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5)화 (5/185)

#5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닌데 처리하는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 듯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잠시 동안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아예 헛소리로 치부할 작정은 아니었나본지, 내게로 몸을 살짝 붙이곤 속삭이듯 말했다.

“혹 처음에 말씀하셨던 그 논문, 볼 수 있을까요?”

세상에 이게 웬 횡재람. 아까는 그렇게 떠먹이려고 해도 극구 거부하더니.

나는 먹던 샌드위치도 내던지고 서류가방을 뒤집어 탈탈 털었다. 종잇장이 한 무더기로 우수수 떨어졌다.

두꺼운 종이뭉치를 건네받은 답답맨은 금세 논문에 푹 빠져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마땅히 할 게 없었던 나는 그가 내려놓은 샌드위치를 슬쩍 끌어와 먹었다.

이따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려면 배가 든든해야 했다.

‘잘 보고 있나?’

나는 손가락에 묻은 머스타드 소스를 핥으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얇은 금속테 너머의 눈동자가 극한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급하게 종이를 넘기는 손가락은 파르르 떨렸다.

어찌나 심하게 떠는지, 물구나무서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제가 뭐랬어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일 거라고 했잖아요.”

“정말 놀랍습니다. 이건 마치, 이건, 그러니까… 혁명입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딸꾹. 콜록, 컥. 가슴을 치며 목 막혀 하는 내게 그가 황급히 뚜껑을 열어 물병을 건넸다.

내가 사레들린 목을 잠재우는 동안, 그는 상기된 얼굴로 내 앞을 정신 사납게 왔다 갔다 했다.

“왜 이런 대단한 발견을 여태 알리지 않은 겁니까? 당신은 천재예요!”

“어… 뭐, 예. 감사해요.”

답답맨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는 내려간 안경테를 바로잡으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물어봐도 될까요?”

‘드디어 정식 인산가.’

나도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났다.

“메이블린 슈트레커예요. 당신은요?”

“비스코프 그레이입니다.”

비스코프는 내 손에 논문을 쥐어주며 학회 건물 안쪽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걸 보니 결과가 나왔나 봅니다. 아가씨께선 보나마나 합격하셨을 테지만요. 저는 여기서 최연소 교수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비스코프와 짧게 악수한 나는 돌아서자마자 드레스 자락을 쥐고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관심수치: 85%

남은 시간: 8시간 02분 35초]

예감이 좋은 아침이었고, 나쁘지 않은 점심이었다. 이제 완벽한 하루로 끝날 일만 남았다.

결과 안내 장소에는 커다란 종이에 등수대로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제일먼저 맨 윗줄을 살폈다. 제롬 니켈슨. 내 이름이 아니었다.

바로 아랫줄로 시선을 내렸다. 또 내 이름이 아니었다.

그 아랫줄도, 바로 그 다음 아랫줄도.

내 이름이 아니었다.

나는 허겁지겁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흰 종이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간신히 내 이름을 찾았다.

‘말도 안 돼.’

맨 아랫줄에, 선명한 붉은 색으로 낙인처럼 찍혀있는 글자.

[실격: 메이블린 슈트레커]

눈앞이 순간 암흑으로 물들었다.

* * *

학회장 앞에 달려간 나는 내 시험지를 들이밀고 손가락으로 쿡쿡 찍었다.

“몇 번을 말해요. 제가 직접 푼 거 맞다니까요?”

“증거가 없잖나. 인정할 수 없네.”

“그러니까, 왜 그 증거를 저한테서만 찾으시냐구요.”

“자네, 감독관에게 물으니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시험장을 나갔다던데.”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학회장이 팔짱을 꼈다.

주름진 그의 눈은 내게 어떠한 해명도 바라고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이미 확신한 기정사실을 통보 중인 것에 불과했다.

“몇 년을 공부한 영식들도 어려워하는 문제를, 갓 성인식을 치른 자네가 그 짧은 시간 안에 풀어놓고 만점을 맞았다는 게 말이 되나? 나를 속이고 싶었다면 이 정도로 허술하지는 말았어야지. 쯧.”

아악! 말하는 신종 인플루엔자 같은 노인네!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게 바이러스보다도 못하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몇 가닥 안 남은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고 싶은 욕구가 미칠 듯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건 내 머리를 쥐어뜯는 일뿐이었다.

그의 반감을 사, 관심수치가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관심수치: 84%

남은 시간: 6시간 24분 09초]

꼰대의 집합체인 이 노인네와 실랑이를 한 지도 벌써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양해를 구하고 잘못된 결과를 수정해 줄 것을, 다음에는 내가 어떻게 이걸 풀었는지 과정을, 지금은 논문을 꺼내들고 주구장창 설명을 했지만 학회장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날 조용히 시키는 데만 열중했다.

나같이 새파랗게 어린 애가 자기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겠지. 그래도 일개 교수도 아니고 학회장이나 되는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만약 니켈슨 경이 만점이었어도 부정하셨을 건가요? 아니잖아요. 왜 눈에 훤히 보이는 걸 자꾸만 외면하세요. 갓 성인식을 치른 여자애의 능력은 능력도 아니라 이건가요?”

나는 열불이 나 외쳤다.

“그 편협한 시각으로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죽이며 학회장 자리에 오르신 겁니까? 양심이 있으시면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학회장님!”

“말조심하게, 영애!”

