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8)화 (8/185)

#8

깨진 안경에 긁혀 뺨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그가 낮게 으르렁댔다.

“말 해.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뭘, 이 새끼야! 주어 생략하지 말라… 어?

사납게 그를 노려보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부서진 안경은 마도구였다. 안경을 쓴 사람의 외양을 바꿔주는 마도구.

비스코프의 평범했던 갈색 머리카락이 눈부신 은발로 물들고, 검었던 눈동자도 푸른 바다빛으로 물결쳤다.

달빛을 등지고 날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천사라고 해도 믿을 만큼 가히 환상적이었다.

……지금 날 죽이려고 안달 났다는 점만 제외하고 본다면.

그리고 정말 유감스럽게도, 이 환상적인 얼굴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비스코프 그레이의 진명은 베인 에스카로트.

에임 왕국의 유일한 공작이자,

이 소설 속의 남주인공이었다.

‘젠장…….’

나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로댕 씨 옆에서 같이 ‘생각하는 메이블린’ 자세를 취하고 싶었지만 남주 녀석이 날 구속하고 있는 관계 상 생략하고.

이 녀석은 대체 오늘 처음 만난 날 왜 다짜고짜 죽이려고 하는 것이며, 뭘 자꾸 말하라는 걸까. 에 대해 심오한 생각을 계속해서 전개해 나갔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야, 이 답답아! 주어를 말해야 할 거 아니야, 주어를! 다섯 살 때 마물을 때려잡으면 뭐 해! 말 하나 제대로 못하고 생각도 없는데! 입을 막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하냐!”

대체 뭐가 뭔지 1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손가락을 과자처럼 와드득 씹힌 베인은 신음을 삼키며 내게 얼굴을 더욱 바싹 붙였다.

그의 희고 기다란 손가락엔 붉은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아베 나폴가. 이래도 발뺌할 건가?”

“!”

나는 뱁새눈을 떴다. 이아베 나폴가. 소설에서 읽은 단어였다.

어젯밤 논문을 쓰다 문득 생각나 한쪽 귀퉁이에 작게 끄적거리기도 했다.

베인이 내 논문을 훑어볼 때 발견한 모양인데… 난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소설은 이제 겨우 초반부에 돌입했던 터라, 그에 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았다.

“뭐… 사랑해, 이런 뜻 아니야?”

“하!”

내심 고민하다가 내놓은 답인데. 베인은 그런 날 야멸차게도 비웃었다.

“웃기지도 않는 변명을 하는군.”

“야, 안 웃긴 건 아니지. 너 방금 나 비웃었잖아.”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왜 이렇게 당당한 거지?”

맹랑하기 그지없는 내 태도에 베인의 단정한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가 당황할 만도 했다.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이렇게나 몰아붙이는데, 상대가 쫄기는커녕 배째려면 째라는 태도로 나오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겐 이게 당연한 태도였다. 어차피 오 분 후면 죽는 와중에, 얘한테 굳이 살려달라고 굽신거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빈약한 정보나 좀 얻을 요량으로 살살 혀를 굴렸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인데 그래? 어차피 죽을 거, 뭔지나 좀 알고 죽자. 내가 그 뜻을 모르든 말든 간에, 단어를 입에 담은 이상 나 죽이기로 이미 마음먹었을 거 아냐.”

내가 야무지게도 따박따박 대꾸하자 베인이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했다.

서느런 저음이 속삭이듯 그의 붉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그 단어는, 내가 암흑가의 수장 자리를 이을 후계에게만 비밀스럽게 남기기로 한 암호다. 알고 있는 자는 나와, 내가 신뢰하는 자들 몇 뿐이야. 그러니 말해라. 누가 네게 정보를 흘렸지?”

이런 썅. 나는 억울했다. 이 단어가 그렇게 중요한 건 줄 알았으면 절대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베인 에스카로트는 천사 같은 외양, 천사 같은 행실과 매너로 왕국 모두가 선망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사르르 웃는 그의 미소에 수많은 영애들이 녹아내렸고, 심지어 영식들 몇몇조차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하나 그의 실상은 뒷세계의 지배자이자, 암흑가의 수장이었다.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그림자 속에서 은밀하게 왕국을 쥐고 흔드는 존재.

