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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1)화 (11/185)

#11

잔잔한 산들바람이 불고, 향긋한 꽃내음이 코를 스치는 평화로운 오후.

허공에 마법진이 새겨지더니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한 여자가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여자는 땅 위를 한 바퀴 구르고서야 제대로 된 착지를 마쳤다.

“아고고…….”

때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중년의 남자가 그녀에게 한 마디 던졌다.

“참 요란하게도 오는구나, 이디스.”

“텔레포트는 아직 익숙지가 않아서요.”

뒷목을 문지르며 멋쩍게 웃은 이디스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일을 마치고 지금 막 복귀한 참이었다.

“탑주님 지금 계시죠?”

남자가 대답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디스는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첨탑을 한 번 눈에 담고서, 전속력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낸 후였다.

그녀는 문손잡이를 지팡이처럼 잡고 서서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헉… 진짜, 허억… 탑주님.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마법도 못 쓰게 하면서 제일 꼭대기에 계시면 어떡해요.”

“억울하면 너도 경계술식 뚫고 마법 쓰던가.”

“저는 탑주님이 세상엔 자기 같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좀 아셨으면 좋겠어요.”

“나도 네가 내 앞에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놈이 너밖에 없다는 걸 좀 알았으면 좋겠다.”

책상 위에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가 느긋하게 말을 던졌다.

그의 뒤로 난 거대한 유리창 밖에는 흰 구름이 그 느긋한 말투만큼이나 유유히 흘러가는 중이었다.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 그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독자적이자 독보적인 세력, 마탑.

그들은 마도구나 스크롤을 생산하거나 마탑에 들어오는 의뢰를 처리하기만 할 뿐, 대륙 내의 패권 다툼에는 결코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재화를 대가로 전쟁에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해도 소용없었다.

마탑은 지난 수백 년 간 그 모든 제안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그 고고한 첨탑의 주인, 루치펠 럭스가 이디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인데. 시찰이 벌써 끝났어? 왕국이 작긴 해도 볼 건 좀 있었을 텐데.”

“아니 그게요, 그 볼 거라는 거. 토지거래점에 가보니까 이미 그 일대 땅까지 전부 매매됐다는 거 있죠? 그래서 곧장 동굴로 이동 했더니 어떤 여자가 그 앞을 기웃거리고 있더라고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낸 이디스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근데 그 여자, 상당했어요.”

“뭐가.”

“탑주님. 제 마력량 아시죠? 이거 하나로 마탑에 들어왔으니까요. 근데 그 여자의 코어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어쩌면 절 능가할지도 모르는 크기였어요.”

“그래?”

내내 심드렁하던 루치펠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이디스는 순간 아차 싶었다. 저 눈은,

“다시 가서 이번엔 동굴 말고 그 여자에 대해서 알아와.”

루치펠이 흥미로운 사건을 발견할 때마다 나오는 빛이었다.

그럴 때마다 말단 신입인 저 같은 마법사는 그의 밑에서 줄기차게 구르곤 했다. 실력 개선을 위한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안 그래도 그 머나먼 고행을 마치자마자 탑을 오른 터였다.

완전히 탈진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든데 다시 돌아가라니.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이디스는 파리한 낯빛으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탑주님…. 제 체력이 지금 달팽이만도 못해서요. 거기가 어디 옆동네 왕국도 아니고…….”

“그건 네 사정이지.”

뚝 끊어지는 대답에 이디스는 애절하게 빌기 시작했다.

“좌표 계산이 너무 어렵단 말이에요. 안 그래도 한나절 걸리는데 지금하면 이틀은 걸릴걸요? 정말 제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으신 건가요? 제가 불쌍한 어린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사이 그 여자가 사라질 수도 있고, 또…….”

“하.”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한숨소리에 이디스는 끝을 모르고 내뱉던 신세한탄을 멈추었다.

심기라도 건드린 걸까. 노심초사하던 차에 루치펠이 성가신 파리를 내쫓듯 손을 저었다.

“됐고, 시끄러우니까 나가 봐. 대신에 내가 돌아올 때까지 스크롤 두 배 더 만들어 놓고.”

“감사합니다, 탑주님!”

이디스는 이를 놓칠세라 꾸벅 인사하고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기운 없다더니 도망갈 힘은 또 있나보네. 작게 중얼거리며 루치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을 잃은 채 마탑 앞에 버려져 있던 그를 전대 마탑주가 거둬 기른 지도 이십 년.

마탑은 현재 다시없을 가장 막강한 마법사를 주인으로서 섬기는 중이었다.

‘에임 왕국이라… 누군지 얼굴이나 좀 구경할까.’

훅 끼쳐온 바람에 커튼이 팔락였다.

잠시 후 바람이 잦아들고, 잔잔해진 커튼자락 사이엔 아무도 없었다.

* * *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딱히 날 위협하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인기척 하나 내지 않고 지진이 일어나는 동굴에 굳이 들어와 이 동굴이 네 동굴이냐 묻는다면, 내가 답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응, 내가 주인인데.”

그는 이 땅도 아니고 이 ‘동굴’ 이라고 콕 집어서 물었다. 그 역시 이 동굴의 진가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확실히 알려주어야 했다. 이건 내 소유라고.

