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6)화 (16/185)

#16

나는 침대에 누워 팔을 들었다.

손가락에 걸린 초커가 눈앞에서 달랑거렸다. 끝에 달린 엄지손톱 크기의 마석이 달빛을 받아 불그스름하게 빛났다.

숲에서 맞닥뜨린 베어맥스를 해치운 날. 헤어지기 전 이디스가 내게 준 것이었다.

-만약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지체하지 말고 깨주세요. 제가 바로 달려갈게요.

일종의 보디가드 찬스였다.

그것도 여주인공이 직접 등판하겠다는.

‘여주에게 이런 것도 받을 줄은 몰랐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주인공과의 친밀도와 엑스트라의 생존율은 비례하는 법이니까.

‘그럼 어디, 내 생존율은 얼마나 올랐나 볼까.’

나는 흥얼거리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관심 수치: 86%

남은 시간: 2일 19시간 45분 13초]

[스킬]

-시선의 이정표 Lv.1 (재발동까지 남은 시간: 40시간 09분 33초)

남은 시간은 사흘 남짓. 수치는 역대 최고치.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가, 이제 정말 머지않았다.

게다가 내일은 완벽한 첫 성공을 가져다 줄 계획이 있었다.

돈줄은 잡았으니 이제는 권력이었다.

지난 번 학회장과의 싸움으로 더욱 절실히 느꼈다. 얕보이지 않을 힘이 필요하다고.

‘돈만 있어선 무리야.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가져야 해.’

이 나라의 신분제에서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는 자는 왕이었다. 그 왕이 거주하는 곳은 왕궁이고.

나는, 궁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같은 업무, 같은 직급의 보직이라도 궁내의 사람이 되면 얘기가 달라졌다.

그 지위가 같은 직군임에도 불구하고 비교불가의 대상으로 높아졌다.

관종생활 6번째였나. 주어진 시간이 단 하루였던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2주의 시간이 주어져도 겨우겨우 채우는 수치를, 하루 만에 채우기란 불가능했다.

나는 재볼 것도 없이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에 집에서 조용히, 잠만 잤다.

하루가 끝나기 전에 그날 치러진 어떤 시험의 답안지만 구해다 달라고 부탁하고.

현대적인 사고가 녹아있는 내 답안을 받아들이질 않으니, 어느 정도가 납득할 수 있는 정도인지 알아야 했다.

관심 수치를 채우지 못한 나는 그날 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었고, 일주일 전으로 돌아갔다.

회귀를 한 후에도 하필이면 시간이 사흘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또다시 시스템에 질질 끌려가다시피 과거로 돌아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나는 내일, 왕궁의 행정 사무관직에 합격할 것이다.

그것도 수석으로.

빙의를 해서 펜을 들었으면, 어? 수석 정도는 해줘야 가오가 좀 살지 않겠어? 내가 목숨이 없지 가오가 없냐!

‘후후후… 기다려라, 학회장 영감. 머지않아 탈모방지 마법을 찾아 구천을 헤매게 해주마.’

내일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재촉했다.

벌써부터 반짝이는 대머리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 * *

“시험 종료 시각은 4시입니다.”

감독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쭉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험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남짓.

시험장엔 나를 포함에서 대여섯 명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나야 답을 이미 알고 있기에 진즉에 다 풀었지만, 저번처럼 괜히 튀는 행동으로 의심받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부러 끙끙대며 푸는 척했다.

이윽고 시험이 종료되고, 나는 개운한 기분으로 시험장을 나섰다.

결과 발표는 다음날이었으므로 오늘은 조금 늦장을 부려도 괜찮았다.

‘온 김에 궁이나 좀 구경해볼까…….’

고민하던 찰나 퍼뜩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나는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드넓은 궁을 줄기차게 걸어 도착한 곳은 제1기사단이 훈련 중인 연무장이었다.

한창 수련 중인 기사들을 방해하긴 좀 그래서, 나는 기둥 뒤에 숨어 안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찾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내 인사가 그다지 반갑진 않은지 인상을 슬 찌푸렸다. 짜슥, 튕기기는.

날 발견한 기사 몇몇이 그에게 누구냐 묻는 듯했으나, 매섭게 휘젓는 손길에 전부 떨어져 나갔다.

성큼성큼 걸어 나온 노아가 못마땅하다는 투로 물었다.

“여긴 갑자기 왜 왔어.”

“일이 좀 있어서.”

“궁에 네가 무슨 일?”

“그냥, 뭐. 이런 저런 일.”

내가 말을 대충 얼버무리자 노아의 말투가 더욱 퉁명스러워졌다.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야?”

“그런 건 아닌데, 나중에 확정되면 알려줄게.”

평소에 내가 옷걸이를 씹어 먹어도 그냥 지나쳤을 양반이 웬일이람. 관심을 다 보이고.

말하는 태도와 표정이 썩 달갑진 않았지만 그간 내게 말 자체를 걸지 않았던 날들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물론, 사람 쉽게 안 바뀐다고 오늘도 끝은 여전했다.

“더 할 말 없으면 먼저 가라.”

와, 만난 지 3분 만에 컷을 내네. 네가 오뚝이 3분 카레냐?

너무 어이가 없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때, 노아의 동료로 보이는 한 기사가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왔다.

“노아! 네 동생이야?”

오, 훈내가 솔솔 나는데.

나는 소개시켜 달라 부탁할 요량으로 노아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노아가 기어이 날 밀어내는 게 더 빨랐다.

“얼른 가.”

