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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2)화 (12/185)

#12

신입님을 만난 지도 벌써 5일이 흘렀다. 그와는 그 후로 특별한 대화 없이 헤어졌다.

-그래, 졸부님.

믿기지 않지만 이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올 때처럼 느닷없이 사라졌다. 그게 끝이었다.

물론 여주였다면 어떻게든 사건이 터지고 엮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난 주인공이 아니었으니까.

그 냉혈한 자식은 내가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그렇게 애걸복걸 빌었는데도 휑 가버렸다. 자기가 얻는 게 뭐가 있냐며.

‘매정한 신입님.’

그래도 뒤에 꼬박꼬박 님자를 붙여서 불러주기로 했다.

그 덕에 내가 엄청난 마력을 소유하고 있단 걸 알았고, 관심 수치도 조금이나마 올려줬기 때문이었다.

[관심 수치: 14%

남은 시간: 11일 5시간 34분 20초]

나는 습관적으로 광장에 나갔다. 힘들긴 해도 단상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게 나름 주의 끌기에 좋았다.

이제는 부끄럽기 보다는 일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평소처럼 자리를 잡고 원맨쇼를 시작한 나는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휘이잉. 바람이 텅 빈 공간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가장 북적거려야 할 이 시간에 광장이 이렇게까지 비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기웃거리는데,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들 한 무리가 소란스럽게 곁을 지나갔다.

“빨리 와, 이러다 늦겠어!”

“뛰면 머리 망가진단 말야.”

“그 분은 너 볼 시간도 없으셔.”

“어떡해, 나 벌써부터 심장이 떨려!”

아무래도 오늘의 관종상은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돌아갈 모양이었다.

방금 지나간 아가씨들을 그토록 애달게 만드는 사람.

나 역시 그 유명인사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나는 단상에서 폴짝 뛰어 내려 그들을 좇아 달렸다.

도착한 곳은 광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대로변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출현을 기다리며 길을 가운데에 두고 양 옆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대부분이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인 아가씨들이었다.

‘대체 누가 오길래 저런담.’

귀족들까지 나설 정도의 셀럽 행사가 있었나?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멀리서부터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아, 드디어…!”

사람들의 술렁임도 더욱 거세졌다.

모세의 기적처럼 그를 가르고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앞뒤로 무장한 기사들을 다수 대동한 빛나는 마차가 천천히 지나갔다.

빛난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뭘로 만들었는지 마차는 태양빛에 반사되어 은은한 광택을 눈이 부시도록 뽐내고 있었다.

무시 못 할 크기 또한 마차 주인의 위용을 보여줬다.

우리 집의 마차가 일반 경차라면 눈앞의 마차는 페라리였다.

페라리를 탄 남자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고 사람들을 향해 인사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나왔다.

하늘거리는 백금발에 옅은 보라색 눈동자.

마치 어릴 적 읽던 동화 속 왕자님의 정석을 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저 사람은…….’

…아니, 정정한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왕자님이었다.

칼리안 드웨인 로마노프.

현 왕의 총애를 받는 장자이자, 에임의 왕세자였다.

지나가버린 마차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으며 근처의 영애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아, 저렇게 멋진 분의 옆을 차지하게 될 사람은 대체 누굴까? 아마 매일같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겠지. 그 사람이 입는 드레스, 장신구, 가는 장소 모든 것에 이목이 쏠릴 거야.”

그녀의 말에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뭐… 뭣? 관심? 나 같은 관종을 위한 맞춤 자리잖아!!

모종의 계획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관통했다. 꽉 말아 쥔 주먹이 절로 불끈거렸다.

오늘부로 내 목표는, 반드시 왕세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내게 고급 정보를 알려준 영애의 눈빛은 황홀하게 젖어있었다.

그녀는 마차가 남긴 흙먼지까지 소중하다는 듯 들이마시며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왕세자비는 누가 될까?”

