이~거야!”
하, 나의 임기응변. 눈물 난다.
슬쩍 곁눈질로 그를 살피니 딱히 들킨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약초를 미끼삼아 벽에 딱 붙어 그를 슬금슬금 피해갔다.
이 한 블록만 지나면 광장인데! 사람 많은데!
그러나 처절한 내 절규가 무색하게도, 베인은 내 앞을 막아섰다.
“초면에 실례임을 알지만… 반갑습니다, 슈트레커 영애. 저는 비스코프 그레이라고 합니다.”
“아, 예… 정말 실례네요…….”
부러 그의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틀어도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베인은 너와 얘기하기 싫다는 내 비언어적 표현을 깡그리 무시하고서 말을 이었다.
“소문을 듣자하니, 마석을 판매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저도 영애와 거래할 수 있을까요?”
‘까고있네.’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경험상, 그는 내 목숨을 거래하면 했지 절대 시시한 마석 따위를 얻으려고 온 게 아니었다.
유일하게 마석을 판매하는 상단을 보유한 에스카로트 공작가에서 뭐하러 마석을 더 쌓아두겠는가.
그 원천지를 노리는 것이면 몰라도… 설마.
‘동굴 때문에 찾아왔구나!’
와, 이런 것까지 참견할 줄은 몰랐는데. 쩨쩨하고 쪼잔한 주제에 욕심은 더럽게 많은 새끼!
내 곱지 않은 시선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제가 뭘 원하는지 아시는 듯하군요. 잘됐습니다. 얘기가 빨라져서 좋네요. 저는 설명이 아니라, 통보를 하러 온 거라서.”
그가 내게로 상체를 숙였다.
“조사해보니 동굴을 하나 가지고 계시던데. 무슨 재주를 부린 건지는 몰라도 본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모양이죠? 그러니, 같이 가줬으면 합니다만.”
입은 웃고 있었지만, 내뱉는 음성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회유가 아닌 협박에 가까운 어조였다.
그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간 쓸모를 다하자마자 바로 죽임을 당할 게 뻔했다.
어떻게든 뻗대야만 했다.
“원래 원하는 게 있으면 이런 식으로 밖에 못 얻어? 함부로 짓밟고, 죽이고.”
“그게 제일 편한 방법이니까요.”
“비열하네.”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만 않으면 상관없습니다. 제가 이런 놈이라는 걸 아는 이가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사람 좋아 보이는 여상한 미소를 유지한 채, 그는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없습니다. 발설하려는 자는 그 혀를 자르고 심장을 뜯어 막았고, 그 외는 알고도 모른다 말할 자들뿐이죠. 그러니 순순히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결계를 친 건 내가 아니야. 설령 동굴에 들어간다고 쳐도, 나는 결계를 풀 수 없어.”
“그건 가보면 알겠죠.”
서늘한 칼날이 허리춤에 닿았다.
“자연스럽게 걸어. 평생 누워서 살고 싶지 않다면.”
칼날의 감촉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문득 아차 싶었다. 그간 반복되는 죽음에 무뎌져서 죽어도 다시 살아나겠거니, 했는데.
지금은 시스템이 비활성화 된 기간이라 불가능했다.
‘젠장할. 이럴 줄 알았으면 치유마법이 아니라 공격마법을 배워두는 건데!’
힐러에겐 탱커가 필요했다.
……흠. 탱커?
생각해보니 있었다. 탱커는 아니지만 더 뛰어난 조력자가.
나는 부러 벌벌 떠는 척하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이곳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일단 숲으로 유인해야 했다.
“아앗, 너무너무 무서워…….”
나는 다람쥐처럼 몸을 작게 웅크렸다. 베인은 내가 완전히 겁에 질린 상태라고 여기는 듯했다.
우리는 그가 미리 준비해 둔 마차를 타고서 동굴이 있는 숲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려 동굴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어그로 좀 끌어볼까.’
결계를 통과해 동굴 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허리를 접었다.
