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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22)화 (22/185)

#22

서기가 커다란 종이에 옮겨 쓴 문제를 펼쳤다.

돌돌 말린 종이의 끝이 바닥에 닿자마자 좌중에서 한차례 술렁임이 일었다.

불가사리 어쩌구 한 것 같은데. 단상과 멀어서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다.

이고아트는 시종일관 비열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보자.’

메이블린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제시된 문제를 살폈다.

이제까지 거쳐 왔던 문제들과는 다르게 마지막 문제는 그 길이가 퍽 짧았다.

생각보다 꽤 까다로웠으나, 아예 못 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두어 번 손목을 돌렸다.

몇 시간 째 이어진 경연에 온몸이 뻐근했다.

그래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무거운 몸과는 달리 머리는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학회장놈의 빤질거리는 낯짝을 다시 마주한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지만.’

칠판 아래는 반토막난 분필의 잔해들로 지저분했다.

몇 번이고 지웠다 쓰길 반복해 부옇게 얼룩진 칠판처럼 그녀의 손도 분필가루로 새하얬다.

메이블린은 한 차례 심호흡을 내뱉으며 새로운 분필을 집었다. 손가락 마디 사이로 느껴지는 적당한 단단함이 기분 좋았다.

이제부터 이 작은 분필 하나로, 기고만장해 있는 노인네를 혼쭐내 줄 시간이었다.

‘그렇게 무시하던 계집애한테 눌렸는데, 어디 체면이 서서 돌아다닐 수나 있을까. 비열한 노인네, 엿이나 한번 거하게 잡숴보라지.’

따닥, 딱. 따닥.

분필이 거세게 칠판을 때렸다.

다소 거칠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글자가 커다란 칠판을 메워가기 시작했다.

작고 하얀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완벽하게 악보를 따라가는 연주가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는 손놀림이었다.

‘대체 뭘 쓰길래…….’

이고아트의 눈동자가 옆으로 슬쩍 굴러갔다.

대충 이런 저런 식이나 쓰고 얼렁뚱땅 경연을 마치려던 그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 말도 안 돼.’

글자는 거의 칠판의 반절을 덮어가는 중이었다.

그것도 자신처럼 엉터리 식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제대로 된 식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불가의 문제를 파헤치고 있었다.

메이블린이 식을 따라 조금씩 옆으로 이동할수록,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아찔한 현기증이 등줄기를 더듬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고아트는 더 이상 사고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분명 자신의 반절이나 될 법한 작은 몸집의 계집이었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엄중한 존재감이 그녀를 커다랗게 만들었다.

이고아트는 꼭 사나운 맹수에게 가차 없이 물어뜯기는 기분이 들었다.

분필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칠판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좌중은 침을 넘기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이윽고 명쾌한 딱, 소리와 함께 마침표가 찍혔다.

그 소리보다 더 명쾌한 숫자를 뒤로 하고서, 메이블린이 뒤를 돌았다.

“나왔네요, 답.”

이고아트는 목이 바짝 말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이런 일이…….”

비죽비죽한 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힘이 빠진 그의 손아귀에서 분필이 떨어졌다.

조금 전 메이블린이 마침표를 찍을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분필은 답을 내지 못하고 부러졌다는 것이었다.

“결과가 정해진 것 같군.”

칼리안이 느른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웠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곧은 목소리가 좌중에 울려 퍼졌다.

“경연의 승자는, 메이블린 슈트레커다.”

“와아아아!!”

“세상에, 슈트레커 영애가 이겼어!”

칼리안을 시작으로 박수소리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메이블린에게 쏟아지는 찬사였다.

그 때, 환호하는 함성을 뚫고 메시지음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관객이 당신에게 호응합니다!]

[새로운 스킬 ‘박수갈채’가 활성화됩니다.]

[박수갈채Lv.1: 무대가 있으면, 관객 또한 있는 법! 시선을 사로잡아 당신의 무대로 끌어들이세요.

효과: 30초 동안 타인의 동조 유도 / 쿨타임: 72시간]

일전에 베어맥스를 상대했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었다.

메이블린은 관중과 칼리안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서, 냉정하게 돌아섰다.

이제 남은 것은 상대가 결과에 승복하는 것뿐이었다.

“으으…….”

이고아트가 초라한 촛불처럼 버티고 서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메이블린이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다니엘과 미하일이 양 옆으로 붙었다.

다니엘은 길을 트고, 미하일은 메이블린의 손목을 주물러 굳은 근육을 풀어주었다.

“수고했다, 메이블린.”

“고생하셨어요 누님. 손 아프시죠.”

미하일은 메이블린이 경연 중간 중간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녀는 둘의 부축을 받으며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문이 탁 닫히고, 말이 발을 굴렀다.

사람들의 함성이 점점 멀어졌다. 빈틈없이 쏟아지던 시선에서 빠져나오자 막혔던 숨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하아…….”

이런 관심은 여태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모두가 자신만을 바라봤고, 자신에게 환호했다.

어떻게 계단을 내려왔는지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아직도 다리가 저릴 만큼 짜릿한 감각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다니엘과 미하일이 번갈아가며 축하 따위의 말을 했으나 머릿속에서 처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다만, 눈앞에서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만이 짜릿한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덮어씌웠다.

