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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4)화 (14/185)

#14

나는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오늘로 마탑을 드나든 지 어느덧 일주일 째.

내 앞에는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한창 필기중인 사람들로 가득이었다.

그들이 이토록 열중해서 적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내 필기였다.

칠판에 더 이상 쓸 공간이 없어 지우개를 들자, 근육질의 우람한 한 사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잠시만요, 선생님! 아직 다 못 적었습니다!”

민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이 불끈거렸다. 머스클의 손에 쥐어진 펜은 금방이라도 꺾일 강아지풀처럼 보였다.

나는 강의노트를 덮고 분필을 내려놓았다. 머스클은 성실한 학생이었기에 싱긋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천히 적으세요.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여기저기서 수고하셨습니다, 따위의 말소리가 쏟아졌다. 괜스레 낯간지러워지는 시간이었다.

언젠가 다니엘을 따라서 아카데미에서 교수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종종 했었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마탑에서 교단 위에 서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뿌듯한 기분으로 시스템 창을 켰다.

[관심수치: 71%

남은시간: 4일 01시간 58분 24초]

관심 수치는 열렬한 학생들 덕에 파죽지세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 기세라면 조만간 성공할 날도 머지않았다.

나는 내 전속 대리기사인 신입님을 기다릴 겸, 마탑도 구경할 겸 4층을 기웃거렸다.

4층에선 스크롤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구석 의자를 빼서 슬그머니 앉자, 맞은편에 있던 벤이 아는 체를 했다.

“아, 선생님. 수업이 일찍 끝나셨나 봐요.”

“공격 마법은 술식이 길어서 쓸 게 좀 많더라구요. 다들 열심히 필기 중이에요.”

“으아, 공격 마법. 좀 까다롭긴 하죠. 그래도 선생님이라면, 뭐.”

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코를 찡긋거렸다.

스크롤에 마법을 새겨 넣던 다른 마법사들도 하나 둘 다가와 한 마디씩 보탰다.

“선생님 덕분에 스크롤 제작시간이 배로 줄어들었어요.”

“여태 제가 바본 줄 알았는데, 선생님 덕에 일반인 수준이 됐어요.”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

인강 일타 강사 홈페이지도 아니고. 다들 댓글 알바 전적이라도 있나?

인터넷 배너에 뜰 것만 같은 저 멘트력은 무엇인지. 꼭 머리위로 별점칸이 뜨는 것 같잖아.

기분이 좋긴 했지만 칭찬에 별다른 면역이 없는 내겐 과했다.

관종이지만 이런 관심은 소화가 잘 안 돼요.

칭찬 릴레이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문득 떠오른 의문점을 물었다.

“그런데, 탑주님은 안 계시나요? 일주일동안 한 번도 뵌 적이 없네요.”

말 그대로 마탑에 일주일간 거의 매일같이 들렸건만. 마탑주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탑의 총관리자나 마찬가지니 새로 들어온 나를 한 번쯤은 부를 줄 알았다.

하지만 호출은커녕 지나가다 마주친 적도 없었다.

내 물음에 벤이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맨 위층에 계시는데 웬만한 일 아니면 잘 안 내려오세요. 워낙에 바쁘시기도 하고, 저희한테 관심도 별로 없으셔서.”

안 그래도 비밀의 탑 마냥 왕국들과 떨어져 홀로 솟아 있는 마탑이었다. 좀처럼 소식이 닿는 일이 드물었다.

한데 마탑주는 한 술 더 떠 마탑 내에서도 두문불출인 모양이었다.

5년 전 마지막으로 나온 소문에 의하면, 나이도 들고 기력이 많이 쇠하여 자리를 물려줄 다음 마탑주를 모색 중에 있다고 했었다.

나는 당연히 여주가 되지 않을까 가정해 보았는데, 탑주 할아버지께서 아직은 정정하신 듯했다.

“선생님. 저 질문하고 싶은 문제가 있어요.”