나는 그녀의 시야에 끼어들어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후훗, 궁금하십니까? 바로 접니다!”

꿈결을 헤매던 그녀의 표정이 곧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관종이 또 관종 짓하네, 정도의 표정은 살짝 상처가 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나는 굴하지 않고 방긋 웃으며 돌아섰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에게서 ‘별 미친 소리 다 듣겠네.’ 하는 말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내가 왕세자비가 되는 게 그렇게 미친 짓이라면 기꺼이 미칠 수 있었다.

이미 미친년으로 살고 있는 시점에서 미친 짓거리 하나 더 늘어난다고 내 평판이 바뀔 리 없었다.

그리고 원래 꿈은 크게 갖는 거였다. 이 정도 크게 가져야 겨우 살까말까 할 테니까.

뿔뿔이 해산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새삼 왕세자의 인기를 실감했다.

‘얼굴 한 번 비췄는데 사람이 이렇게나 몰리냐. 완전 연예인이 따로 없네.’

관심받지 못하는 관종답게 나는 이리저리 치였다.

급류에 휩쓸리는 피라미마냥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겨우 고개만 내밀고 발을 움직였다.

으악, 억. 그거 당신 바구니에 있는 빵 아니고 내 팔이야, 이 양반아. 잡아당기지 마. 아오, 이건 내 케이크고 당신 건 왼손에 있잖아.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도 좋았지만 사랑스런 나의 디저트가 뭉개지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의 고됨을 씻어내기 위한 마이 프레셔스. 1일1팩은 못해도 1일1케이크는 삶의 진리인 법이다.

버티다 못해 일단 골목으로 빠질 요량으로 나는 몸을 틀었다.

그러다 그만 누군가에게 어깨빵을 거하게 당하고 말았다.

“악.”

어깨에 저릿한 통증이 전해오자마자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월척이다!’

나는 0.1초의 반사신경으로 꾹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그러자 줄곧 절대반지마냥 소중하게 품고 있던 케이크 상자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갈고 닦은 나의 비장 스킬, 일명 ‘어그로’의 맛을 보여줄 시간이었다.

절로 굴러온 관종의 귀한 먹잇감을 그냥 보내줄 순 없었다.

나는 일단 냅다 주저앉았다.

“아, 안 돼! 내 케, 케이크가…!”

예쁜 분홍색 케이크는 상자를 벗어나 흙바닥을 처참하게 굴렀다.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주춤하는 게 보였다.

좋아, 계획대로. 나는 얼른 이어서 한 편의 눈물겨운 즉석드라마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고오…! 하나밖에 없는 우리 동생 주려던 케이크가 진흙 덩어리가 됐네! 초콜릿 맛이라고 속일수도 없고 어쩐담…!”

사남매인 우리 가족은 순식간에 이남매가 되었다.

없는 사람 만들어서 미안, 오빠들. 근데 오빠들도 나 없는 사람 취급하는데 이 정도면 약과 아냐?

나는 케이크를 수습하는 척 은근슬쩍 더 뭉갰다. 이야, 케이크 액괴 촉감 굿.

한 번 팔아볼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겉으로는 수도꼭지를 오픈시켰다. 억지로 짜낸 눈물이 찔찔 흘렀다.

“이거 먹으면 앓던 병도 싹 나을 것 같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었는데… 누나가 무능해서, 아픈데 케이크 한 번 못 먹게 해서 미안해…! 마지막 잎새 같이 가여운 내 동생…!”

미하일은 지금 아카데미에서 멀쩡히 강의를 듣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은 앓아누울 수도 있는 법 아닌가. 그 미래를 잠시 땡겨 쓰는 것뿐이다.

나는 결정타로 통곡을 터뜨리며 즉석 막장 드라마의 끝을 맺었다.

“우리 동생 없으면 나 이제 어떻게 살지…! 흐윽, 흑!”

