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7)화 (7/185)

2. 남주가 사랑 말고 살인을 합니다

#7

그 동생에 그 오라비인가. 이고아트는 기가 막혔다.

“지, 지금 뭐라 하였나?”

“자신의 졸렬한 자존심 때문에 천재를 놓치는 당신은, 같은 공간에서 숨쉬기도 힘겨울 만큼 멍청합니다.”

“자네, 정녕 옷을 벗고 싶은 겐가!”

이고아트가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했다. 노호성이 우레처럼 울렸지만 다니엘은 눈썹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네, 벗기려면 벗기십쇼. 메이도 있지 못하는 자리에 제가 무슨 자격으로 있겠습니까. 제가 학회장님처럼 철면피도 아니라서 말입니다.”

“후회할 걸세.”

“아닐 겁니다.”

다니엘은 고고하게 등을 돌려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잠깐.”

문고리가 완전히 돌아가기 전, 이고아트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애의 답안은 놓고 가야 할 것이 아닌가.”

다니엘은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최대한 신사적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왜 그러십니까. 이미 존재하는 답안을 옮겨 적은 것뿐이라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 지식은 아까우신 겁니까? 여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이라?”

이고아트는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인정하면, 메이블린의 능력과 지위를 인정하는 셈이었다.

그는 현 학계에 어마어마한 발전과 파장을 가져다 줄 어떤 지식보다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이 더 우선이었다.

“자네 가문은 이제 학회에 얼씬도 못하게 될 걸세.”

“와 달라 부르셔도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다니엘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윽고 그의 발소리마저 멀어지자, 이고아트는 책상을 부서져라 두드렸다.

“젠장, 젠장!”

그의 두꺼운 철면피만큼이나 단단한 책상엔 금하나 가지 않고, 애꿎은 주먹만 아팠지만. 그는 한참이나 그 바보 같은 짓을 계속했다.

고작 반나절 만에 십 년은 더 늙은 기분이었다.

* * *

다니엘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지리가 복잡한 궁이었지만 이미 여러 번 와 본 듯 익숙하게 길을 틀어 일렬로 난 불빛을 따라갔다.

그는 호위병의 수색도 거치지 않고 궁에서도 상당히 안쪽에 위치한 공간에 다다랐다.

커다란 문 앞에 서서 다니엘은 주저 없이 문을 두드렸다.

“켈른, 나다.”

안에서 아직 들어오라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다니엘이 문을 벌컥 열었다.

인상 좋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를 반겼다.

“노크와 동시에 문을 열면 노크가 의미 없는 것이 되지 않나.”

“미안하네.”

켈른은 한 쪽 눈썹을 치켜뜨며 팔짱을 꼈다. 온갖 서류가 산비하게 늘어진 책상에 걸터앉은 그는 거친 숨을 내쉬는 다니엘을 천천히 훑었다.

“대체 무엇이길래 이 시간에, 그것도 이리 급하게 찾아온 겐가? 자네답지 않게.”

“그것이…….”

다니엘은 메이의 답안지와 새로 쓰다만 논문을 내밀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켈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꺼운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남아있는 종이의 두께가 얇아질수록, 그의 얼굴 역시 좀 전의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놀라움으로 차차 물들어갔다.

“이게 정말… 자네 동생이 전부 쓴 것이란 말인가?”

“그래. 한데 그뿐만이 아니야.”

다니엘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꼬깃꼬깃해진 작은 종잇조각을 펼치자, 답안과 같은 필기체의 글씨가 어슴푸레 보였다.

종이의 끝은 시커멓게 타서 가루가 흩날렸다.

“누군가 메이의 논문을 의도적으로 없앴네. 혹 비스코프 그레이라는 자를 아나?”

턱을 매만지며 한참을 생각하던 켈른은 이내 고개를 슬 기울였다.

“확실치는 않다만, 그레이 가의 유일한 자제는 현재 병세 악화로 인해 외출을 못 한 지 꽤 된 걸로 알고 있네.”

“그럼 궐련을 피우는 것은 불가능하겠군.”

“어림도 없지.”

다니엘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머리를 짚었다.

학회장실을 올라가기 전 마주쳤던 남자. 그자가 범인이었다.

감히 메이를 속이고 그녀의 것을 망가뜨리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다니엘의 어깨를 켈른이 다독였다.

“내일 아침 출근하려면 이만 돌아가 봐야지 않겠는가. 내 알아서 할 터이니, 어서 가보게.”

“그게 말인데…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

“자네, 설마…….”

켈른의 따가운 시선이 작열하게 쏘아졌다.

다니엘은 볼을 긁으며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켈른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대단하구만. 대단해. 러셀 그 양반, 자존심이 어지간히 세서 한 번 눈 밖에 나면 웬만해선 복귀가 어려울 터인데. 자네 동생도 자네가 이런단 걸 알긴 아나?”

“…….”

잠자코 타박을 듣고만 있는 다니엘에 켈른은 다시 한 번 더 복장이 터졌다.

하여간 이 고지식한 자식.

“당연히 모르겠지. 뭘 하든 그 입을 꽉 다물고 있으니. 제발 생각만 하지 말고, 입 밖으로 좀 꺼내란 말이네. 나는 자네가 가끔 벙어리가 아닌지 의심스러워.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겠나.”

“……알겠네.”

“알긴, 무슨. 아침인사 하는데 십 년은 더 걸리게 생겼네만.”

혀를 쯧쯧 차며 켈른은 메이블린의 답안과 몇 장 되지 않는 논문을 보고서류 사이에 끼워 넣었다. 곧 하루 업무를 마감할 시간이었다.

“난 미련한 친구를 위해 특별히 지금 저하께 보고하러 가보겠네.”

