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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21)화 (21/185)

#21

별로 비싸지도 않은 군것질거리를 메이블린은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음미했다.

그녀를 보며 루치펠이 넌지시 물었다.

“그게 맛있어?”

“왜, 루시는 별로?”

“그렇게 부르지 마.”

“신입님이 먼저 자초한 일인걸.”

메이블린이 눈꼬리를 샐샐 올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먼저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건 루치펠이었다. 조금 전 칼리안과의 대화에서 그는 메이블린을 메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그녀도 응당 그에 맞게 루시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메이블린은 샤베트를 퍼먹으며 깔깔댔다.

“이제 와서 왜 그래, 루시. 그러지 말고 이거나 한 입 먹어 봐.”

스푼 한가득 푹 퍼서 들이밀자 루치펠의 반듯한 눈썹이 찌푸려졌다.

“…지금 뭐하는 거야?”

“먹기 싫음 말고.”

먹기 싫단 사람에게 억지로 먹이는 악취미는 없었다. 메이블린은 빠르게 스푼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보다 루치펠이 그녀의 팔을 낚아채는 게 더 빨랐다. 스푼은 어느새 그의 입 안에 들어가 있었다.

눈 결정 같은 알갱이들이 사르르 녹았다.

루치펠은 제 안에서도 뭔가 비슷한 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속이 간질간질했다.

“어때, 맛있지?”

낭랑한 목소리가 때 아닌 상념을 일깨웠다.

해가 쨍쨍한 날씨 탓에 스푼은 다시 컵과 메이블린의 입을 분주하게 왕복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며 루치펠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달긴 다네.”

정확히 뭐가 단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그는 그저 그렇게 답했다.

메이블린이 것 보라며 한 스푼 더 떠 내밀었다. 루치펠은 이번엔 거절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먹었다.

역시 달았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음식들로 배를 채우고서 향한 곳은 광장 앞이었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메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시스템 창을 띄웠다. 습관적인 행위였다.

저 단상 위에 설 때면 몇 시간, 혹은 몇 분마다 한 번씩 관심수치를 꼭 확인하곤 했었으니.

[관심수치: 87%

남은 시간: 4일 9시간 28분 56초]

창을 확인하는 메이블린의 낯은 평온했다.

며칠 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한다면 넉넉한 수치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위해 딱히 뭔가를 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그때는 이곳이 아닌, 다른 단상에 서게 될 테니까.’

흙먼지가 구르는 단상을 보며 루치펠이 입을 뗐다.

“여긴 왜? 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몇 주 전만 해도 공연이 끊이질 않았었어. 지금은 아니지만.”

그 공연의 주체는 다름 아닌 그녀였다.

일전의 무수한 광대짓들이 메이블린의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반복되는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했던가.

잊고 싶으면서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장이 보이는 분수대 앞. 치안을 위해 줄곧 서있던 병사 둘이 교대하며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안 보이네.”

“뭐가?”

“아니, 광장에서 항상 요상한 공연을 하던 아가씨가 있었거든. 그땐 대체 왜 저러나 싶었는데, 막상 안 보이니까 생각나서.”

“아, 그 아가씨. 그러게. 안 나타난 지 꽤 되지 않았어?”

“그러니까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나야 알 리가 있나.”

병사들의 얼굴에서 아쉬운 기색이 묻어났다.

그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따금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뭐라고 자꾸만 떠오르지.”

“너도 그래? 나도.”

그들은 단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텅 빈 단상은 주인을 잃은 듯 쓸쓸해 보였다.

이제 메이블린은 마탑과 궁을 오가며 수치를 채워서, 더 이상 단상에 올라갈 일이 없었다.

그녀는 드디어 광대 생활을 청산한 것에 기뻐하며 주저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한 번 들러서 잠깐 추억팔이 한 정도면 충분했다. 별로 회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도 했고.

그러다 문득 루치펠도 자신의 뻘짓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신입님. 그러고 보니 그 때 어땠어? 두 번째로 나 마주쳤을 때.”

기억을 더듬는 루치펠의 눈이 가늘어졌다.

“졸부님이 물구나무도 섰던 튼튼한 팔을 덜렁이며 사기 쳤을 때?”

“오, 기억력 좋네.”

메이블린은 여전히 튼튼한 팔로 루치펠을 툭 쳤다.

그러자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를 뱉는 자판기처럼, 무미건조한 대답이 바로 뚝 떨어졌다.

“웃겼어.”

“…….”

“재밌었고.”

메이블린의 한 쪽 눈썹이 슬 올라갔다.

“…그게 다야?”

“그럼 뭐가 더 있어야 돼?”

“아니… 뭐, 궁금한 거 없어? 그게 평범한 행동은 아니었잖아.”

“물구나무? 입으로 이상한 소리 낸 거? 아니면 천연덕스럽게 사기 친 거?”

메이블린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관심을 받지 못했던 초기 특성상, 몇 초 보다 눈을 돌렸을 법도 한데 꽤나 오래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골목에서 멈춰선 그녀가 루치펠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방금 말한 거 전부 다.”

서로의 시선이 얽히고, 사이로 포근한 바람이 파고들었다.

루치펠의 목소리가 그 위로 스며들었다.

