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벤은 눈썹만 꾸물거리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가끔… 있었죠?”
“거기에도 이유가 있었고?”
“이유 없이 그냥 그렇게 되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죠.”
루치펠은 지난 며칠 간 은근히 불편했던 가슴 한 켠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는 한 번 관심을 가진 것은 모든 걸 파악할 때까지 사정없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이었다.
그런 자신이 의문점 투성이인 것을, 갑자기 흥미가 팍 식어서 내버려두고 돌아왔다.
그 이유를 모르는 게 지금 불편한 이유였다.
‘한 번 더 보면 알 수 있겠지. 단순히 정말로 재미가 없는 건지, 아니면… 내 취향이 조금 바뀐 건지.’
루치펠은 싱긋 웃으며 어리둥절하게 서있는 벤의 어깨를 토닥였다.
“덕분에 궁금증이 좀 해소됐네. 답례로 특별히 이쪽 말고 계단으로 내려가게 해줄게.”
루치펠이 중간에 가리킨 ‘이쪽’은 아찔한 난간 밖이었다. 사색이 된 벤을 마주한 루치펠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탑주면 다니까. 그렇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신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곤 실연의 상처를 잔뜩 후벼 파인 벤의 너덜너덜한 가슴과, 까마득하게 펼쳐진 계단뿐이었다.
* * *
‘신입님이고 마법사고 나발이고.’
어쨌거나 내 레이더망에 걸린 이상, 월척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팔다리를 부여잡고 세상 처절하게 낑낑댔다.
“팔도, 발목도 다 너무 아프다! 부러졌는지 힘줄이 끊어졌는지 어쨌든! 너무너무 아프다!”
눈물을 억지로 짜내고 있으려니 신입이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팔짱을 꼈다.
“호들갑 떨지 마. 아까 물구나무서던 거 다 봤어.”
그 때 사람들이 없는데도 미미하게나마 수치가 올랐던데, 이 자식 덕분이었나. 근데 어디서 본 거지?
아무튼, 날 조금이라도 지켜봤다면 더더욱 가망이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연기에 다시 몰입했다.
“허윽, 허으윽, 헉… 다시 끔찍했던 나날들로 돌아가는 건가… 돈도 희망도 미래도 가족도 없는 가엾은 내 인생… 누구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흐으윽…!”
케이크 하나로 사회 무너뜨리는 법, 참 쉽죠?
계속해서 흐느끼자 머리 위에서 귀찮다는 듯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결국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그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앗싸. 걸려들었구만.
“그래 알았다고. 뭘 원해. 어떻게 해주면 돼?”
“적어도 신입님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클걸.”
“그래? 어디 말이나 해 봐.”
내 키가 작다고 바라는 것까지 소박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어리석은 중생아.
나는 악마에게 소원을 빌듯이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으로 만들어 줘.”
초면인 관계라도 그 용모가 빼어나면 한번쯤은 다들 돌아보게 된다.
게다가 사교계에서 권력구도나 재산, 기타 배경들을 전부 제치고서라도 가장 먼저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바로 외양이었다.
이 세계에서 관심받기에 보기 좋은 외모보다 훌륭한 것은 없었다.
조금 전 지나간 왕세자도 그랬고,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얼굴만은 천사인 베인의 경우도 그랬다.
지금 이놈조차도 왕세자를 감상하고 해산하는 아가씨들이 은근히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중이었다.
왕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에스카로트 영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았던가.
왕국제일미가 이 정도면 세계제일미는 말 다한 셈이다. 아마 타국에서도 나를 보겠다며 줄을 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후, 기다려라, 세계제일미!
벌써부터 단꿈에 부풀어 있는 날 일깨운 건 신입이었다.
“좀 현실적인 걸로 말해.”
그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새끼가.
사실 말하면서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플랜 투였다.
“그럼 왕세자비가 되게 해줘.”
운명의 상대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되지 못하면 계속 과거로 돌아가, 갓난아기를 넘어 소멸당할 판이었다.
