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관종이라도 해피엔딩을 원합니다
#18
중앙홀로 내려온 윌리엄은 식탁에 산처럼 쌓인 케이크 상자들을 보고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이게 다… 웬 것이냐?”
“노아 오라버니가 오늘 새로운 취향에 눈을 떠서요.”
“메이블린.”
노아가 메이블린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나 윌리엄은 메이블린을 나무라는 대신 이해한다는 얼굴로 턱을 끄덕였다.
“괜찮은 취향이구나, 노아.”
“…….”
노아는 말을 덧붙이길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 시간 전 홧김에 케이크를 보이는 대로 쓸어온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메이블린이 가게 진열대 앞에서 고민하는 동안, 직원이 말이라도 몇 마디 나눠볼 요량으로 이것저것 권하는 게 아니꼬와서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취향이 좀 개조된다 한들 어쩌랴.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케이크를 입에 잔뜩 넣고 행복해하는 메이블린을 보며, 노아는 그깟 취향쯤 분홍 케이크를 하나 추가해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훈련이 끝나면 종종 들려야겠네.’
일 때문에 조금 늦은 다니엘까지 오고서 저녁식사는 시작되었다.
다니엘은 식사 내내 메이블린 쪽에 간간이 시선을 던졌다. 그는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을 표했으나, 딱히 입을 열지는 않았다.
메이블린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으면서.
정작 그녀는 케이크의 달콤함에 취해 오늘 일을 가족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까마득하게 잊은 상태였다.
* * *
[관심수치: 97%
남은 시간: 19시간 03분 12초]
내일 오후쯤이면, 16일간의 다사다난 했던 일정이 드디어 막을 내린다.
아직 3퍼센트를 마저 채워야 했지만 하루가 더 남았으니 문제없었다.
지금은 그저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과, 수치를 다 채우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똑똑.
때마침 정갈한 노크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메이블린, 자느냐?”
뜻밖의 목소리에 나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니엘이 이 시간에 웬일이람.
의아해하며 문을 열자 항상 보던 각 잡힌 정장이 아닌, 편한 차림의 다니엘이 서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
“…오라버니?”
“그…… 오늘 할 말이 있지 않느냐.”
다니엘은 한참이나 머뭇거린 끝에 작게 중얼거렸다.
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에, 더 알 수 없는 내용은 덤이었다.
그는 내가 뭐라도 말하길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마땅히 짚이는 데가 없었다.
별 수 없이 고해성사의 시작이었다.
“음… 정원에서 멋대로 꽃가지를 꺽은 건 죄송해요. 향이 너무 좋아서…….”
다니엘의 얼굴은 미동조차 없었다.
…오답이군.
“혹시 광장에서 소란을 피웠다고 저택에 연락이 온 게 있나요?”
“…….”
이것도 아니고.
“그럼, 오늘 제가 케이크를 너무 많이 샀나요? 다음부터는 조금만 살게요.”
“……하.”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다니엘이 마른세수를 했다.
“메이. 네가 케이크조각 따위가 아니라 설령 케이크 가게를 산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야.”
핀트가 조금 엇나간 것 같긴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우리 집에서 내가 뭘 하든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늘어뜨린 다니엘의 머리칼이 밤의 장막처럼 흔들렸다.
짤막한 일언과 함께 지긋한 시선이 박혀들었다.
“켈른에게 들었다.”
켈른이라면… 오늘 들은 이름인데?
어디 듣기만 했나. 직접 보고 인사까지 나누었다. 그야 곧 내 상사되실 분이니까.
그런데 그 이름이 다니엘의 입에서 이렇게 덥석 나오다니?
“오라버니가 우버왓츠 경을 어떻게 아세요?”
“켈른은 내 오랜 친우야. 어렸을 적엔 종종 저택에 놀러오기도 했었는데. 기억이 안 나나 보구나.”
“그… 워낙 어릴 적이다 보니까요…….”
어린 시절의 메이블린과 지금의 메이블린은 동명이인이라고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어쩐지, 초면인 사람이 왕세자와 자리를 뜨기 직전에 내게 오랜만이라고 말하더라니.’
워낙 스쳐가듯 들은 거라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켈른에게 들었다면…….
“왕궁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게 되었다며.”
역시.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네요, 하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인지, 단정한 눈썹이 슬 기울어졌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메이블린. 이건 별일이 아닌 게 아니야. 축하받을 일이지.”
축하. 물론 나도 좋아한다.
세상에 축하받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나는 문제가 풀 만했던 것과는 별개로, 답안을 외워 패스한 시험결과를 축하받으려니 양심이 찔려 조용히 있었던 것이다.
아까 식사시간에 흘리듯 말할까도 싶었지만 케이크에 정신이 팔려서 까먹었다.
이번에도 쉬이 말 못할 사정에 나는 눈만 데룩데룩 굴렸다.
늘 과묵하던 다니엘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대화가 길어졌다.
“받아라. 앞으로 종종 필요할 거다.”
다니엘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미처 꺼내기도 전에 그는 상자만 띡 주고 돌아서 가버렸다.
‘……뭐지?’
나는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침대에 엎드려 상자를 열어보았다.
테두리가 멋들어지게 장식된 회중시계가 나왔다.