[관심수치: 100%

남은 시간: 7시간 16분 08초]

[관심수치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해당수치 달성으로, 시스템이 14일간 비활성화 됩니다.]

이번에도 성공이었다. 회귀하지도, 죽지도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몹시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이고아트가 대머리가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 * *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대~머리 아저씨는~ 털이 없더래~ 햇~빛을 비추면 반짝이지요~”

크으, 이 완벽한 개사 실력. 이고아트 영감한테 헌정해줘야 하는데.

비활성화 기간을 마석 채굴에 집중해서 보내고, 다시 접어든 관종 기간은 순조로웠다.

지난 경연의 여파로 내 이름이 조금은 알려진 덕분이었다.

세간에 떠돌던 내 이명도 달라졌다.

‘미치광이에서 천재로 말이지.’

그 동안의 모든 요상한 짓이 사실은 천재였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돌아다녔다.

본래 천재들은 이해할 수 없는 괴짜짓을 종종 한다면서.

관심수치를 채우기 위해 마이너스 되는 부정적인 시선보단 긍정적인 시선을 받아야 하는 나로서는, 제법 반가운 변화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런 시선도 필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떠한 관심도 받지 않길 원했다.

내 관심수치는 현재 거의 백퍼센트에 근접해 있었고, 나는 수치를 완전히 채우기 전에 죽고 싶었다.

‘그래야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고개를 들자 높이 솟은 아름다운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로 꼽히는 시계탑.

그 앞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큰 종이에 적힌 몇 개의 번호와 자신이 적은 번호를 비교하고 있었다.

시계탑은 훼손을 막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만 개방을 했다.

그 방식은 랜덤으로 숫자를 뽑게 하고, 추첨을 통해 소수의 사람들만 출입을 허가하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당첨된 사람 수가 많으면 여러 번 나눠서 출입하곤 했다.

때문에 다시 기회가 돌아오려면 두세 달씩 기다려야하기도 했다.

오늘은 바로 당첨 번호가 발표된 날이었고, 나는 시계탑을 꼭 구경하고 싶었다.

‘넋 놓고 있다가 또 이삼년 씩 돌아갈 순 없지.’

그래서 죽기로 결심했다.

당첨 번호가 몇 번인지 알았으니, 시스템이 시작되었던 저번 주로 돌아가서 그 번호로 응모하려고.

다시 죽어봤자 무수한 회귀에 그저 숫자 하나가 더해지는 것뿐이다.

어차피 내가 건드리지 않는 이상 내게 먼저 관심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관심수치: 97%

남은 시간: 1일 03시간 24분 58초]

내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반역을 일으키겠다고 소리라도 지르지 않고서야.

남은 3퍼센트가 쉽게 채워질 리도 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졸부님, 오랜만이야. 요즘 잘 지내나 보네?”

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루시퍼를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있던 그가 땅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지난번엔 졸부님이 나 구경시켜 줬으니까, 오늘은 내가 놀아 줄게.”

“아니, 굳이 그럴 필욘 없는데.”

“졸부님이야말로 굳이 사양할 필요 없어.”

제기랄.

관심 수치가 오르기 시작했다.

내게 상체를 숙이는 그를 향해 나는 속으로 내적 비명을 질렀다.

‘야, 얌마, 왜 이래. 오, 오지마! 저리가!’

뭐 때문인지 오늘따라 일반 충전기가 고속이 되어서 왔다.

“나 심심해.”

어쩌라고.

고작 그 이유로 원대한 내 계획에 훼방 놓으려 왔단 말이야?

질색하는 내 표정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골목 밖으로 날 이끌었다.

나는 난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어쩌지? 내가 지금 할 일이 좀 있어서.”

오늘 꼭 죽어야 하거든.

“오늘 말고 내일 오면 내가 실컷 구경해 줄게. 하루 종일 같이 다녀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다시 만나자, 응?”

루시퍼는 결국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악마의 대답이었다.

금방이라도 갈 것처럼 몸을 뒤로 물리던 그는 다시 몸을 훅 붙여왔다.

“나는 지금 같이 다니고 싶어.”

긴 눈꼬리에 매달린 속눈썹이 요염하기 짝이 없게 깜박였다.

흘러나오는 숨소리마저 달게 느껴졌다.

이 짯식이. 네놈 잘생긴 거 아주 잘 알겠으니까 얼굴 그만 써, 이놈아.

순간 숨이 멎을 만큼 엄청난 파급력을 자랑하는 자태긴 했으나, 내 헤모글로빈은 소중했으므로 코피를 흘릴 순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일갈했다.

“신입님아, 비켜. 나 진짜 가야돼.”

“같이 가면 되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그는 내 뒤를 졸졸 따라붙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뒤를 돌아 그를 쏘아보았다.

“안 돼. 혼자 가야돼.”

“그럼 갔다 와서는?”

관심 수치는 쭉쭉 올라가 1%도 채 남지 않았다.

“말 걸지 마.”

“말 거는 것도 안 돼?”

“지금은 안…….”

띠링, 하고 메시지창이 떴다.

[관심수치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이런 시부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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