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입님과 왕세자 사이에서
#10
톡, 톡. 펜촉이 종이를 찍었다 떨어지길 수차례.
칼리안은 좀처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밤에 꾼 이상한 꿈이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매우 뛰어난, 가히 걸작이라 불러도 될 답안과 논문을 발견하였지만 그 저자를 만나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칼리안은 종이에 잉크가 검게 번져가는 것을 보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기역자로 놓인 옆 책상에선 그의 보좌관인 켈른이 바삐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꿈에서 아마… 켈른이 그 걸작을 가져다 줬었지.’
터무니없는 생각이란 건 알았으나 물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는 켈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켈른.”
“예, 저하.”
서류 산에 파묻혀 있던 켈른이 곧장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은 조금 머뭇거리다 그에게 물었다.
“…내게 뭔가 봐달라고 한 게 있지 않았나?”
“오늘 보고드릴 사항이라면 전부 마쳤습니다만. 더 조사하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아니네.”
칼리안은 펜을 고쳐 쥐었다. 그리곤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내려놓았다.
“혹 희대의 역작이라며 자네가 어떤 서류를 내게 들고 온 적은 없었던가?”
“오늘 가져온 서류는 이것들이 전부입니다.”
“…그렇군.”
이번에도 칼리안의 손에 다시 쥐어진 펜은 일 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아니면, 내가 누구를 궁으로 초청한 적은?”
“직접 초청하신 것은 사흘 전 무역 문제로 에스카르토 영애와 점심 식사를 같이 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알겠네.”
현실과 헷갈릴 만큼 굉장히 생생했는데. 정말로 그저 꿈일 뿐이었나.
칼리안은 작게 한숨을 쉬며 펜을 끄적였다. 갑자기 의욕이 확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를 곁에서 지켜보던 켈른은 세자저하가 오늘따라 왜 저러시는지 통 알 수가 없어 조마조마 했다.
“저하. 많이 피곤하신 듯합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고, 내일 이어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무리는 제가 끝낼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리안은 관자놀이를 짚었던 손을 떼고 켈른을 응시했다.
충직스럽기 그지없는 대답과 달리, 검게 그늘 진 그의 눈 밑은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은 영문도 모르고 불안해하는 보좌관을 서류더미에 던져두고 갈 만큼 매정한 상사가 아니었다.
오늘 하루도 꿈에 정신이 팔려있는 자신을 대신해 평소보다 두 배 이상의 일을 처리하지 않았나.
실제도 아닌 상상에 불과한 꿈에 더 이상 얽매일 순 없었다.
빠르게 상념을 털어내고서 칼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마저 하지. 미뤄봤자 어차피 해야 할 일이지 않은가.”
* * *
차라라락.
카지노에서나 볼 법한 슬롯머신이 눈앞에서 빠르게 돌아갔다.
다만 카지노의 슬롯머신은 대개 3개의 슬롯이 돌아가는 반면에, 이것은 슬롯이 두 개 뿐이었다.
첫 번째 슬롯에선 숫자가, 두 번째 슬롯에선 시간의 단위가 넘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힘차게 레버를 당겼다.
차르륵, 탁. 정신없이 돌아가던 슬롯이 멈췄다.
나온 숫자는 3. 단위는 일.
“아,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3년 전으로 돌아왔으니까.
이번에 겪은 죽음은 처음이 아니었고, 내게 걸린 시스템도 단순히 죽는 게 아니었다.
죽음과 동시에, 임의적인 과거로 돌아가는 것.
나는 그렇게 도합 총 6년을 되돌아 왔다.
관심 수치를 채우지 못해 죽고 과거로 회귀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다 보니까 그 시간들이 쌓여 6년이나 되어버렸다.
만약 내가 주인공인 소설이 있다면 제목은 ‘메이블린 슈트레커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일 것이다.
내 속도 모르고 눈앞에선 시스템 메시지들이 폭죽처럼 연달아 터져 나오고 있었다.
