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25)화 (25/185)

#25

가차 없는 일방적인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클라인은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되레 이를 악물고 지독스럽게 버텼다.

소리를 질러봤자 그의 가학심만 더욱 부추길 뿐이라는 걸, 체벌시간만 더 길어질 것이라는 걸. 지난 무수한 날들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콰르릉!

벼락이 치기가 무섭게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베인의 거친 숨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피로 벌겋게 물든 채찍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마법사라…….’

근래 점점 줄어드는 마석 교류에 이상함을 느낀 베인은 수하를 시켜 원인을 알아보게 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그는 마석 동굴의 존재까지 알게 되었고, 메이블린을 사고로 위장시켜 죽인 뒤 동굴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한데 숲을 샅샅이 뒤져도 동굴은커녕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 하나 보이지 않더라니. 마법사가 결계라도 쳐 놓은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기에 마석을 남발하고, 그 귀한 마법사까지 나서서 싸고도는지.

‘어떤 아가씨인지 직접 한 번 봐야겠군.’

베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퍼져나갔다.

그를 보며 클라인은 입술을 짓씹었다. 더러운 길바닥에서 다시 구르고 싶진 않았다.

그 여자는, 죽어야만 했다.

* * *

“어, 이디스? 여긴 웬일이에요?”

내 물음에 이디스가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음… 근처에 일이 있었는데 잠깐 들렸어요. 탑주님이 가보라고 해서.”

“왜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는 탑주가 무슨 일이지.

연유가 궁금했지만 이디스도 답을 딱히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무튼 요즘 이상해요. 얼마 전엔 어디서 구르셨는지 만신창이가 되어 오셔서는 인생무상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질 않나, 모자에서 얼룩 빼는 법을 물어보질 않나. 왜 그러시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음, 말만 들어도 모르겠군.

아무래도 나이를 먹을 대로 먹다보니 새삼 초연해지는 모양이었다. 노인들 취향이야 워낙 알 수가 있나.

근데 마탑주씩이나 되는 양반이 세탁법을 궁금해 하다니…….

생소한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탁 같은 건 마법으로 하면 되지 않아요?”

어쭙잖은 마법사도 아니고 마탑주인데.

그러자 이디스가 다소 곤란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게 몸을 바짝 붙이곤 작게 소곤거렸다.

“그게… 저희 탑주님께서 공격계 쪽으로는 완벽을 넘어 미친 수준이시거든요? 하지만 신성계 쪽으로는 영 두각이 없으세요. 회복 마법을 잘 못 쓰시더라구요. 그래서 저희는 가끔 농담으로 정말 악마가 아닌가, 수군대기도 해요. 외모도 워낙 그쪽으로 생기셨고…….”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이리저리 살피던 이디스는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그나저나 선생님. 별 일 없으시죠? 누가 선생님을 미행하는 것 같다거나, 해치려고 한다거나…….”

“에이, 그런 일이 있으면 제가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겠어요?”

“그렇죠…? 하하, 제가 요즘 괜한 걱정이 많나 봐요. 탑주님도, 참.”

이디스가 멋쩍게 웃었다. 가지고 온 소지품을 확인하고서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아직 임무가 남아있다고 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잠깐 들린 거라서요. 임무 끝나면 다시 올게요. 그럼 나중에 봐요, 선생님.”

붉은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지고, 이디스가 사라졌다.

나는 흔들던 손을 거두었다.

“휴.”

그녀의 신형이 사라지자마자 바짝 졸였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디스에겐 거짓말을 해서 조금 미안하지만, 있었다. 별 일.

그것도 조금 큰.

어젯밤, 달도 삼킨 캄캄한 새벽.

창밖에서 쿵, 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세찬 빗소리에 긴가민가하며 창문을 여니, 한 남자가 온몸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다.

그대로 두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기에, 하는 수 없이 그를 낑낑대며 안으로 끌어당겼다.

나를 노리는 암살자면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아니면 살려줄 요량이었다. 굳이 남의 암살 막다가 내가 송장될 순 없었다.

찰싹! 나는 남자의 뺨을 두어 번 쳤다. 그는 열에 달뜬 숨만을 토해낼 뿐, 눈도 뜨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지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나는 이어서 조심스럽게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리곤 기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이게 사람 몸이야?’

남자는 어느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군데군데 살이 찢어져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뼈가 부러진 채로 무리해서 움직였는지 심하게 부어오른 부위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있는 흉터만 해도 수두룩했다.

나는 탁자 위에 펼쳐져 있던 책을 재빨리 뒤적거렸다. 운 좋게도 요즘의 나는 치유 마법에 꽂혀있었다.

아직 제대로 써 본적은 없지만 그냥 두고 보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나는 집중해서 마법 주문을 몇 번이고 읊었다.

중간에 뼈가 반대로 맞춰진다거나 봉합했던 상처가 다시 터지는 불상사가 조금 발생하긴 했으나-남자가 정신을 잃은 상태여서 참 다행이었다-, 결론적으론 꽤 성공적으로 치료를 마쳤다.