책상이 쪼개지도록 쾅 치며 학회장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담금질한 쇠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네만, 요즘 세간에서 영애를 뭐라 하는지 정말 모르는 겐가? 다들 미치광이라 하더군! 그런 영애가 하루 만에 천재가 된다?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러니까 제가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겠다니까요? 정말 미치광이인지, 아니면 천재인지 보자고요!”

꽉 막힌 영감탱이는 씩씩거리며 몇 초간 나와 대치하다, 주름진 입가를 징그럽게 끌어올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네. 시간 낭비일 뿐이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십니까.”

“그건 보지 못했지만, 다른 건 하나 본 게 있지. 자네의 오라비인 다니엘 슈트레커가 아카데미에서 신학 교수라던데. 교수들은 학회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이 있네. 혹 그자가 답안을 몰래 빼돌린 것은 아닌지 불러다 심문해 봐야겠어.”

“뭐, 뭐요?”

왜 멀쩡한 우리 오빠까지 끌어들이고 난리야? 안 그래도 찬밥신세인데 더 눈엣가시 되겠네!

가시같이 삐죽 튀어나온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그가 비열하게 웃었다.

“호위! 슈트레커 영애를 이만 내보내게!”

학회장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문 밖에 서있던 병사 하나가 들어와 나를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

“나는 끝났네.”

악다구니를 썼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쿵. 바로 눈앞에서 두꺼운 철문이 거칠게 닫혔다.

학회 정문까지 질질 끌려간 나는 병사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었다.

하! 거지같은 노인네! 두고 봐, 내가 기필코…….

“왜 그러십니까? 혹 일이 잘 안 풀렸습니까?”

성난 소처럼 돌진하는 내 앞에 비스코프가 훅 끼어들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나는 빠르게 열을 식혔다.

‘그러고 보니 기다리겠다고 했었지.’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 사정을 얼추 파악한 그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학회장께서 영애의 실력을 믿지 않으신다는 거군요.”

비스코프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턱을 문지르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주십시오, 논문. 어쩌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레이 경이요?”

“아뇨. 저는 일개 조수지만, 제 상관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 번 요청 드려보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촉촉한 눈망울을 만들어내며 그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고마워요, 경. 하지만 한 가지 약속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반드시 오늘 저녁까지 진위여부가 가려지도록 해주세요. 그게 불가능하다면, 논문.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오늘 밤에 나는 죽는다. 그러니 적어도 저녁까지는 상황이 해결되어야만 했다.

비스코프는 대답 대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눈매가 얇게 휜 그의 표정은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이판사판인 거, 이 사람이라도 믿어보는 수밖에.

나는 논문이 담긴 갈색 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기다릴게요.”

“걱정 마십시오. 꼭 약속드리겠습니다.”

순간, 유리알 너머 비스코프의 눈이 사이하게 빛났다.

* * *

[관심 수치: 83%

남은시간: 5시간 11분 42초]

비스코프가 안으로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났다.

파랬던 하늘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고, 내 속도 노을처럼 점점 타들어 갔다.

나는 사람이 많은 광장에라도 다녀올까 생각하다가 관두었다.

만약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비스코프가 와서 엇갈린다면 그보다 나쁜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광장에서 몇 시간 동안 광대놀음 해봤자 수치는 고작 몇 퍼센트 올라갔다.

것보다는 일 분이라도 빨리 내 자격을 승인받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명성을 올리는 게 이득이었다.

더해서, 나는 비스코프를 기다리는 동안 기억을 떠올려 논문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설령 그가 약속한 시간 내에 오지 못한다면 이거라도 들고 아카데미에 쳐들어가 유레카를 외칠 작정이었다.

무단침입이라 오늘 쳐들어가면 승인심사고 뭐고 다신 학회에 얼씬도 못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길게 봐도 짧게 살게 되는 게 지금 내 처지였다.

손목이 아파 잠시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는데, 먼발치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후다닥 가방을 챙겨 벌떡 일어났다.

‘젠장, 진짜로 불렀냐고. 망할 노인네.’

다니엘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정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으, 그의 뒤로 보이는 검은 오오라가 내 착각이었으면.

나는 다람쥐처럼 달려가 그 앞을 막아섰다.

“오라버니! 제가 다 설명할게요!”

요 며칠 계속 밤새서 근무하던데. 안 그래도 피곤한 양반을 이렇게 오게 만드니 내가 영 고깝게 보일 게 뻔했다.

내 편을 들어주긴커녕 날 잘 타이르겠다며 오히려 사죄하고 나올 가능성이 99.9%였다.

아, 내 관심 수치도 그랬으면.

“오라버니, 정말 제가 풀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믿어주세요, 제발.”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다스릴 겨를도 없었다.

나는 다니엘에게 매달려 방금 전까지 새로 쓰다 만 논문을 팔락였다.

“보세요. 저 정말 다 알아요. 지금 그레이 경이 절 도와주러 들어갔어요. 곧 올지도 몰라요. 경이 가져간 논문을 보면 더 정확히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다니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거짓말 아니에요. 진짜 아닌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다니엘은 화난 얼굴로 내 손에서 종이뭉치를 확 채갔다. 그러곤 딱 한 마디만 남기고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가.”

돌아가. 돌아, 가. 돌, 아, 가.

머릿속에서 글자가 소낙비처럼 하나씩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애절한 내 호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예상은 했다만 속이 들끓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 참. 네가 뭔데 나한테 돌아가라 마라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