[3일 전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은 총 10번의 죽음을 경험하였습니다!]
[당신의 칭호는 ‘끈질긴 관종’입니다.]
분명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는 실제 내 나이와 비슷했었는데.
열 번의 회귀를 거치고 나니 나는 어느새 갓 성인식을 치른 영애가 되어 있었다.
이러다간 조만간 갓난아기를 넘어서 아예 무(無)의 존재로 돌아가 버릴지도 몰랐다.
슬롯은 내 맘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만약 숫자 18과 단위가 년이 나온다면 엄마 뱃속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었다.
으.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나는 황급히 허공에 창을 띠웠다.
[관심 수치: 0%
남은 시간: 16일 20시간 55분 04초]
다행히도 이번에 주어진 시간은 길었다. 처음으로 이 주가 넘는 시간이 나왔다.
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았다. 수치를 채울 시간이 넉넉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장기전을 노려볼 수 있었다.
내가 살아가려면 관심을 얻어야만 했고, 이 관심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아야 했다.
광장에서 주의를 끄는 단발성의 관심은 딱 그때뿐, 깎이기도 쉬웠다.
‘지속적인 관심을 받으려면 일단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해.’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 너무 빈약했다.
가족, 저택 사용인들, 광장에서 우발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이 전부.
내 울타리를 조금 더 넓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튼튼한 게 좋았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들이 친해지길 원하고, 관심을 받고, 그것이 쉬이 넘볼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일 경우. 경외하기까지 하는 건 딱 정해져 있었다.
돈, 권력, 명예.
그 중에서도 난 돈으로 울타리를 쌓아볼 생각이었다.
학회를 통해 명예 좀 쌓아보려다가 그 고생을 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권력과 명예는 좀 힘들더라도 돈은 해볼 만했다. 내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치트키가 있었다.
‘바로 소설 바깥에서 온 사람이라는 거지.’
그렇기에 이 세계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몇 가지 설정들을 안다는 것.
보잘 것 없는 이 작은 왕국에도 한 가지 엄청난 노다지가 있었는데, 바로 어마어마한 양의 마석이 묻혀있는 동굴이었다.
이 동굴에서 느껴지는 폭발적인 마력을 조사하기 위해 마탑에선 신참 마법사를 보낸다.
그 마법사가 바로 소설의 여주였다.
원작대로라면 여주가 가장 먼저 동굴을 발견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내 코가 석자인 걸 어쩌나.
여주에겐 로맨스일지 몰라도, 내겐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마침 원래 마탑 소유였던 동굴은 주인 없이 버려진 산골짜기에 불과했다. 그간 꽤나 과거로 돌아온 덕분이었다.
‘이만 가볼까.’
숲에 갈 예정이었기에 나는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서 저택을 나섰다.
동굴을 내 소유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동굴을 포함한 그 일대의 땅이 전부 내 것이었다.
말했듯이 난 갓 성인식을 치른 귀족 영애의 신분이었고, 축하의 의미로 응당 그에 걸맞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일주일 전. 뭘 원하냐는 가족들의 물음에, 나는 지도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한 곳을 딱 짚었었다.
-이 땅을 갖고 싶어요.
그 날 저녁, 슈트레커 자작을 비롯한 가족들은 이유 한 번 묻지도 않고 토지 소유권을 곧장 내 손에 쥐어줬다.
그 부근의 땅이 마석의 방대한 마력 때문에 마물들이 자주 출현하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설마 진짜로… 주워온 딸은 아니겠지?’
사람들이 얼씬도 안 하니 굉장히 싼 값에 살 수 있어서 좋았고, 어차피 나야 뭐.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까 문제없었지만.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알아낸 시스템의 법칙 중 하나였다.
음… 그러니까 지금까지 겪은 시스템을 정리해보자면,
첫째. 관심 수치를 채워야 살 수 있다.