점잖은 태도가 디폴트값인 다니엘이나 미하일과 달리, 노아는 그야말로 현실남매 그 자체였다. 나이도 나와 한 살 터울밖에 안 났고.

다만 차이가 좀 있다면 나한테 관심 자체가 없어 덜 으르렁거린다는 것 정도?

미하일은 원래부터 내 혈육들 중 그나마 가장 친절했고. 다니엘은 무뚝뚝하긴 해도 퉁명스럽지는 않았는데, 노아는 매사에 불퉁하게 나오곤 했다.

지금도 벌써 앞이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노아는 내 인사를 듣지도 않고 뒤돌아 연무장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휘적휘적 걸어오던 동료기사를 잡아채 옆구리에 꽉 낀 채였다.

나는 유유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열심히 해-!”

유독 가운데 손가락만 파들거리는 건 기분 탓이겠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보는 눈이 많았기에 차마 엿을 꺼낼 순 없었다.

* * *

‘어이가 없네.’

나는 합격자 명단 앞에서 눈을 몇 번이고 비볐다.

차라리 내 눈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뚜렷했다.

그리고 참으로 거지같았다.

내 성적은 수석이 맞았다. 그야 만점이나 다름없는 점수였으니까.

하지만 발령받은 보직은 수석의 것이 아니었다.

원래 내 것이어야 했을 자리에는, 차석의 이름이 떡하니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차석의 자리를 맡게 되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심지어 사무관도 아닌 일반 사무직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기를 쓰고 행정 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는데 결과는 9급 공채에 겨우 턱걸이로 붙은 꼴이었다.

데자뷰를 느끼며 나는 곧장 담당자를 찾아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뒷목을 붙잡고 있었는데, 이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랫동안 공부를 해온 스타드 가의 영식도 이번에야 합격선을 겨우 넘겼습니다만, 영애가 만점이나 다름없는 점수를 받았다니요.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진즉에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테니까.

쇠꼬챙이처럼 생긴 남자가 꼬장꼬장하게 안경을 검지로 들어올렸다.

나 역시 지지 않고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폈다.

“스타든지 머스타든지가 머리 나쁜 건 제 탓이 아니죠. 이게 뭐 종교도 아니고, 왜 감독관님 마음대로 믿고 말고를 정하시는 겁니까?”

“지난 수년간의 결과가 말해주는 타당한 믿음입니다. 영애의 사례는 전무후무한 일이죠. 솔직히 말해서, 아예 부정행위로 제명시키려는 것을 남겨둔 겁니다. 그 정도로 만족하셨으면 좋겠군요.”

남자는 귀찮다는 듯 말을 내뱉으며 팔짱을 꼈다.

“불만이시라면, 지금 당장 그 자리를 내려놓고 돌아가셔도 말리진 않겠습니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랍니다.”

아오, 혈압.

이놈은 감독관이 아니라 의사를 했어야 했다.

수년간 들이부었던 철분제와 각종 약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없었던 저혈압이 지금 이 순간 단박에 사라졌다고 맹세한다.

분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여기서 더 밀어 붙였다간 그나마 얻은 자리마저 빼앗길지도 몰랐다.

“……실례했습니다.”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마지못해 끄덕이고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멀리서 한 남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햇살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백금발.

그를 보며, 나는 날도 좋은데 윷놀이나 한 판 벌여보기로 했다.

자고로 인생은 모 아니면 도였다.

“저하!! 세자 저하!”

쪽박을 차더라도 윷가락은 던져보고 차야하지 않겠는가.

우렁찬 성량으로 터져 나오는 내 고함에 감독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말려도 말을 듣지 않자, 그는 급기야 내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물론 나는 굴하지 않고 물 밖에 던져진 활어마냥 펄떡펄떡 뛰었다.

“으븝, 읍! 왕세자님!!”

그러나 바쁘신 몸답게, 그리고 존재감 없는 나답게. 왕세자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가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뒤집어진 패는 도였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될 건 없었다.

다시 던지면 된다.

될 때까지, 몇 번이고.

[스킬]

-시선의 이정표 Lv.1 (재발동까지 남은 시간: 12초)

아무리 극악의 확률이라도 0퍼센트가 아닌 이상 가능성은 있으니까.

왕세자는 이제 거의 시야에서 사라지려고 하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제발, 빨리, 빨리!

[재발동까지 남은 시간: 1초]

됐다. 나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세자 저하!!!”

[스킬 ‘시선의 이정표(Lv.1)’가 발동됩니다.]

[3초간 ‘칼리안 드웨인 로마노프’의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막 모퉁이를 돌려던 왕세자의 머리 위로 눈 모양의 아이콘이 깜박이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새롭게 흐르는 시간, 3초.

1초.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2초.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다.

3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스킬이 해제됩니다!]

[스킬]

-시선의 이정표 Lv.1 (재발동까지 남은 시간: 72시간)

왕세자를 붙드는 것까진 성공했다. 지금부턴 운에 맡길 수밖에.

“저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당한 결과를 시정해 주시길 간청합니다!”

제발, 제발. 이쪽으로 와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에게 빌었다.

양심이 강녕하시다면 부디 날 도와!

“당장 영애를 끌어내게!”

날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감독관의 명령에 기사들이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양 팔을 붙잡히고 질질 끌려 나가는 볼썽사나운 꼴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볍게 손을 드는 것만으로 나를 둘러싼 모든 이들을 멈추게 만든 사람이, 내 앞에 서있었다.

“무슨 일인가?”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비꽃을 닮은 연보라빛 눈동자는 감독관도, 기사들도 아닌.

나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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