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외전)그 가족과 그 신의 속사정
#9
이틀 전, 슈트레커 저택.
“오셨어요, 다니엘 오라버니.”
메이블린이 활짝 웃으며 다니엘 앞에 섰다.
다니엘은 흠칫 놀랐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표정을 굳혔다.
워낙에 상시 무덤덤하게 구는 그의 성정 탓에,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는 호수 위의 백조처럼 잔잔하기 그지없었지만.
“…….”
다니엘은 반짝거리는 별사탕처럼 쏟아지는 메이블린의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최근에 일이 많아 며칠 동안 밤을 샌 지라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닐 것이었다.
동생은 저리도 밝고 아름다운데, 인사를 한다면 적어도 사람 몰골 정도는 하고 했으면 했다.
낯빛이 검은 퀭한 얼굴로 피곤한 티를 팍팍 내며 메이블린과 이야기하긴 싫었다.
동생에게는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지저분하고 느슨한 이런 모습이 아니라.
다니엘은 피로를 풀고 씻기 위해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 * *
“오늘 날이 좀 더웠지. 레모네이드라도 한 잔 타 줄까?”
노아는 복사꽃처럼 물든 메이블린의 뺨을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한여름의 찬란한 태양을 닮은 금빛 눈동자도, 정갈하게 꽃자수가 놓아진 손수건도.
노아는 툭 치면 바닥으로 팍 내다 꽂힐 것만 같은 제 동생을 다시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 갈대 같은 몸으로 무슨 레모네이드 타령인지. 그 정도는 저도 알아서 갖다 마실 수 있었다.
이 정도 일에 가녀린 동생을 시킬 것이었으면 저택에 하인들은 왜 있겠는가.
게다가 끙끙대며 직접 수놓았을 것이 분명한, 향기 나고 보드라운 메이의 손수건에 막 훈련을 마치고 온 제 땀을 닦아내기도 싫었다.
노아는 힘겹게 메이블린의 손을 밀어냈다.
“됐어.”
거절하는 손이 몇 번이나 손수건을 덥석 받아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간신히 참았다.
노아 역시 고개를 젓곤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 * *
‘누님?’
미하일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속으로 우물거렸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제 누이의 모습에 심히 놀랐다.
요 며칠 무슨 일로 그리도 바쁜지 매사 정신없어 보이던 터라 말 한 마디 쉬이 나누질 못했었다.
그랬던 누님이 저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미하일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저를 기다린 것인가 싶어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왜 여기에 서 있었는지 이유를 물었다.
“누, 누님. 왜 여기 서계세요…….”
“그냥, 저녁 먹으러 지나가던 중이었어. 너도 배고프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란 말이 다였다.
어린 마음에 속이 상한 미하일은 기대한 자신이 갑자기 바보같이 느껴졌다.
‘누님이 내가 뭐라고 나를 기다렸겠어.’
명석한 두뇌를 가진 다니엘과 뛰어난 검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노아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그저 아카데미 학생일 뿐이었다.
미하일 역시 씻는다는 핑계를 대며 그녀를 제치고 가버렸다.
* * *
“말해도 모르셨을 거잖아요.”
윌리엄 슈트레커는 가슴이 아팠다.
가라앉은 눈동자, 생기를 잃은 목소리. 한동안 메이블린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제가 딸아이에게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였나.
아이는 부모의 감정을 그대로 고스란히 물려받는다고 했다.
나디아가 죽고 나서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빈자리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그는 괜찮은 척 무던히도 애썼다.
그런데 메이가 그리 느끼고 있었을 줄이야.
얼마 전엔 정리해 두었던 나디아의 초상화를 메이가 찾았다고 달리아에게 전해 듣기까지 했다.
‘대체… 어쩌면 좋지.’
큰 말썽 한 번 일으키지 않고 고분고분 절 따르던 아이라 나름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것은 풍족하게는 아니어도 말하는 그때그때 구해다 주었고,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뭔가 빠뜨린 것은 없는지 항상 살폈다.
그런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메이블린은 지낸 게 아니라 버텨온 모양이었다.
마땅한 사죄의 말이 떠오르지 않아 윌리엄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핑계거리처럼 들릴지도 몰랐다. 그럴 바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괜히 어설프게나마 위로를 건넸다가 더 큰 상처를 주는 끔직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윌리엄은 그녀가 얼음을 띄운 레모네이드를 좋아한다는 건 알아도. 그걸 얘기하면서 같이 마시는 걸 더 좋아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메이블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씩씩한 기색으로 가족들에게 인사했다.
“상쾌한 아침이에요~ 아버지, 오라버니들, 미하일.”
비록 그 차림이 뭐라 설명하기도 힘들 정도로 괴이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녀의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머릿속은 전부 같은 생각 중이었다.
‘딸아이가 원한다면.’
‘메이블린이 원한다면.’
‘누님이 원하신다면.’
좋을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원한다면 다 해도 좋다는 식이었다.
그 양파 같은 속을 정작 메이블린 본인만 모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들은 메이블린이 웬 이상한 놈팽이를 데려와서 결혼하겠다고 우기는 것만 아니면 무엇이든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녀가 근래 들어 광장의 단상을 자주 애용한다는 사실을 듣고는 그 주변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에게 신신당부까지 할 정도였다.
뒤처리를 비롯한 벌금은 물론이고 사례금까지 줄 터이니, 메이블린이 무엇을 하든 간에 막지 말고 마음껏 하게 두라고.
게걸스럽게 식사를 마친 메이블린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복장 그대로 나가고서, 윌리엄은 입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해라. 애가 상처받지 않도록.”
굳이 짚어주지 않아도 이미 그들 모두가 평소와 다름없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네가 뭘 하든 이해하고 존중한단다, 라는 뜻의 그들이 표하는 방식이었다.