가장 엿같고 울화통이 치미는 부분이다.
잡조연이나 하녀, 심지어 거지 나부랭이로 빙의하는 건 봤어도 관종으로 빙의한 경우는 처음 봤다. 근데 그게 내가 될 줄이야!
둘째. 죽으면 회귀한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고사든 모든 죽음은 결국 회귀로 연결됐다.
크게 두 가지가 있었는데, 먼저 수치를 채우지 못한 채 시간이 다 되어 죽을 경우.
이 경우엔 조금 전처럼 슬롯을 돌려 임의적인 과거로 돌아갔다.
두 번째로는 [남은 시간] 내 죽으면 진행 중이던 시스템이 활성화된 날짜로 회귀했다.
마치 게임이 오버되면 첫 단계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즉, 처음에 받은 [남은 시간]이 10일이고 3일 째에 자살이든 살인이든 죽었다면. 3일 전으로 리셋되는 것이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은 기억들은 아니지만, 분명 절벽에서 몸을 날렸는데 아침 식사 중인 식당에서 눈을 떴을 때가 제일 어이없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시간도 많으니 반드시 성공한다!’
그리 다짐하며 나는 동굴 입구로 들어섰다.
엄청난 노다지를 품고 있는 동굴답게, 겉은 흔하고 평범한 외양이었다.
원래 대박인 것들일수록 화려하지 않은 법이다.
적당히 축축하고,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음습하고.
굴곡진 내부를 수차례 꺾어가며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곳에 다다라서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벽을 주먹으로 두드리자 공간 여기저기서 굴절된 메아리가 부딪혔다. 다량의 마석이 매장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소리였다.
나는 억만장자의 미소를 지으며 이번엔 발을 굴러 바닥을 쿵 내리쳤다.
조금 전보다 더 큰 메아리가… 어?
드드드드.
발밑이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것인지 떨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몸을 뒤로 물렸지만 바닥은 이미 금이 가고 있었다.
제기랄, 이번 사인은 자연재해로 인한 압사인가.
나는 바닥에 엎어져서 커다란 돌덩이가 내 머리를 후려칠 가능성을 헤아려 보았다.
‘음… 가능성은 모르겠고 그것이 곧 닥치리라는 것만 잘 알겠네.’
그러나 죽음을 예감한 순간, 사위가 희미하게 밝아졌다.
빛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찾을 수 없었다.
‘나… 방사능에 오염된 건가?’
푸른빛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내 몸이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서도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은은한 빛줄기가 새어나왔다.
땅의 흔들림이 거세질수록 빛의 세기도 더욱 세졌다.
뭔가가 알을 깨고 나오듯 아래서부터 솟구치고 있었다.
원인 모를 발광으로 길이 보이게 되자 나는 진원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푸콱!
두터운 암반을 뚫고 커다란 비석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그것과 공명이라도 하듯 손끝이 찌르르 저렸다.
내 키를 훨씬 넘게 솟아오른 그것은, 거대한 마석 덩어리였다.
꽤 깊은 곳에 묻혀있으니 적당한 인부를 구해서 천천히 파낼 작정이었는데.
동굴에 오자마자 이렇게 격렬하게 날 반겨줄 줄은 몰랐다. 그간 광장에서 공연한다고 너무 무심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갑작스런 지각 변동으로 드러난 커다란 마석 덩어리를 슬며시 쓸어보았다. 청록색 빛이 온화하게 빛났다.
그 빛으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공간에, 나 말고도 다른 이가 더 있다는 것을.
나는 내 앞으로 길게 진 그림자를 따라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심연을 연상케 하는 칠흑 같은 흑발, 강렬하게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가 느릿하게 발을 내딛었다.
나와 그 사이에 고작 한 걸음만큼의 거리를 남겨두고서, 그는 멈췄다.
“찾았다.”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남자가 요사스런 입술을 뗐다.
“네가 이 동굴 주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