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늘 속에 갇혀 있던 얼굴에 희미하게 빛이 들었다.
‘……휴우.’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극한까지 조여들었던 맥이 탁 풀렸다.
검은 인영의 정체는, 슈트레커 자작이었다.
나는 부서져라 꽉 쥐고 있던 난간에서 손을 떼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직 안 주무셨네요, 아버지.”
시계바늘은 자정에 거의 가까워져 있었다.
이 시간까지 날 기다릴 정도로 하고픈 말이 있었나?
하지만 자작은 딱딱하다 못해 험악한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조금 전까지 루시퍼와 있었던, 시계탑에서였다.
나는 내가 뭐 사고 친 거라도 있는지 떠올렸다. 마석 거래는 철저하게 밖에서만 했으니 들키진 않았을 텐데.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느껴지는 자작의 눈길은 따갑기 그지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날 찬찬히 살피던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찍 다니거라.”
이 한 마디만 남기고서, 자작은 나를 지나쳐 가버렸다.
뭐야, 내가 신데렐라야? 12시 되면 들어오게.
나는 방에 들어와 곧장 침대로 몸을 날리고서 생각했다.
‘평소에 안 그러던 인간이 갑자기 왜 저러지? 무슨 일… 아.’
답은 쉽게 나왔다.
오늘 오후에 루시퍼와의 만남에서 관종력이 한 단계 올랐었다. 호칭도 바뀌었고.
그럼 그렇지. 자작이 괜히 그럴 리가.
관종력은 인기도와 비슷했다.
레벨이 오를수록 관심을 더 잘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채워야 하는 관심 수치도 증가했다.
‘당분간 또 피곤하게 생겼네.’
나중 일은 나중에.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벌써부터 걱정하긴 일렀다.
나는 급 피로가 밀려와 바로 곯아떨어졌다
* * *
검은 복면의 사내가 어둠 속에 몸을 은밀히 감췄다.
그의 손에는 온통 새까만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하얀 모자가 들려 있었다.
‘분명 시계탑 앞에서 멈춰선 것을 봤다. 갑자기 사라질 수는 없어.’
사내는 주인의 명으로 메이블린을 좇고 있었다. 의상실에서 나와 시계탑 근처를 서성일 때까지 놓치지 않고 잘 주시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잠깐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어디로 간 거지? 마법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야.”
생각하기가 무섭게, 루치펠이 사내 앞에 모습을 보였다.
놀라기도 전에 재빠르게 발을 물리는 사내를 보며 루치펠이 고개를 까딱였다.
“찾아줘서 고마운데, 그 모자. 주인이 있어서.”
사내는 숙련된 암살자였다. 암흑가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였다.
그런 자신이 인기척 하나 느끼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눈앞의 여유로운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있는 남자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면.
“너는 누구지? 마법사인가?”
에임에 텔레포트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는 없었다.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들은 죄다 이 작은 왕국을 떠나 마탑으로 이주하기 바빴다.
이곳에 남아봤자 마땅한 정보도 없어 스스로 실력을 키우기란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때문에 사내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마탑에서 온 마법사가 왜 에임에 있는 건지.
무엇 때문에 그 여자 주위를 맴돌고 있는 건지.
루치펠은 복면 속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을 것이 다 보인다는 듯 조소했다.
“궁금하지? 하지만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지는 마. 시간 낭비거든.”
“마법사가 대체 여긴 왜 온 거지?”
“시간 낭비라고 했잖아. 내가 대답할 것처럼 보여?”
루치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내는 살벌하게 번뜩이는 붉은 동공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사내는 물러날 수 없었다. 그의 주인은 사냥을 하지 못하는 개는 가차 없이 버렸으므로.
본래 사냥감인 여자를 놓쳤으니, 정보라도 얻어야 했다. 얻은 뒤엔 죽이고 다시 사냥감을 좇으면 그만이다.
“다시 한 번 묻지. 왜 메이블린 슈트레커의 곁을 맴도는 거지?”
“나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말할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모자나 내놓고 꺼져.”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순순히 나오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실토하게 하는 수밖에.
상대는 마법사였지만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틈은 있기 마련이고, 자신은 그 찰나의 틈을 파고들어 물어뜯는 법만을 배워온 사냥개였다.
게다가 만일을 대비한 마도구도 있었다. 두꺼운 수갑 형태의 이 팔찌를 채우면 상대는 마법을 쓸 수 없었다.
본디 마법을 이용한 범죄를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암흑가에서는 마법사를 생포하거나 고문해 회유할 때 쓰곤 했다.
이십 년 가까이 해온 일이 그런 것이었다. 사내는 두렵지 않았다.
달려들어 팔찌를 채우는데 성공하기 전까지는.
“대체…….”
사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손끝이 저릴 정도로 지금 느껴지는 이 기운은, 명백한 살기였다.
루치펠은 그를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며 한심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다들 이상한 편견이 있는 것 같은데, 마법사를 왜 약골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몰라?”
루치펠의 손목 부근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분명히 성공했다.
팔찌는 굳게 다물려졌고, 푸는 열쇠는 사내의 품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검은 머리의 남자는 암살자를 상대로 맞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퍼억!
거친 파열음이 연달아 울렸다.
사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엄청난 무게감의 주먹이 팔에, 다리에, 복부에 사정없이 직격하고 있었다.
반격하려 몸을 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신의 팔다리가 꺾일 동안 남자의 몸엔 칼자국 몇 번 내는 게 고작이었다.