‘어차피 할 결혼, 조금 일찍 할 수도 있지 뭐.’
여기서는 결혼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가문과 가문끼리의 결합에 배우자가 마음에 들면 운이 좋은 거고.
단호한 내 선언에 신입의 단정한 눈썹이 살짝 기울어졌다.
“그러니까 졸부님 네 말은 지금, 왕세자와 결혼시켜 달라는 거지?
“응.”
나는 방금 말했는데 뭘 또 물어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날 보며 신입은 아무 말 없이 눈꼬리만 살살 접었다.
“얼굴은 어떤 스타일을 원해? 청순? 귀여운? 섹시한? 내가 얼굴 바꾸는 마법은 써 본 적 없는데, 졸부님을 위해 특별히 해볼게.”
“야이씨…….”
왕세자비가 되는 게 더 비현실적이라는 거야 뭐야.
아직 신입이라 쓸 수 있는 마법이 많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마법사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마지막 플랜이자 사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앞의 요구들은 이 플랜을 상대적으로 쉬워보이게 하려는 일종의 전략적 미끼랄까.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가르쳐줘, 마법.”
지난 5일 간 인부를 구해서 마석 채굴 작업에 착수한 결과 내린 결론이었다.
단단한 암석은 단기간에 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찌나 깊숙이 매장되어 있는지 아직 단 하나의 마석도 캐내지 못했다.
나는 힘은커녕 존재감도 없는 사람이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날 우습게 본 인부들이 혹 마석을 훔쳐 달아날까 동굴의 진상을 숨기고 있었다.
그 탓에 자신이 뭘 캐는지도 모르고 돌덩이만 죽어라 깨고 있는 인부들도 지쳐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법이라면 이 모든 작업이 필요 없어졌다.
그때 분명 그는 한 손가락만으로 마석을 끌어올렸으니까.
“딱 하나면 돼. 그날 네가 보여줬던 마법. 그것만 알려줘. 더는 요구 안 해.”
여전히 앉은 자세로 날 올려다보던 그가 일어났다. 그의 붉은 눈이 묘한 빛을 띠었다.
다음 순간 손가락을 딱, 튕기는 명쾌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뒤집어졌다.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도 났다.
번쩍이던 시야가 맑아지자 보이는 건, 푸른 불꽃을 들고 서있는 신입이었다.
동굴 벽면에 불꽃을 따라 진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끌어와 그 위에 불꽃을 올려주었다.
“이게 내 마력이라고 보면 돼. 느낌이 어때?”
나는 얼떨결에 불꽃을 받아들었다.
“음… 생각보다 부드럽네.”
예상 외로 불꽃은 뜨겁기는커녕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운 거품을 쓰다듬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어서 내 다른 쪽 손을 들어 마석 위에 얹었다.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고서 그는 마석에 담긴 마력을 끌어올렸다. 손바닥 밑이 우웅 울렸다.
“마석은 마력과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어. 어떤 거 같아?”
“네 것보다는 거친 느낌이야. 좀 더 불안정하고, 균형 잡히지 않은 듯한 느낌?”
“아직 정제되지 않아서 그래. 체로 거르듯이 섞여있는 불순물을 걸러내면 우리가 쓰는 힘이랑 같아져.”
알아듣기 쉬운 친절한 설명에 나는 고개만 마냥 끄덕였다.
그는 평평한 곳을 찾아 발로 잔돌맹이들을 쳐낸 뒤 털썩 앉았다. 그리곤 나도 앉으라는 듯 옆을 탁탁 두드렸다.
일제히 늘어난 푸른 불꽃이 컴컴한 내부를 밝혔다.
신입은 나무막대기를 쥐고 바닥에 뭔가를 쓱쓱 쓰기 시작했다.
그의 마력이 담겨 빛나는 글자가 바닥을 차례차례 메워갔다.
“보통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주문만 외우면 저절로 마법이 완성되는 줄 아는데.”
“아니야?”
