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갑자기 웬 재미타령이람?
나는 정제된 마석 한 무더기를 쌓아두고서 옆의 또 다른 마석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루시퍼도 나를 따라 허공에서 움직였다.
“그런 건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만약 신입님이 사과를 몰랐다고 쳐보자. 사과를 먹고 알게 되었다고 해서 재밌게 느껴질까?”
여주도, 조연도, 악녀도 아닌 한낱 엑스트라를 알게 됐다고 없던 흥미가 생기겠냐고.
“그저 새로운 과일이구나, 하고 말걸. 새롭긴 하지만 결국 수많은 과일 중의 하나일 뿐이니까.”
“글쎄. 그건 누가 알게 되었느냐에 따라서도 다를 것 같은데.”
꼰 다리를 푼 루시퍼가 지상에 발을 붙였다.
“만약 어쩌다 먹은 그 사과가 맛있어서 계속 먹고 싶어졌다면? 오늘도, 내일도 먹고 싶어져서 사과나무를 심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음… 그것도 그렇네.”
마석을 정제하는데 온통 집중하느라 루시퍼의 말을 잘 듣지 못한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제 작업과 사과 한 알에 담긴 철학을 동시에 논할 만큼 내 머리는 좋지 않았다. 멀티태스킹이 잘 안 돼요, 안 돼.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성가신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쪽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왜 온 건데 신입님?”
“음… 사과가 먹고 싶어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
“여기서밖에 안 나는 사과라서.”
에임에 그런 것도 있었나?
코딱지만 한 왕국에 있을 건 그래도 제법 있는 모양이었다.
조만간 나도 그 사과 맛 좀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목 언저리로 큰 손이 불쑥 들어왔다.
“못 보던 거네. 뭐야?”
“아, 이거. 이디스가 엊그제 줬어.”
목걸이를 바라보는 루시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잠깐 봐도 돼?”
안 될 건 또 뭐 있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퍼는 마석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의 손아귀에서 다이아 모양의 마석이 깜박이며 빛을 발했다.
그러더니 색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루비처럼 붉은 색이던 빛깔은 어느새 푸른 사파이어가 되어 있었다.
“……뭐 한 거야?”
“별거 아냐. 그냥 약간의 업그레이드라고 생각해.”
내가 그렇게 마법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을 땐 거들떠도 안 보던 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담. 기브 앤 테이크를 가장 중하게 여기지 않았었나.
나중에 이것을 빌미로 요상한 요구를 들고 와 딴 말 하는 걸 멍청히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돌다리는 두드려가며 건너고, 호의는 속내를 까보며 받아야 했다.
나는 하던 작업도 관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짜로?”
갑작스레 고개를 든 탓에 입술이 맞붙을 듯 얼굴이 가까워졌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기다란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루시퍼는 이내 고개를 가볍게 까닥이며 목걸이에서 손을 뗐다.
그가 물러난 거리만큼 들어찬 공기가 어색했다.
많이는 아니고, 한 3초 정도.
“나도 뛰어난 선생님이 위험해지는 건 별로거든. 새로 구하려면 귀찮아지니까.”
야이씨. 말이라도 좋게 해주면 어디 똥구멍이라도 덧나냐.
나는 살짝 뾰족한 투로 대꾸했다.
“원래 천하무적으로 잘 굴러가던 마탑이잖아. 뭐가 걱정이야?”
“…사과를 이미 맛봤잖아. 그 맛을 알아버렸는데, 모르던 때로 돌아가기는 힘들지.”
아까 1절에서 끝난 줄 알았는데. 루시퍼의 사과 철학은 애국가 못지않게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럼 나중에 또 먹으러 올게.”
그는 내게 온 용건이 정말 그것뿐이었다는 듯,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서 사라졌다.
‘하여간…….’
정말이지 뜬금없는 인간이었다.
* * *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궁의 구석진 곳.
주위를 한차례 살핀 나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작게 소곤거렸다.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마석을 시중에 나온 값의 겨우 절반에 팔겠단 말인가?”
“그런 셈이죠.”
“그대가 무슨 수로?”
에임은 변변한 마법사도 없는 터라 언제나 주변국에서 정제를 마친 마석을 수입해 왔다.
여러 절차를 거치고 관세까지 붙으니 그 값은 유통과정이 전혀 없는 내 마석에 비해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커스텀 백작의 얼굴엔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
퇴근길, 신참 사무관에게 대뜸 붙들려선 듣는 소리가 마석 구매 권유라니.
나 같아도 안사요, 안 봐요, 안 믿어요 3종 세트로 쫓아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스텀 백작이 내 앞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세간에서 알아주는 마도구 수집가기 때문이지.’
백작은 다양한 마도구를 쓰는 만큼 상당량의 마석 또한 소비했다.
게다가 마석은 소모품이라, 내재되어 있는 마력이 다 떨어지면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주어야 했다.
마도구도 비싸지만 그것의 충전재 격인 마석 역시 만만치 않은 고가의 물품이었다.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이처럼 좋은 조건을 그냥 지나치기란 쉽지 않은 유혹일 것이었다.
그를 첫 번째 고객 삼아 일을 잘 처리한다면, 나머지는 내가 직접 발로 뛰지 않아도 저절로 진행될 일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소비자인 커스텀 백작이 알아서 소문을 내줄 테니까.
나는 두말하기 입 아파 품에서 작은 크기로 쪼갠 마석을 꺼내 보였다.
“제가 득볼 게 뭐가 있다고 백작님을 속이겠어요.”
마석을 본 백작의 눈이 반짝였다. 이 정도면 거의 다 넘어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뱀처럼 혀를 살살 굴렸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물건을 팔고, 백작님은 원하는 걸 얻는 거래 일 뿐이에요. 일종의 장사나 마찬가지죠.”