여주가 이렇게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이디스의 생생한 적발이 눈앞에서 말꼬리처럼 흔들렸다. 이디스도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하나였다.

마탑주 다음 가는 실력자였지만 그건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이디스는 나처럼 아직 신입 마법사에 불과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의 상태랄까.

나는 기꺼이 옆자리 의자를 빼고 이디스를 향해 손짓했다.

“헤헤.”

이디스가 붉은 눈을 빛내며 쪼르르 달려와 앉았다. 미인과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대환영이었다.

그녀가 가져온 문제를 막 내밀려던 때, 누군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고개를 들자 하늘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수업이 일찍 끝났나 보네. 구경하고 있었어?”

어딘가 항상 헐렁하던 일전과 다르게 단정한 옷차림의 신입님이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새하얀 로브가 길게 늘어져 발치에서 펄럭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도 멋있던 그가 오늘따라 더 빛이 나긴 했지만 이것 때문은 아니고.

그가 들어옴과 동시에 방 안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탓이었다.

공기가 한껏 조여든 느낌이랄까.

나는 방금 전까지 세상 살갑던 벤이 어색하게 구는 것까지 보고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신입님…. 왕따 아니지?”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아니, 그냥. 뭔가 다들 데면데면한 거 같아서.”

“그래 보여?”

“응.”

신입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퍼억. 그와 동시에 밑에서 뭔가를 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책상 밑이라 볼 순 없었지만 잉크병이라도 떨어진 모양이었다.

“윽.”

하필 발을 맞았는지 벤이 얕은 신음을 토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으, 아프겠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까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벤의 아픔에 공감해 주는 건가. 이런 감성적인 사람들….

신입님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벤을 붙들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덴. 없어요?”

…신입님의 본체가 사실 AI였나. 로봇이 신입님인지 신입님이 로봇인지 헷갈릴 정도로 딱딱한 톤이었다.

“으, 으응. 뭐, 뭘 이정도 가지고.”

말과는 달리 많이 아팠는지 신입님의 어깨를 짚는 벤의 손이 달달 떨렸다.

흡. 헉. 후읍.

곳곳에선 숨을 한계까지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다들 왜 저러지? 갑자기 웬 복식호흡 연습이람.

어리둥절해하는 내 시야로 신입님이 끼어들었다.

“봤지, 졸부님? 우리 다들 친해.”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마법사들도 하나 둘 다가왔다.

“그, 그럼요. 제가 이, 이 녀석이랑 같은 밥 머, 먹은 지가 몇 년인데요.”

“이젠 아주 한 식구죠, 식구.”

“우리 루치… 억.”

훈훈한 간증을 끊고 또다시 퍽 소리가 났다. 아니, 이놈의 잉크병은 왜 자꾸 떨어지는 거람.

말꼬리가 잘렸던 마법사는 고통에 절절매며 말을 이었다.

“루, 루시… 퍼가 실력은 또 얼마나 뛰어난지. 천재예요, 천재. 매번 놀란다니까요. 하하.”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고개를 돌렸다.

흐뭇한 얼굴로 사색이 된 마법사들을 응시하고 있는 신입님의 모습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이름이 루시퍼였구나.’

마치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 온, 요염한 악마의 외양과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는 아무리 성녀라도 그와 눈을 마주치면, 기꺼이 타락하고 싶게끔 하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벤은 여전히 덜덜거리는 손으로 루시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유, 녀석. 서, 선배라고 쫄 거 없다는데도.”

벤의 볼을 타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쫄고있는 사람이… 님 같아 보이는 건 제 착각이겠죠.’

왜인지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태평양을 가득 채울 만큼 솟구쳤다.

우리의 슈퍼루키 루시퍼가 알고 보니 초 슈퍼울트라루키였던 모양이다.

모두가 이유모를 긴장감에 숨죽이고 있던 때, 머스클이 문을 벌컥 열고 들이닥쳤다.