남자는 그저 말없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나도 지지 않고 그의 눈코입을 하나하나, 아주 자세히 뜯어봤다.

그가 날 왜 응시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미친… 대박 잘생겼어.’

이것보다 더 합당한 이유 있는 사람? 아니라고 해도 막상 남자의 얼굴을 보면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잘생겼냐면.

‘이놈이 까르보나라에 공깃밥을 비벼 먹는대도 잡곡밥 현미밥 흑미밥까지 골고루 주문해 줄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아무리 이목구비가 뭐 하나 빠짐없이 잘났대도 내 자금줄을 넘겨줄 순 없었다.

내 짧았던 인생, 사람은 자고로 돈이 최고였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였다.

“그러는 넌 누구야?”

상대가 먼저 반말했으니 나도 반말로 나가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남자도 딱히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내 물음에 그는 손도 아니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드드드드.

아까와 같은 지진이 또다시 일어나더니, 마석 한 덩어리가 바닥을 뚫고 거칠게 올라왔다.

마치 자수정처럼 빛나는 표면을 쓸며 그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면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마법사도 얼굴을 보고 뽑나보군.’

원작대로라면 신입 마법사인 여주를 먼저 보내서 정찰하고 땅을 사게 했다.

그래서 어쩌면 여주를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여주 대신 다른 이가 나타난 걸 보면 내가 너무 일찍 온 모양이었다.

여주가 아직 마탑에 들어가지 않은 시점이라 신입은 이 남자인 듯했다.

그런데 다른 마법사가 여길 찾아오기도 했던가?

소설은 주인공들 중심으로 돌아가니 진상을 알 수 없는 물음이었다.

“마탑에서 파견된 신입 마법사. 맞지? 가장 말단이니까 이 후진 곳까지 임무 발령받았을 테고. 하지만 이 동굴은 이미 내 소유야. 한 발 늦었어. 아깝겠지만 마탑에 그렇게 전해.”

“걱정하지 마, 우린 주인 있는 건 안 건드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의 시선이 내 가슴께로 내려갔다.

변태 취급하기엔 그의 붉은 눈동자는 너무나도 무미건조해서, 나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그저 채집한 곤충을 관찰하는 정도의 눈빛이었다.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건데.’

왠지 해부당하는 개구리의 심정을 알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신입은 단순히 겉만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왜 그 힘을 숨기고 살아? 마력양은 많아도, 코어가 단련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아.”

신입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고,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보쇼 마법사 양반. 그게 무슨 소리야. 나한테 마력이 있다니?

“가뭄에 콩 나듯 마법사가 나오는 에임 왕국에서 너 정도 마력이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응? 뭔… 마력?”

“난 널 오늘 처음 봤고. 능력을 숨기는 이유가 뭐야.”

숨기긴 뭘 숨겨. 금시초문이고만.

동물의 세계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같은 부류를 알아보듯이, 마법사는 마법사를 알아볼 수 있나 보았다.

눈앞의 신입은 마법사였고, 그는 내게 왜 힘을 숨기고 사느냐고 했다.

즉 나도 마법사란 소리였다.

내가 마법사라니… 내가 마법사였다니…!

알아듣긴 했지만 이해는 못할 소리에 나는 입을 벌리고 눈만 뻐끔거렸다.

그러자 그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설마… 그렇게 질릴 만큼 많은 마력을 가지고도 그걸 모른다는 멍청한 소릴 지껄이진 않겠지.”

“…….”

몰랐다. 진짜 몰랐다.

광장 골목의 샤베트 가게 아저씨가 맞은편 케이크 가게 아주머니랑 바람피운다는 건 알아도 이건 몰랐다.

내가 꿀 먹은 병아리처럼 있으니 그가 자기 가슴께를 짚었다.

“여기를 집중해서 봐봐. 희미하게 빛나는 뭔가가 보이지? 내 코어야.”

나는 반신반의하며 시선을 모았다.

일단 빛은 안 보였지만 신입님의 탄탄한 가슴은 보였다. 오, 훌륭하군.

아무래도 빛이 나가는 건 내 두 눈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이언맨 뺨치는 내 레이저가 부담스러웠는지 그가 내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너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지?”

“그러엄. 아주 훌륭하네, 훌륭해.”

“지금 네 코어에 움직임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나는 다시 꿀 먹은 병아리가 되었다. 쳇. 예리하긴.

그는 외계인이라도 만난 양 날 유심히 뜯어봤다.

“어떻게 된 게 코어가 있는데도 쓰는 법을 모를 수가 있지?”

상식 이하의 일이라 어이가 없다는 어조였다.

거 참. 다른 나라에서 왔는데 모를 수도 있지.

‘막말로 자기는 비행기 신발 벗고 탄다 하면 신발장 어딨냐고 물어볼 거면서.’

내 불경한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가 눈을 곱게 휘며 나른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그 특유의 분위기로 매우 농염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자기 딴에는 그냥 웃는다고 웃는 건지는 몰라도.

“…정말 신기한 걸 찾았네. 너 정체가 뭐야.”

서로의 시선이 딱 맞는 퍼즐조각을 맞춘 것처럼 순간 맞물렸다.

나는 나를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씨익 웃었다.

“졸부.”

앞으로 졸부라고 불러, 신입님.

노다지를 얻었으니, 돈방석에 앉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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