다니엘은 메이블린이 나간 자리를 한참동안이나 응시하다 윌리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대로 보내도 되겠습니까, 아버지?”
“그냥 저 하고 싶은 대로 둬라. 항상 애어른처럼 행동해서 나디아의 부재로 너무 조숙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그것이 도리어 걱정됐던 아이야. 이제라도 메이답게 살게 해주자꾸나.”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어조에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노아는 들고 있던 잼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럼 위험할지도 모르니 제가 몰래 미행이라도 하겠습니다.”
잼나이프 대신 의자 옆에 기대두었던 장검을 챙기며 노아가 일어섰지만 윌리엄이 그를 저지했다.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그가 입을 뗐다.
“됐다. 괜히 걸렸다가 애 심기만 돋울라.”
앞에서 버섯수프를 줄곧 열심히 떠먹던 미하일도 고개를 들었다.
“형님. 누님을 넘볼 자는 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누님이 원해서 힘을 숨기고는 있지만요.”
“그래. 지난번에 그 땅을 사 달라 한 것도 수련을 위해서였겠지. 걱정할 일 없을게다. 메이블린이지 않느냐.”
윌리엄은 김이 따끈하게 올라오는 히비스커스 차를 홀짝였다.
차 향 만큼이나 은은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슬며시 지어졌다.
“그 애는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인걸.”
정작 그 마법사는 빙의하면서 전부 잊어버렸다는 게, 역시 문제라면 문제였다.
* * *
메이블린이 아직 한해원이였을 시절, 천계.
최고위 신만이 거주할 수 있는 신전은 때 아닌 소란으로 들썩였다.
웅장한 대전에 양옆으로 늘어선 수많은 신과 천사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버지! 유희가 지나치십니다!”
“왜 매번 그곳에 다녀오시는 겁니까?”
푸른색 로브를 걸친 남자는 그들을 제치고서 그 사이를 설렁설렁 걸어갔다.
그가 떼는 걸음마다 거센 외침이 따라붙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아버지!!”
남자는 귀찮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융통성이라곤 개미 눈물만큼도 없는 것들.
“너희들도 가 봐. 얼마나 재밌는데. 이런데 처박혀만 있으니까 따분해지는 거 아냐.”
탐탁지 않은 어조와 함께 남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붉은 융단이 호화롭게 쭉 깔린 길의 끝에는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빛나는 의자가 있었다.
단순히 앉는 용도 그 이상의 의미로.
어느 누구도 쉬이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감의 옥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 것 같은 휘광.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몸을 뉘인 남자는 귀찮은 기색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시끄러우니까, 다들 가서 일이나 해.”
남자가 무료한 듯 길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수한 이들이 그 앞에 달려가 매달렸다.
“아버지! 더는 말없이 자리를 비우지 않으시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겨우 이틀 가지고 뭘 그래.”
퍽 절박한 외침에도,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창세신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자칫 세계의 기강이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쪽 세계의 신들과 너무 가까이 하시면 아니 됩니다!”
“……거 참, 쫑알쫑알 말도 많네.”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창세신은 놀러 다니지도 못하나. 서러워서, 원.
더 들어주기 힘들었던 남자는 싱긋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얘들아.”
뚝.
소음이 겹겹이 쌓이던 공간이, 한순간에 정적으로 뒤덮였다.
한겨울의 칼바람을 닮은 서늘한 목소리가 모두의 목구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시끄럽다고.”
그다지 높지도 않은 왕좌이건만, 그를 제외한 모두가 느끼는 위압감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그의 진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압살할 듯 숨통을 조여와, 어느 누구도 눈 한번 깜박거리지도 못했다.
공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조용해진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는지 남자는 인광을 거두며 턱을 괴었다.
“할 말 없으면 다들 가서 일이나 해.”
한 마디만 더 들리면 이 정도론 못 끝낼 것 같으니까.
뒷말을 가식적인 미소로 삼키고서, 그는 어서 나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흉흉한 기세가 거두어지자, 여기저기서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한껏 낮추었던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한결 누그러진 기세로 황급히 몸을 물렸다.
짙은 적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내린 한 여인만 제외하고.
남자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물었다.
“에리스. 할 말 있어?”
여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남자는 턱을 괴었던 손을 떼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할 말 있으면 해. 들어줄게.”
“저… 혹시…….”
뜸을 들이며 머뭇거리던 여자는 결국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 아닙니다. 아버지.”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더니 도망치듯 그에게서 멀어졌다.
여자가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남자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예 데려온 걸 알면 난리 나겠는데.”
뼈마디가 굵은 손이 지휘하듯 허공을 그었다. 곧 홀로그램처럼 뜬 화면 속에서 경고창이 떠올랐다.
남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어두워졌다.
“이거 원. 능력 복구도 완전히 안 되잖아.”
빠르게 손을 휘저어 화면에서 에임 왕국을 찾아낸 남자는 한가운데 뜬 담당 수호신의 사진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빈 집에 데려다놓긴 좀 그렇지만… 여기가 제일 편하겠지, 뭐.”
흑백으로 처리된 사진에는 빨간 글자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형 집행 중]
끙. 남자의 미간이 좁혀졌다.
“힌트를 많이 못 준 게 아쉽네. 하필 이번 분기 시나리오 구상을 이제 막 시작했을 건 뭐람. 애들을 다그칠 수도 없고…….”
남자는 흘러내린 로브 자락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사명이랍시고 고행 길로 인도하는 건 딱 질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파엘이 연기라도 잘 해주겠지. 조금만 더 고생해라.”
허공을 선회하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결정에 따라 하얀 빛이 에임 왕국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기다릴 테니까, 한 번 원 없이 바꿔 봐.”
새로운 결말을 품은 세계의 서막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