현 왕이 후사를 한 명밖에 보지 않은 상황에서, 왕과 아비가 다른 동생인 베인은 왕세자 다음 가는 순위의 왕위 계승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죽고 궁에서 나온 그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왕세자마저 독살하고 만다.

여기서 베인은 의심받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범인을 밝혀내겠다고 나섰지.’

원작의 본격적인 시작은 이 독살사건 해결 의뢰를 마탑에 넣으면서부터다.

이 때 왕국 시찰건으로 이전에 한 번 와 본 적 있는 여주가 파견된다.

그렇게 둘은 사건 조사 차 만나게 되고, 여주가 위험한 폭군 남주를 소설 특유의 여주인공 전용 스킬로 변화시키며 사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말인즉슨, 베인이 마시멜로 마냥 말랑말랑 해지는 것은 여주가 오고 난 뒤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정말 애석하게, 아니 다행스럽게도 왕세자께서는 멀쩡히 살아계셨다.

여주가 아직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는 소리다.

“순순히 토해낸다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주겠다.”

이놈이 감화되려면 멀었다는 소리기도 하고.

야임마, 사람 그렇게 쥐새끼처럼 보는 거 아니야. 나는 그냥 네가 소설에서 여주를 볼 때마다 요상하기 그지없는 이 단어를 읊조리길래, 이 나라 말로 사랑해라도 되는 줄 알았다고.

죽는 건 오케이였지만 고통스럽게 죽는 건 불허였다.

같은 죽음이래도 호상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 아니겠는가.

내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눈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으려니 베인이 가소롭다는 듯 조소했다.

“말할 마음이 없나보군. 네 선택이 그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는 수밖에.”

조금 전 내가 신명나게 물어뜯었던 그의 손은, 어느새 내 목 언저리로 다가와 있었다.

나머지 한 손은 내 두 손목을 단단히 결박하고 있어 베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시스템 창을 열었다.

[남은시간: 1분 42초]

서두르면 지금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뮬레이션이 얼추 딱 맞게 끝날 시간이었다.

나는 바르작대는 척 하며 발목이 잘 돌아가는지, 무릎은 잘 꺾이는지 확인했다.

‘오케이, 이상 무.’

점검이 끝나자, 나는 있는 힘껏 무릎을 쳐올렸다.

‘쟈근 나를 무시하면 주옥되는 거야!’

뾰족하게 세워진 무릎은 묵직한 무언가를 향해 거세게 돌진했다.

곧이어 계란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트-라익!

“……!!”

베인은 짤막한 신음 한 번 내지르지도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끅끅대는 그를 앞에 두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너 임마, 반성해! 감히 최후의 낭만을 즐기는 날 방해해? 너 때문에 놀라서 포도씨가 튀어나올 뻔했다고!”

“이 쥐새끼 같은… 반드시 죽여 버릴 테다…….”

시뻘게진 낯으로 바닥을 긁으며 베인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천사 같은 얼굴에 그렇지 못한 입이라니. 훈계 좀 해줘야겠다.

“미안한데, 네가 안 죽여도 어차피 죽거든. 예쁜 말 써야죠, 착한 어린이.”

[남은 시간: 38초]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힘줄이 불거지도록 꽉 말아 쥔 베인의 주먹을 토닥였다.

“착하게 살아. 뭐, 네 얼굴이면 나쁜 남자여도 넘어갈 거 같긴 한데. 나쁜 남자는 유행 지난 지 오래거든. 고운 얼굴에 착한 심성이면 여주도 더 빨리 넘어올 거야.”

“빌어먹을… 클라인! 당장 이 년을 죽여!”

그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멀리서 바람을 가르는 쐐액 소리가 났다.

베인과 함께 온 암살자가 날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 높은 층에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날렵한 몸놀림으로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걸 보니, 글로만 읽던 암흑가의 실상이 새삼 와 닿았다.