“졸부님이 이미 평범하지가 않은데, 굳이 그 이유를 파헤칠 필요가 있나.”

평소와 다름없는 낯, 담백하기 그지없는 어조.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이런 것에 거짓말을 해서 득볼 것도 없었다.

메이블린의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퍼져나갔다.

“그럼 됐어.”

크게 부풀린 분홍색 솜사탕처럼 달콤한 미소였다.

* * *

탁탁탁.

단정하게 묶은 머리칼이 긴 복도를 가로질렀다. 다니엘은 달리는 발걸음에 속도를 가했다.

원래대로라면 강의실에서 한창 분필을 끄적이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가르칠 학생이 없었으므로.

아카데미의 많은 학생들도 이미 그와 같은 이유로 자리를 비운 후였다.

바로, 학회에서 열린 경연 때문에.

웬만한 소란이 아니고서야 자리를 뜨지 않는 다니엘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다름 아닌 왕세자의 주도 하에 열린 경연이었다.

게다가 보통 경연과는 다르게 최후의 승자는 왕세자에게 원하는 바를 한 가지 요청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혜택이 주어졌다.

하지만 다니엘이 이토록 다급한 데에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

메이블린 슈트레커.

성인식도 치렀지만 제 눈에는 아직도 어리기만 한 동생.

그녀의 이름이 참가자 목록에 떡하니 올라있는 탓이었다.

다니엘은 학회의 정문 앞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그 역시 아카데미에서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조금 몰아쉬고 있었다.

“미하일. 메이는?”

“누님은 저기 계세요.”

미하일이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따라 다니엘의 시선도 이동했다.

사람들이 비둘기 떼 마냥 모여 있는 단상 한가운데.

고고한 동상처럼 메이블린이 서있었다.

‘맙소사.’

다니엘과 미하일은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제야 경연장의 정경이 제대로 보였다.

네다섯 계단 위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공간. 커다란 칠판과 탁자가 두 개씩 놓여있고, 그 중앙 끝 화려한 의자엔 칼리안이 심판처럼 앉아있었다.

경연은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되었다.

힘을 겨루어 승자가 올라가는 기사들의 대전처럼, 문제가 주어지고 이를 먼저 푸는 사람이 이기는 방식이었다.

한쪽에선 막 패배한 학자 하나가 침울한 표정으로 경연장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저 사람은…….’

다니엘도 얼굴을 아는, 학계에서 나름 저명한 학자였다.

둥, 둥, 둥. 다음 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경연은 한참 무르익어, 벌써 마지막 단계만을 앞두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장내를 휩쓸었다.

따분하기 그지없는 경연임에도 관전하는 인파는 상당했다. 평소와 달리 사람들이 이렇게나 몰린 덴 이유가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웬 영애 하나가, 파죽지세로 학회의 저명한 교수와 학자들을 제치고 올라가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영애는, 현재 오만한 미소를 만연히 걸친 채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도전하고픈 자는 누구든 덤벼보라는 듯이.

“메이블린! 지금 뭐하는 것이냐?”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메이블린이 고개를 돌렸다.

다니엘과 미하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경연장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미하일.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어요? 평범한 상금도 아니고 세자저하 발행 백지수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인데. 게다가 쓸 수 있는 건 숫자뿐만이 아닌걸요.”

메이블린이 들뜬 기색으로 얘기했지만, 그들의 낯빛은 쉽사리 밝아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자신만만한 미소를 걸치고서 단언했다.

“나는, 절대 지지 않아요.”

아무렴, 저런 고집불통 대머리 아저씨에게 질 수야 없지.

그녀의 반대편에는 학회장 이고아트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그는 짜증나는 혹처럼 툭 불거져 나온 메이블린이 영 거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연이 시작하기 전 그녀가 선언한 요구는, 바로 자신이 옷을 벗고 학회를 떠나는 것이었으므로.

새파랗게 어린 소녀가 자신의 제자들과 교수들을 쳐내고 올라온 것도 모자라 제 지위까지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었다.

‘이대로 당할 순 없어.’

비겁한 수를 써야만 한대도 좋았다.

어떻게든 그녀를 몰아내야만 했다.

이고아트는 두꺼운 서적을 빠르게 넘기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앞의 무수한 장과는 다르게, 오직 두 줄의 활자만이 새하얀 종이 위를 가로질렀다.

여태껏 모름지기 학자라면 누구나 도전했고, 도전한 모든 이가 실패했다.

이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느 누구도 풀지 못한.

불가(不可)의 문제였다.

지금까지 진행된 경황을 봐선, 어떤 문제를 내놓든 자신이 지고 말 것이란 걸 이고아트는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럴 바에야 아예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는 문제를 제시해 무승부로 끝내는 게 나아.’

그나마 체면도 차리고, 회장 자리도 지키고. 여러모로 잃을 것 없는 선택이었다.

그의 깊게 패인 눈가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메이블린은 빳빳하게 세운 이고아트의 목에서 시선을 돌려 칼리안을 향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준비되었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신호를 확인한 칼리안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선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그는 이 상황을 퍽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첨예하게 흐르는 긴장감 속에서, 이윽고 칼리안의 입이 열렸다.

“마지막 전을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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