이것이 바로 오늘 새벽부터 아침까지의 이야기다.

‘에효, 내 팔자야.’

나는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볼세라 황급히 계단을 총총거리며 올라갔다.

달리아에게 들어오지 말라 단단히 일러두긴 했다만. 불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냥 남자도 아니고 암살자를 떡하니 모셔뒀는데. 들키는 날엔 끝장이었다.

나는 방문을 탁 닫고 문에 기대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아, 쫄려서 죽겠다…….”

내가 주륵 미끄러져 내리자 온몸에 붕대를 두른 남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물론 그냥은 아니고, 두꺼운 끈에 칭칭 감겨서.

내가 치료만큼이나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보네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시선을 내려 바닥을 응시하는 담갈색 눈은 그저 지친 기색이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갓 나온 찐빵처럼 따끈따끈했다.

‘감기라도 걸린 건가.’

외상은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어도, 내상은 무리였다.

이번엔 상처를 살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다행히 잘 아물었다. 급하게 배운 것이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음… 이러니까 꼭 마법 연습으로 이 남자를 이용한 느낌인데.

그는 내 손길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 드디어 말했다.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리곤 세모꼴로 눈을 치떴다.

“‘이 정도’가 팔다리가 부러지고 살갗이 너덜너덜 찢긴데다 열까지 펄펄 끓는 상태를 말하는 거라면, 당신은 제정신이 아닌 거예요.”

“제정신이 아니어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친절, 저는 바란 적도 구한 적도 없고요.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냥 두십쇼.”

“사람이 눈앞에서 다 죽어가는데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어요. 철천지원수라면 모를까.”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그는 체념하듯, 혹은 원망하듯 말했다.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듯이, 길바닥 위의 삶은 쓰레기보다도 못합니다. 이런 집에서 시중 받으며 곱게 자란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래, 몰라요. 몰라.”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짜고 있던 물수건을 팩 던졌다.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날 무지각한 철없는 아가씨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인데, 정말 의미 없는 짓이었다.

모르는 게 내 잘못도 아니고. 설령 모른다 해도 그것이 비난의 이유가 될 순 없었다.

더군다나 나 역시 필사적으로 살아온 존재의 무게를 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흔한 어린 날의 기억이, 보육원 원장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세탁기 속에 머리를 처박혔던 장면이다.

가장 첫 번째 기억은 나를 시장으로 데려간 부모님이 사고인 척 내 손을 슬그머니 놓은 것이고.

지금 내 앞에서 숨을 헐떡이는 남자만큼 처절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여태껏 겪은 시간들이 내게는 투쟁이자 생존의 길이었다.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것만 같아도 기어서라도 나아갔다.

그것이 내가 지나온 길이고, 시간이었다.

나는 구해주고도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인어공주가 아니었다.

“그래서 뭐요. 모르는 게 내 탓이에요? 당신이 어떻게 불우하게 살아왔고 지금도 얼마나 필사적인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이거 하나는 압니다.”

나는 그의 두 어깨를 붙잡고, 상체를 숙여 담갈색 눈을 마주했다.

“나 아니었으면 당신은 오늘, 내 방이 아니라 관에 처박혔을 거라는 거.”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내내 가라앉아 있던 남자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돌았다.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놀라는 것 같기도 했다.

“죽어도 다른 데 가서 죽어요. 내 앞에선 안 돼요. 나한테 계속 쓴소리 듣고 싶은 게 아니면, 살아요.”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서, 물수건을 다시 주워들어 남자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살 수 없을 것 같으면 그냥 버텨요. 버티는 게 아무리 볼썽사나워도 나는 기꺼이 환호해줄 거예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고, 당신이 지나온 길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는 이번에는 내 손길을 고분고분히 받아 들였다. 열이 상당히 끓고 있었다.

“감사인사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뭐가 목적인지나 말해요.”

“…….”

수월하게 열릴 것 같았던 입은 다시 다물렸다.

그 후로 한 시간이 넘게 흘렀지만, 그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가져올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묶인 두 손으로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저는…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다소 절박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사죄를 구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궜다.

“하지만 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부디 조심하십쇼.”

잡힌 손을 통해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친절에 약한 타입이라 이건가?

무릇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조금만 더 구슬리면 암흑가에 대해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목적지를 바꾸기로 했다.

열이 저리 펄펄 끓으니, 감기약이라도 사다주지 뭐.

“날 죽이려 한 이유는 갔다 와서 들을게요. 약국이 곧 문을 닫을 지도 몰라서.”

그는 나가는 날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 * *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나는 약방에서 해열에 좋다는 약초를 한 움큼 사들고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골목을 돌아 광장으로 나가면 마차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걸음을 서두르며 막 골목으로 접어든 순간, 그대로 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뭐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얇은 금테 안경. 재수 없게 빤질거리는 면상.

비스코프 그레이. 내 야심찬 첫 계획을 주옥으로 만들어준 주옥같은 놈.

다른 얼굴로 변장한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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