그러나 계속되는 내 설득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백작에게도 나에게도 손해 볼 것 없이 좋은 거래인데 왜 망설이는 거지?
그것은 백작도 마찬가지인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나 역시 기꺼이 응하고 싶다만… 문제가 한 가지 있네.”
“뭔가요?”
“에스카로트 공작가와의 신의를 저버릴 순 없네. 지난 몇 년을 거래해 왔어. 하루아침에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야.”
허허, 생각보다 의리 있는 아저씨였구만.
그렇다고 다 잡은 먹잇감을 놔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영업용 미소를 장착했다.
“아휴, 신의라뇨. 이건 그런 사사로운 감정이 낄 틈도 없는 장사일 뿐인걸요.”
의리, 좋지. 좋고말고.
근데, 의리가 밥 먹여주는 거 아니잖아?
“같은 물건에 다른 가격이면, 값이 덜 나가는 것을 고르는 게 당연한 이치죠. 지엄하신 공작가에서 사소한 거래를 두고 신의 운운하며 물고 늘어질 만큼 속이 좁지도 않을 거구요.”
줄줄이 이어지는 내 말을 차근차근 주워 담은 백작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마석은 언제부터 공급이 가능한가?”
앗싸. 솔직히 내가 다시 꼬셔주기만을 기다렸던 거 다 안다.
첫 번째 고객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특별히 최고의 서비스로 모시겠습니다!
머릿속으로 무수한 영업 멘트들이 떠올랐으나, 애써 지워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오늘 식사하시기 전까지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마석은 준비된 지 오래거든요.
팔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죠.
[관심수치: 3%
남은 시간: 13일 7시간 04분 33초]
새롭게 시작된 시스템과 함께, 졸부의 길도 막을 열었다.
* * *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영애.”
그럼요, 좋다마다요.
에스카로트에게 심심찮게 엿도 멕이고 돈도 벌었는데.
저를 죽이려고 달려든 놈에게 이 정도 복수면 보살 아닌가요?
‘아, 출근을 궁이 아니라 극락으로 했어야 하는 건데.’
검토를 마친 서류를 한데 모아두며 나는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굳혔다.
“근래 들어 호사가 끊이질 않네요. 다 저하의 보살핌과 노력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괜히 바른 소리 할 것 없네.”
칼리안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저 찬란한 미소.
오늘같이 켈른이 바쁜 날이면 잔업처리 및 왕세자께 올리는 업무 보고는 내 일과로 떨어지곤 했다.
이 일과는 내게 활력수와도 같았는데, 눈호강에 아주 제격이었다.
“괜히라니요, 저하. 지금도 백성들을 위해 힘쓰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하를 뵐 때마다 모두가 느낄 것입니다.”
저하의 고운 용모로 인한 정신 복지 하나면 4대 보험도 거뜬합죠.
황홀한 표정을 짓는 날 보며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가만 보면 영애는 일처리만큼이나 말솜씨도 대단한 것 같아.”
“저하께서도 언제나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빛나는 얼굴도요.
덕분에 아침마다 출근하는 맛이 납니다.
‘저하 덕에 기상 스트레스가 20퍼센트 가량 줄었어요. 그리고 저는 저하와 반드시 결혼하여 나머지 80퍼센트도 줄일 예정이랍니다.’
차마 뱉어내지 못한 속내가 목구멍에 턱 걸려 내려갔다.
내게는 아직 일러도 너무 이른 말이었다.
그도 그럴게,
“일이 다 마무리 되었으면 이만 가 봐도 좋네. 조심해서 들어가게, 메이벨.”
칼리안은 내 이름조차 빈번히 잊어버리곤 했다.
조금 속이 쓰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관종의 숙명이랄까.
이십 년 가까이 봐온 가족이 아닌 이상 단박에 날 기억해내는 건 무리였다.
마탑에서도 이름 대신 선생님으로 불렸다. 그러니 바쁘신 세자저하께서 관종의 이름쯤은 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나는 생긋 웃으며 부러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신 메이블린. 슈트레커. 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 * *
메이블린 슈트레커.
그다지 어려운 단어도 아니고, 발음이 심히 까다로운 것도 아니고, 무지막지하게 긴 단어도 아니다.
그럼에도 궁내의 많은 사람들은 내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곤 했다.
그나마 더듬거리면서라도 불러주는 사람은 직속 상사인 켈른이었다.
그는 다니엘과 오랜 친구로 보내온 시간 덕에 나를 조금이나마 친숙해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끊임없이 내 존재를 상기시켜 주는 것뿐이었다.
마침 호칭도 끈질긴 관종인 만큼, 제대로 끈덕지게 달라붙어 줄 작정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기억하실 때까지 계속 알짱거려야지 뭐.”
곁에서 줄곧 내 얘기를 들은 루시퍼가 눈살을 찌푸렸다.
“졸부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상사 밑에서 일해? 당장 때려쳐.”
“저하는 바쁘시잖아. 한 얼굴로 열 사람 분의 일을 하시는데, 좀 잊을 수도 있지.”
루시퍼는 내가 궁에서 일하는 걸 마뜩찮아 했다.
물론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나는 개의치 않았다.
동굴 벽에 몸을 기대고 앉자 루시퍼도 자연스럽게 옆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 몇 주간 동굴은 거의 아지트처럼 사용되었다.
그는 툭하면 이곳으로 찾아와 내 작업을 도와주거나, 이렇게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나누곤 했다.
루시퍼가 작은 조각으로 나눈 마석들을 마법으로 한곳에 쌓아두며 말했다.
“나는 안 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