“응. 아니야.”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그는 써내려가던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금 쓴 이 모든 술식이 단 하나의 시동어에 들어가 있는 거야. 시동어만으로 마법을 쓰는 건 이 술식을 굳이 쓰지 않아도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쳤을 때야 가능해.”
“하지만 신입님은 시동어도 말하지 않았잖아.”
“그런 건, 술식을 시동어에 집어넣는 작업까지 머릿속으로 마친 경우고.”
지금 자기 똑똑하다는 거 돌려서 말하는 건가. 앞으로 꼬박꼬박 신입님이라고 불러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신입님이 적은 술식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길긴 해도 아예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었다.
중간중간 나오는 단어들이 생소해서 그렇지, 그런 부분들만 제하고 보면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했다.
지금 같은 경우엔 마석의 중량을 미지수로 놓고 푸는 문제랄까.
몇몇 줄은 그 과정을 좀 더 간단하게 줄이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나는 그가 적은 것을 따라 옆에 똑같이 끄적이기 시작했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다르게 계산할 수 있는 부분은 다르게 답을 냈다. 덕분에 총 술식의 길이는 대폭 줄어들었다.
그리고 시동어로 쓸 직관적인 단어를 하나 골랐다. 업다운 할 때 업(UP). 괜히 멋들어지는 걸로 지었다간 다음에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마지막으로 고른 단어에 쓴 모든 문장과 식을 집어넣고서, 최종 주문을 완성했다.
나는 조용히 시동어를 읊조렸다.
“업.”
일전에 느꼈던 지진이 발끝을 타고 다시금 올라왔다. 왠지 모르게 가슴도 벅차올랐다.
눈앞에는 어느새 주홍빛을 내뿜는 광물이 암반을 뚫고 솟아있었다.
나는 기뻐서 신입을 붙잡고 흔들었다.
“봤어, 봤어?”
그러나 그의 시선은 방금 끌어올린 마석이 아닌 내가 쓴 술식에 머물러있었다.
평소 장난스럽던 두 눈은 한없이 진지한 빛이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곧이어 그의 입가에 여태껏 보지 못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졸부님. 애들 가르쳐 볼 생각 없어?”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내가 미간을 좁히자 그는 덧붙여 설명했다.
“아. 그러니까, 내 친구들. 애들이 마력도 열정도 가득한데 계산을 잘 못해. 졸부님이 조금 도와줬으면 좋겠어.”
“네가 알려주면 되잖아.”
“내가 뭐 가르치는 건 잘 못해서.”
“그러니까 지금 신입님 말은 나더러… 마탑에 가서 마법사들을 가르치라고?”
별 해괴한 소릴 듣는다는 표정을 짓는 내게 그는 걱정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방금 졸부님이 쓴 거. 그 정도만 가르쳐도 돼. 대가는 섭섭지 않게 치를게.”
“마탑주가 허락할까?”
“걔는 상관없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한테 걔라니.
옆에 없다고 상사 막말하는 건 여기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나도 들숨에 교수 욕 날숨에 과장 욕을 달고 다녔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만, 신입님이 마탑에서 슈퍼 루키인지는 몰라도 엄연히 신입사원인데.
‘이렇게 독단적으로 상사 결재도 안 받고 일을 진행해도 되는 건가?’
망설이는 내게 그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자꾸만 깜박이는 기다란 속눈썹은 오늘따라 더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본인도 자기 얼굴이 무기인걸 알긴 아나 보았다.
“왜, 안 돼?”
“그건 아닌데…….”
들어가기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마탑에 연줄도 얻고 관심도 얻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넘어간 지 오래였지만 나는 부러 말꼬리를 흐렸다.
협상의 탁자에서 원하는 걸 얻으려면 적당히 감출 줄도 알아야 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마치 그가 원해서 이런 거래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마법 가르쳐 줄게.”
결국 그는 내가 원하는 말을 먼저 해주었다.
“마석을 정제하는 것부터 졸부님이 원하는 마법은 모두.”
그제야 나는 씩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좋아. 딜.”
[관심수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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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을 거래였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