처절한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새나왔다. 극단에 한 번 고개를 들이밀어 봐도 괜찮을 연기실력이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느낀 건데, 골목에 울리는 목소리는 내 것뿐이었다.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쯤이면 슬슬 입질이 올 법도 하건만. 상대에게선 사과는커녕 일말의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와중에 발목까지 접질렸다는 듯 절뚝였다. 팔도 보란 듯이 덜렁였다.

그러자 피식,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내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 아파하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웃다니?

사이코패스의 낯짝을 확인하고자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내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쟤가 왜 여기 있지?’

역광 때문에 바로 알아보기는 힘들었으나,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신입님?”

며칠 전에 가보겠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진 마법사였다.

* * *

“허억, 헉…!”

한 남자가 거의 기다시피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내뱉는 거친 숨소리 사이사이 낮은 욕지거리가 끊임없이 섞여 나왔다.

“망할 마탑주. 자기가 탑주면 다야? 거기가 어디라고 맨날 사람을 오라가라…….”

“벤.”

“흐악…!”

불쑥 눈앞에 나타난 신형에 벤은 꼴사나운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자기 방까지 올라오라고 할 땐 언제고, 왜 본인이 직접 자신 앞에 등판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벤은 경련이 일어나는 입가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아휴, 탑주님도 급하시긴. 조금만 기다리셨으면 금방 갔을 텐데요.”

“네가 달팽이새끼만도 못한 것 같아서.”

“하하… 그러셨구나 하하… 제가 좀 느리긴 하죠…….”

올해로 마탑에 온 지 3년 차에 접어드는 마법사, 벤은 속으로 오늘만 서른 두 번째인 욕을 읊조렸다.

‘망할 마탑주. 자기가 탑주면 다야?’

그 순간, 날쌘 바람이 벤의 얼굴을 때렸다.

루치펠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주변 풍경이 달라졌다. 14층에서 헥헥대고 있던 벤은 어느새 마탑 꼭대기에 나와 있었다.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아찔한 높이이건만.

아무렇지도 않게 난간 가장자리에 털썩 앉는 루치펠을 보며 벤은 서른두 번째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응, 다네. 탑주님이면 다야.’

내부에선 마법을 쓰지 못하게 전대 마탑주들이 몇 십 년에 걸쳐 경계술식을 걸어둔 마탑이었다.

그런 공간에서 이토록 자유자재로 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오직 루치펠 뿐이었다.

루치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른 침만 연신 꼴깍꼴깍 넘기는 벤을 향해 물었다.

“벤. 너 옛날엔 무리해서라도 하루에 몇 번씩 에타드 왕국에 갔었잖아. 요즘은 왜 안 가?”

뜬금없는 질문에 벤은 맥이 탁 풀렸다.

그는 루치펠이 자신을 옥상까지 데려오기에, 뭔가 심각하게 잘못한 게 있나 근 한 달간의 행보를 정신없이 되짚어보는 중이었다.

여기서 목이 골프공 마냥 날아가 버리는 것은 아닌지 하고.

‘그런 게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갑자기 왜 이런 걸 물어보시는 거람.’

벤은 심란해하면서도 대답은 착실하게 했다.

“이제 더 이상 갈 이유가 없어졌으니까요.”

“이유가 뭐였는데?”

“…헬렌이요. 1년 넘게 사귀었었는데, 2주 전에 헤어졌어요.”

“그렇다는 건 더 이상 원래의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뜻이야?”

“뭐…… 그런 셈이죠.”

벤은 그것보다 더 복합적인 상황과 이유들이 얽힌 게 이별이란 설명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눈앞의 마탑주께서는 몇 백 년이 지나도 그런 걸 알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계를 멸망시키는 법 같은 것이면 몰라도 저 마탑주에게 이별이나 사랑이라니?

차라리 까마귀가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게 더 어울렸다.

벤의 말을 듣고서 루치펠은 뭔가를 잠시 골몰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흥미가 갑자기 떨어진 적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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