암기가 꽂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이 축 늘어진 사내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졸부님은 뭐 이런 걸 달고 다닌대. 애가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 조심성이 없어, 그치?”
퍽!
루치펠의 단단한 주먹이 사내의 뺨을 후려쳤다.
“근데 그게 너 같은 떨거지가 따라다녀도 된다는 뜻은 아니거든.”
“쿨럭, 컥!”
사내는 피를 토해내면서도 착실하게 규정을 따랐다.
임무에 위협이 되는 자는 반드시 제거할 것.
맞설 수 없는 상대니 마법이라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는 품속의 열쇠를 부러뜨려 재빨리 삼켰다. 남자가 평생 마력을 억제당한 채 살도록.
필사적이고 절박한 행위였다. 그러나 루치펠은 우스운 연극이라도 본 것처럼 실소를 터뜨렸다.
“지금 뭐하는 거야? 장난감 좀 쥐어줬다고 내가 정말 애라도 될 줄 알았어?”
루치펠이 팔찌가 채워진 손에 힘을 주었다.
팔찌 사이로 검은 마력이 뱀처럼 흘러나오더니, 이내 쩌저적하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갔다.
그 틈에 사내는 있는 힘껏 루치펠의 무릎을 걷어찼다. 빠각, 하고 꽤나 큰 소리가 났지만 루치펠은 무릎을 꺾긴 커녕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네 장난에 맞춰 잠깐 놀아준 걸 착각하지 마. 조금 기분 나쁘거든.”
사내의 눈앞에서 팔찌는 산산조각 나 발치로 떨어졌다.
놀랄 틈도 없이, 사내는 헛숨을 들이 삼켰다.
휘이잉-
세찬 바람이 요동치고,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발아래론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오늘 여기서 무슨 행사를 했다지? 너를 부주의로 인해 추락사한 방문객으로 위장하는 건, 일도 아냐.”
사내가 꺽꺽대며 루치펠의 손을 긁었다.
“커헉, 큽…!”
그는 루치펠에게 멱살이 붙잡힌 채 시계탑 꼭대기 난간 밖으로 나와 있었다. 몸이 종이인형처럼 대롱거렸다.
루치펠의 한 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쭉 뻗은 팔이 느슨해졌다.
손에서 천천히 힘을 빼려던 순간.
루치펠은 또다시 요상했던, 일전에 겪어본 적 있는 기분이 불현듯 들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재미없어지고 한순간에 흥미를 잃는 느낌.
소중했던 것이 가치 없게 여겨지는 기분.
메이블린 슈트레커가 뭐라고 자신이 이렇게까지 흥분했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루치펠은 손을 놓았다.
난간 안에서.
기사회생으로 다시 땅을 밝게 된 사내가 졸린 목을 부여잡고 기침을 토해냈다.
“콜록, 콜록! 허억, 헉…….”
루치펠은 바닥을 기며 피가 뒤섞인 침을 흘리는 그의 머리통 위에 발을 얹었다.
사내는 끈질기게도 손목에 숨겨둔 단도를 빼들어 루치펠의 발목을 찍었다. 그러나 그는 끔찍스러울 만큼 요지부동이었다.
거친 목소리가 올가미처럼 사내를 옥죄었다.
“네 주인한테 가서 전해. 당분간 목 잘 닦고 다니라고. 난 깨끗한 게 좋거든.”
지긋한 압박감에 사내가 신음을 토해냈을 때는, 루치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악마 같은 놈이었습니다.”
인간의 것이 아닌듯한 그 눈과 범상치 않게 풍기던 기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는지 사내는 이를 짓씹었다.
“마력 제어 장치를 스스로 깬 것으로 보아, 마탑의 원로들과 거의 맞먹는 실력으로 보였습니다.”
그리 말하며 사내는 인간이 아닌듯한 또 다른 남자 앞에 고개를 숙였다.
좀 전에 자신이 만났던 남자가 악마라면, 제 주인은 고결한 천사로서 인외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하는 짓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컥!”
사내가 복부를 부여잡고 고꾸라졌다. 새하얀 대리석에 붉은 피가 폭죽이 터지듯 흩뿌려졌다.
베인은 까진 주먹을 쓸며 쓰러진 사내를 한 번 더 걷어찼다.
“클라인. 내가 너에게 명령한 일은 딱 하나야. 그 계집을 죽이는 것.”
클라인은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일어났다.
“면목 없습니다.”
“그런데 사냥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정체를 발각되기까지 해?”
서늘한 목소리가 공기를 얼어 붙일 듯 흘러 나왔다.
“네 몸뚱아리가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을 붙잡았어야지.”
열린 창으로 쏟아지는 달빛에 반사된 푸른 눈이 시리게도 빛났다.
이목구비만 보자면, 마치 지상에 현신한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베인은 뺨에 튄 피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클라인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어오른 발목이 비명을 질러댔으나, 주춤거릴 여유는 없었다.
사냥에 실패한 개를 보듬어 줄만큼 주인은 너그러운 성정이 아니었다.
달칵.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베인은 무신경한 눈으로 소매를 걷었다.
그의 심기가 뒤틀릴 때마다 으레 행해지곤 하는 일종의 절차였다.
“사냥개들의 목줄을 쥐어줬으면, 적어도 밥값은 했어야지. 그런데 감히 일을 그따위로 처리해!”
철썩! 두꺼운 채찍이 그의 등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