어쩐지 오늘 평소보다 조금 늦게 들어오더라니. 이걸 사고 오느라 그랬던 건가.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선물을 받았던 적이 매우 드물어서,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준 사람이 다니엘이라 더 그런 것도 같았다.
* * *
“으음…….”
나는 눈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상쾌한 아침공기가 아닌 정오의 포근한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해가 중천이건만, 달리아는 나를 깨우러 오지 않았다.
근면성실의 아이콘인 우리 달리아가 그럴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게 다 뭐야?’
정말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른한 햇살 아래 뿌연 먼지만 부유하고 있어야 할 홀이 소란스러웠다.
미끄러지듯 계단을 내려간 나는 눈앞의 정경을 보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오늘 무슨 기념일인가?
식탁엔 온갖 진수성찬이 즐비했고, 눈이 닿는 곳마다 화려한 꽃다발로 도배되어있었다.
사용인들은 더 이상 자리가 없음에도 새로운 음식을 계속해서 나르는 중이었다.
엉거주춤 서있는 내게 자작이 다가왔다.
“왜 진즉 말하지 않았느냐.”
“……네?”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것 말이다.”
이세계라 딱히 와 닿지는 않았는데. 그 시험이 정말 대단하긴 했나보다.
무뚝뚝함의 의인화가 아닐까 내심 고민했던 자작이 무슨 가문의 영광처럼 여기는 것을 보면.
누가 가주 아니랄까 봐, 가문에 득이 되는 일을 하니 이제야 관심을 가져주는구나 싶었다.
“이쪽으로 오거라.”
어리둥절해하는 새 그에게 등이 떠밀려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탁자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평소 자작이 앉던 바로 그 자리에.
“축하한다, 메이블린.”
“축하드려요, 누님.”
“열심히 해 봐.”
여기저기서 축하의 언사가 쏟아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관심수치: 100%
남은 시간: 4시간 35분 22초]
[관심수치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다량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업적 최초 달성 보상이 정산중입니다….]
[보상으로 회귀 패널티가 감소됩니다!]
[기간의 랜덤 구간 조정이 가능해집니다.]
[해당수치 달성으로, 시스템이 16일간 비활성화 됩니다.]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알림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시야를 가득 메웠던 메시지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평소대로 상태창을 띄워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과거로의 회귀도 일어나지 않았다.
관심수치를 채우느라 하루하루 허덕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상이,
누구나 보내고 있는 그런 하루가.
내게도 주어진 것이다.
주어진 기간은 단 16일.
딱 내가 관심수치를 채웠던 날짜 만큼이었다.
시스템이 아예 사라지는 게 아니고 비활성화 된다고 했으니, 아마 16일이 지나면 시스템은 원상복구 될 것이다.
‘즉, 그동안은 자유의 몸이라는 뜻이지.’
나는 눈앞의 잔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나를 따라 들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나름의 축사를 내뱉었다.
“아름다운 오후예요-!”
챙, 하고 맑은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 * *
제법 작업장의 구색이 갖추어진 동굴 안.
루치펠이 군데군데 산처럼 쌓인 더미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밥 먹고 이것만 했어? 곧 파묻히겠다, 졸부님.”
메이블린은 개중에서도 그나마 좀 작은 더미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것도 곧 다른 것만큼 크게 만들기 위해서.
한곳에 틀어박혀서 해야 하는 일들은, 타인과의 접촉이 드문 특성 상 수치를 올리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관심수치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기간 동안은 이런 종류의 일들을 전부 해둘 요량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 그녀가 루치펠이 온 줄도 모르고 골몰해 있는 마석 정제 작업처럼.
보석을 팔기 위해선 캐낸 원석을 공예품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마석 또한 사용하려면 그 힘을 한 번 걸러내야 했다.
그녀는 며칠 째 이 작업 중이었다. 마탑 방문도 당분간은 미뤄둔 채.
저를 본 체도 않는 메이블린에 루치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졸부님, 이렇게 어두운 데 틀어박혀만 있으니까 눈이고 귀고 다 침침해지는 거 아냐.”
그가 손가락을 부딪치자 생겨난 작은 불꽃들이 내부를 밝혔다.
그 빛에 메이블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어, 신입님. 오랜만.”
곁에선 계속 알짱거려 받아낸 인사치곤 퍽 짤막했다.
루치펠은 좁힌 미간을 펴지 않은 채 허공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마탑 방문도 미뤄두고 한다는 일이 이거였어?”
“2주 안에 웬만한 양을 뽑아내려면 밤을 새도 모자라.”
“왜 2주 안에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있어.”
메이블린은 잠시 허리를 펴고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슥 쓸었다.
시스템이 사라진, 평범한 일상에 접어든지 오늘로 나흘째.
2주 내로 공급에 차질이 없을 만큼 정제해 두어야 다시 관종시스템 모드로 진입했을 때 수월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이 생산 기간이라면, 그때는 판매 기간이 될 테니까.
루치펠은 다행히 더 캐묻지 않고 그저 속모를 얼굴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비밀이 많구나, 졸부님.”
“다 알면 재미없잖아.”
메이블린을 담은 붉은 눈동자에 찰나 이채가 돌았다.
“알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