“…고맙네.”

“친구 사이에 무슨. 소식이 있는 대로 바로 연락 주겠네.”

* * *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다사다난했던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좋았던 예감은 언제나처럼 헛된 바람이었고,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타결책은 껍질을 까고 보니 최상급의 독약이었다.

[관심 수치: 71%

남은 시간: 42분 58초]

관심수치를 올리기는커녕 오늘 하루 만에 십 퍼센트나 깎였다.

채우는 건 힘들어 죽겠는데, 깎이는 건 한순간이었다.

마치 입금과 소비의 상관관계처럼. 흑흑, 자본주의의 굴레는 여기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도 꼰대 영감탱이에게 삿대질을 하던 순간이 말도 못하게 짜릿했으니, 그걸로 됐다.

나는 침대 위를 뒹굴거리며 탱글탱글 잘 여물은 포도알을 입에 넣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상큼함이 좋았고, 오는 길에 서점에서 쓸어온 책들도 제법 재밌었다.

아예 죽을 작정으로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역시 인생의 진리는 무소유였다.

낄낄거리며 막 다음 권을 집어 들려는데, 정갈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메이블린.”

다니엘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이불을 홱 뒤집어썼다.

내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자, 노크 소리는 한 번 더 울렸다.

“벌써 자느냐?”

“…….”

할 말이 있어서 온 모양인데, 나는 나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내 일로 오늘 교수직 박탈당한 거 알고 있었다. 아마 나 때문이라고 책망이라도 하려고 왔겠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다니엘에겐 미안했지만,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어서 선뜻 나가기가 꺼려졌다.

원래 평소 조용한 애들이 진짜 화나면 헐크가 되는 것처럼 다니엘도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잠자코 숨죽이고 있던 나는 다니엘의 기척을 듣기 위해 슬그머니 이불을 걷었다.

밖은 한결같이 조용해서, 다니엘이 갔는지 아직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받아줄 걸 그랬나.’

나는 마지막 남은 포도알을 쏙 삼키며 갈등했다.

‘오빠도 오빠대로 어이없었을 텐데. 어차피 시간도 삼십 분 정도밖에 안 남았고.’

에잇. 까짓 거, 한풀이 좀 들어주고 나도 속 좀 풀다 죽지 뭐.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텐데.

갈등을 마친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갔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밖은 휑했다. 다니엘은 이미 가고 없었다.

이왕 마음먹은 거, 그의 방으로 직접 찾아가려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노선을 틀어 정원으로 향했다.

저택 앞에는 화단이라기엔 크고 정원이라기엔 좀 작은 공간이 있었다.

나는 그네처럼 생긴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둥그렇게 뜬 보름달은 야속하리만큼 예뻤다.

누구 속도 모르고, 누구 처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짜증나…….”

애꿎은 땅에 발길질만 했다. 발에 채인 작은 돌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어?’

발을 휘젓다 말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앞쪽으로 튀어나간 돌멩이가 뭔가에 부딪혀서 멈췄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한 남자가 서있었다.

“꽤 답답하셨나 봅니다, 영애. 이 시간에 나와 계시고.”

비스코프 그레이였다.

속이 찌르르 떨렸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살 웃었다.

일단 그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머, 경께서 어찌 이곳에…….”

“오늘 일이 걱정되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는 말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비스코프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오후와 똑같은 태도로 나를 대했다.

‘저 가증스러운 눈.’

그를 철석같이 믿은 내가 바보였다. 다시 바보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믿는 척을 좀 해볼까.

나는 나긋한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경께선 최선을 다해주셨는걸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눈을 살포시 감고, 그의 손을 들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희미한 궐련 냄새가 났다.

잿더미가 돼버린 논문을 찾은 쓰레기통. 거기서 발견한 궐련과 같은 냄새였다.

이 쓰디쓴 인생을 잊고자 궐련 정도는 나도 몇 번 피워봐서 알았다.

……음, 사실 몇 십번. 임종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 부는 거다.

나는 잡고 있던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그리곤 곧장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통쾌한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너무도 능숙하게 내 주먹을 피했다.

“읏…!”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난 두 팔을 붙잡힌 상태였다.

“그러게 얌전히 계시지 왜 나오셨습니까. 알아서 제 수하가 끝냈을 텐데. 이러면 번거롭게 제가 피를 묻혀야 하지 않습니까.”

수하? 나는 곧장 고개를 쳐들어 내 방이 위치한 곳을 확인했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미친, 이놈은 날 아예 죽일 작정이었던 거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대체 왜? 오늘 처음 본 나를?’

있는 힘껏 몸을 흔들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꼭 단단한 시멘트 안에 팔을 넣은 채 굳어버린 듯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퉷. 나는 뺀질거리는 그 얼굴에 침을 뱉었다.

“야. 너 뭐하는 새끼야.”

신랄한 내 욕설에 비스코프가 이를 빠득 악물었다.

오늘 종일 봐온 신사적인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 남아있는 거라곤 오직 소름 돋는 살기, 그리고 이질적인 분위기뿐이었다.

마치 어울리지도 않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듯한…….

판단을 마친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어느 정도 각이 나오자,

쾅!

그대로 비스코프의 빤질한 이마를 향해 머리를 처박았다.

순간 별이 번쩍이고, 비스코프가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날 붙잡고 있던 구속이 조금 느슨해졌다.

나는 재빨리 그를 밀치고 달아났다. 하지만 세 발짝도 채 떼기 전에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제대로 된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등이 벽에 눌림과 동시에 입이 막혔다.

“읍…!”

“조용히 하지 않으면, 네 가족들까지 무사하지 못할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