그는 그 몸집만큼이나 우렁찬 목소리로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중이었다.

“탑주님! 탑주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머스클은 내 쪽을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탑…!”

찰싹!

벤이 느닷없이 머스클의 울끈불끈한 팔뚝을 찰지게도 때렸다. 크게 벌어진 그의 입이 합 다물렸다.

“앗… 아…….”

헐레벌떡 루시퍼를 향해 달려오던 머스클은 날 발견하고는 눈에 띄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의 튼실한 이두박근도 같이 떨렸다.

“탑…… 탑주님 보신 분…? 여긴 안 계시네요 하하. 급한 일인데요…….”

새파래진 안색으로 머스클이 뒷목을 긁적였다.

곁에서 짧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루시퍼는 머스클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로채 죽 훑어보더니, 이내 날 보며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나도 탑주님을 찾으러 가봐야겠네. 한두 시간만 더 기다릴래? 아니면 벤… 선배랑 같이 가도 되고.”

비에 젖은 다람쥐 같은 벤의 시선이 애처롭게 달라붙었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는 듯 두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여기서 에임까지 텔레포트하면 그날 하루는 시체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던데. 마냥 농담으로 넘길 수만은 없는 사실이었나 보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답했다.

“아냐, 기다릴게. 일 보고 와. 여기 구경하는 거 재밌어.”

“그래 그럼.”

루시퍼가 나가고 다른 마법사들도 각자 일로 돌아갔다.

나는 잠자코 있었던 이디스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루시퍼가 잘 지내나 보네요. 다들 재밌어 보여요.”

“재밌… 하하. 네… 그렇죠…….”

이디스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대신 그녀는 한아름 품에 안고 온 종이뭉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아차. 물어볼 게 있다고 했었죠.”

나는 다시 선생님 모드로 돌아갔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이디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제가 이번에 처음으로 꽤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됐는데요…. 마지막에 실수를 조금 해버려서요…….”

“뭔데요?”

돌돌 말린 종이가 책상 위를 도르륵 굴러갔다. 이디스의 필기체로 적힌 텔레포트 술식과 대륙 지도였다.

이디스는 빼곡하게 술식이 적힌 종이를 먼저 내밀었다.

“좌표 계산을 잘못 했는지 화물 하나가 엉뚱한 곳에 떨어진 것 같아요. 이게 제가 계산한 술식인데, 어디쯤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난처한 기색으로 내게 싹싹 빌었다.

“이거 잘못되면 저 마탑에서 정말 쫓겨날지도 몰라요. 대륙을 다 뒤져서라도 해결해야 돼요. 제발 도와주세요, 선생님.”

“알겠어요. 일단 진정하고, 펜 있으면 줄래요? 한 번 계산해 봐야 해서.”

나는 곧바로 이디스의 계산식이 빼곡히 적힌 종이를 앞으로 끌어왔다.

허둥지둥 펜을 내게 내밀며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감사해요, 선생님!”

으윽, 눈부셔.

여주가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별도 달도 다 따다 줄 것처럼 구는 남주들의 심정이 새삼 이해가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비장한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

이디스가 쓴 식을 따라 지도의 좌표와 비교해가며 문장을 써내려가기를 십여 분.

나는 지도에서 초록색으로 크게 칠해진 구역에 동그라미를 쳤다.

“한 이 정도쯤에 떨어져 있겠네요. 정확한 건 가봐야 알겠지만.”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그럼 저는 얼른 갔다 올게요.”

고개를 꾸벅 숙인 이디스는 서둘러 짐을 챙기고 일어섰다.

나도 그녀를 따라 같이 일어섰다. 그리고 막 돌아서려는 그녀의 어깨를 급히 붙들었다.

“같이 가요.”

오늘 수업은 아까 끝났다.

즉 관심을 더 얻을 기회도 오늘은 끝.

[관심수치: 73%

남은시간: 4일 01시간 08분 52초]

이 귀한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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