“허억…! 가, 갑자기 어두워져서 귀가 안 들려!”
어두워져서 귀가 안 들리는데 배가 아파!
시각과 청각, 통각의 완벽한 불일치.
사람은 억지스러운 것에 부닥치면 처음엔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하곤 한다.
베인의 주의가 잠시 느슨해진 걸 확인한 나는 곧장 목걸이에 달린 마석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주변이 온통 마석 천지라 내가 던진 마석이 눈에 띄는 불상사도 없었다.
재빠른 일련의 내 행동이 끝난 후에야 베인은 다시 칼날을 바짝 세웠다.
“헛소리 하지 말고 결계나 풀어.”
시퍼런 날은 이제 허리춤이 아닌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거울이 없었기에 볼 순 없었지만, 까딱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피가 솟구치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동굴 안에 새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를 구해줄 탱커가 도착한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는데? 덕분에 시간 끌 걱정은 덜었다, 휴.’
나는 기다란 그림자가 지는 쪽을 향해 눈을 돌려 반갑게 입을 열었… 어?
“뭐야, 왜 신입님이 와? 이디스는?”
어둠 속에 서있어 얼굴이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 연락을 받고 온 사람은 이디스가 아닌 루시퍼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내게 루시퍼가 말했다.
“저번에 업그레이드 시킨 거 잊었나보네.”
“언제 그랬는데? 아니 그보다, 신입님이 오는 게 왜 업그레이드인 건데?”
이디스는 작중 최강의 마법사가 될 인재였다.
루시퍼가 아무리 슈퍼루키라지만 그녀를 능가할 수 있을 리가.
한데 그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야.”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다.
“내가 더 도움이 될 테니까.”
고분고분한 대화의 내용과는 달리, 그의 어투는 퍽 싸늘했다.
검은 가루가 눈앞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목을 쑤실 듯 겨누어졌던 칼은 발 밑 가루가 되고 없었다.
나도 어느새 눈 한 번 깜박이니 루시퍼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삽시간에 전복된 상황에 베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클라인이 말했던 마법사가 네놈이군.”
“목 잘 닦고 다니라고 제대로 전한 것 같은데.”
“나는 말을 듣는 것보다 명령을 내리는 쪽이 더 익숙해서.”
베인이 장검을 빼들었다. 푸른 오러가 곧게 뻗은 칼날을 감싸며 빛났다.
그에 반해 루시퍼는 조금 전 가루가 된 단검을 쥐고 있었다. 아니, 그건 또 언제 복원했대.
베인이 조소를 터뜨렸다.
“지금 장난하나?”
“내가 이런저런 임무를 꽤 해봐서 하는 말인데, 꼭 실력도 없는 것들이 허세만 잔뜩 부리더라고.”
저기… 음… 실력이 없진 않을 텐데…….
방금 본 것도 있고, 루시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베인은 왕국의 유일한 소드마스터였다.
타고난 재능과 극강의 노력이 만나야만 비로소 꽃피우는 검의 최고 경지.
검기를 내뿜는 칼날은 그 위력부터 차원이 달랐다.
함부로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러로 움직임을 속박당하는 건 뭣 모르는 애송이들한테나 통하는 짓이지.”
5분 전까지는,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다.
“날 그렇게 봤다니 이거 좀 섭한걸.”
여유로운 목소리와 함께 루시퍼가 몸을 젖혔다. 춤을 추는 것처럼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베인이 기합을 내지르며 칼을 휘둘렀지만 번번이 빗나갔다.
오러가 깃든 검격에 동굴이 무너질 법도 한데, 루시퍼는 그조차도 막고 있는지 충격파가 퍼지는 일은 없었다.
스각!
날카로운 검기가 빗발쳤다.
검술을 모르는 내가 봐도 베인은 차원이 다른 실력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상당히 고전하는 중이었다.
마법사는 체술에 약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부수기라도 하듯, 루시퍼의 공격은 거침없었다.