저런 실력자가 암흑가엔 넘쳐난단 말이지.

[남은 시간: 9초]

“하…….”

긴긴 한숨이 절로 새나왔다.

거지같은 혐생에서 벗어나 폭군이지만 내 여자에겐 따듯한, 잘빠진 남정네들에게 둘러싸여 해피엔딩 좀 즐겨보라는 신의 자비로운 안배인 줄 알았건만. 자비는 개뿔.

베인은 곧 죽을 날 향해 각오하라는 듯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빙의녀라고 해서 최종보스 악당을 다 길들일 수 있는 건 아닌가 보았다.

억울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시작은 달콤살벌이지만 결국엔 달콤만 남지 않나? 이거 클리셰 아니었냐고.

왜 나만 살벌로 시작해서 살인으로 끝나는데!

왜 나만 로맨스가 아니라 로맨스릴러인 건데!

시X! 나는 쌍중지를 우뚝 쳐들었다.

오른손은 하늘을 향해, 왼손은 베인을 향해.

이거나 처먹어라, 망할 놈들아. 야심한 밤이라 배고플까 봐 특별히 하나씩 나눠준다.

[남은 시간: 1초]

역시 이번에도 실패였다.

허윽. 심장부근에 직격해오는 갑작스런 고통과 함께 몸이 뒤로 기우뚱 넘어갔다.

[관심수치: 65%

남은 시간: 0초]

세상이 뒤집혔다. 아니, 내가 쓰러진 건가.

[관심 수치를 100%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사망 정산이 이루어집니다.]

터질 듯이 귓가에 쿵쿵 울리던 심장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나는 그렇게 죽었다.

* * *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드는 오후.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즐비하게 늘어진 서류들의 끝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처리해야 할 결재서류가 산처럼 쌓여있었지만, 칼리안은 단 하나의 서류에서 몇 시간 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젯밤 켈른의 보고와 함께 마지막으로 받은 서류.

흰 종이에 빼곡하게 들어찬 그림과 글자들은 칼리안의 시선을 사로잡고 도통 놓아주질 않았다.

정갈하게 이어진 필기는 그에게 끝없는 놀라움만을 가져다주었다.

종이 한 장 한 장에 적힌 모든 것이 혁명에 가까운 발견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지식을 발견한 이가 이제 갓 성인식을 치른 한 소녀라는 사실이었다.

40년 넘게 학계에 몸을 담근 학자도, 교수도, 심지어 아카데미 학생도 아닌 평범했던 소녀.

갑자기 나타난 소녀는 단 하루 만에 경이로움을 보여줬다.

학회장은 인정할 수 없다며 길길이 날뛰었으나 별로 신경 쓸 것이 못되었다.

칼리안의 신뢰도는 학회장보단 그의 보좌관인 켈른이 우선이었다.

‘슈트레커 가의 메이블린 슈트레커…….’

칼리안은 이 엄청난 소녀를 한시바삐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아침에 그녀를 궁으로 초청하도록 켈른에게 지시했으니, 지금쯤이면 준비를 마치고 궁에 도착하고도 충분히 남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메이블린은 시계바늘이 예상했던 시간을 한참 넘어가도 보이지 않았다.

권위를 내세우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은 이 나라의 왕세자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람들은 언제나 제 앞에 고개를 조아렸고, 황송한 낯으로 자신을 대했다. 그것이 자신이 초청한 경우라면 더더욱.

그런데 메이블린은 모습을 보이긴커녕 답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칼리안은 결국 시종장을 불러 자세한 소식을 알아오게끔 했다.

소식을 전하지 못할 정도로 큰일이 생긴 것일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만 멀쩡한 사고를 갉아먹었다.

“저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다리던 소식을 가지고 먼저 돌아온 것은 켈른이었다.

항상 희미하게나마 입꼬리에 미소가 묻어있던 그의 얼굴은 조각하다 만 대리석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다소 조급한 물음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이… 슈트레커 영애가…….”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태도에,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켈른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어젯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셨답니다.”

칼리안의 손아귀에서 펜대가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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