벼려진 검 끝이 베인의 목덜미를 긋고, 긴 날붙이가 루시퍼의 뺨에 붉은 줄을 만들었다.
마력이 실린 단검과 오러를 두른 날이 수도 없이 부딪히길 십여 분.
챙강!
얼마 못 가 베인이 검을 떨어뜨렸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루시퍼는 금방이라도 베인을 죽일 듯 몰아붙이고 있었다. 경각이면 그는 루시퍼의 손짓 한 번에 숨이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멍하니 둘의 격전을 구경하고 있던 나는 다급히 루시퍼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잠깐! 죽이지 마. 이, 이디스. 이디스만 오면 다 해결돼. 지금 죽이지 않아도 해결 될 거야. 내가 장담해.”
마음 같아선 당장 갈아 마셔도 쌌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살려두어야 했다.
여주와 남주가 이어지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책에서 이름 한 번 변변히 나오지도 않는 엑스트라는 몇 명 죽는다 해도 모를 테지만 주인공은 달랐다.
주인공이 없는 소설은 의미도 없었다. 그러니 내키지 않더라도 살려야 했다.
물론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루시퍼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굳이 걔를 불러야 할 이유라도 있어?”
그는 조금 화난 것 같기도 했다.
그 기세에 짓눌려 나는 웅얼거렸다.
“아니, 뭐… 나랑 친하니까…….”
루시퍼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짧은 한숨을 내쉰 그는 베인의 목을 붙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베인이 목 졸린 신음을 토해내기도 전에, 둘의 신형이 눈앞에서 훅 사라졌다.
* * *
“뭐야. 무슨 술수를 부린 거지? 당장 나… 컥!”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느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공간.
그 속에서 베인은 분노에 휩싸인 악마를 마주해야만 했다.
“저번에 했던 경고가 같잖았나? 분명 확실하게 전달되었을 텐데. 네놈이 멍청해서 못 알아들은 모양이지?”
서늘한 목소리가 목덜미를 물어뜯고, 새빨간 눈동자가 지옥불처럼 타올랐다.
베인은 꼭 글귀로만 읽던 지옥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이번엔 확실히 알려주지. 더 이상의 경고는 없으니 살고 싶으면 똑똑히 새겨두는 게 좋을 거다.”
루치펠의 손가락이 베인의 심장께를 찔렀다. 검은 마력이 뱀처럼 서서히 스며들었다.
가슴이 천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베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짓눌린 비명을 내질렀다.
“흐읍, 큭!”
“나는 네가 누군지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앞으로도 신경 안 쓸 거야. 하지만 메이블린에게 한 번만 더 접근한다면.”
베인의 목덜미를 쥔 손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널 죽이겠다. 네가 어린아이든, 길거리의 거지든, 나라의 왕이든 상관없어. 설령 신이래도 반드시 죽일 것이다.”
루치펠은 꽉 쥐고 있던 손아귀 힘을 풀었다.
바닥에 풀썩 엎어진 베인이 한계까지 졸렸던 숨을 겨우 토해냈다.
“쿨럭, 컥! 크읍, 하…….”
“그 역겨운 머리카락이 털끝만큼이라도 눈에 띄면, 그땐 여기서 안 끝날 거다.”
“감히 네놈이…!”
“아무리 멍청해도 이 정돈 알아듣겠지. 알겠으면 이만 꺼져.”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베인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루치펠도, 메이블린도, 동굴도 보이지 않았다.
숲 아래에서 대기하던 그의 수하들만이 황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비켜!”
베인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그들을 걷어찼다.
검은 복면의 사내들 중 한명이 배를 붙잡으며 옅은 신음을 흘렸다.
‘하! 내가 신이라도 죽이겠다고?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말에 올라탄 베인은 피가 고인 침을 뱉었다.
“‘만찬’을 서둘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착오 없이 진행해. 아니면 다음은 네놈들 차례니까.”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뿔뿔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