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4)화 (4/185)

#4

물감을 어찌나 많이 먹었는지 머리가 무거워서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휘청대면서도 벽에 덕지덕지 물감을 칠했다.

다름 아닌 머리털로 그린 벽화는 마치 블랙홀을 연상케 했다.

특별히 ‘거지같은 세상에 대한 환멸’ 이라고 제목도 붙여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메이블린 아가씨가 또 메이블린 하네.’ 하는 식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오늘도 꽝이라는 뜻이었다.

‘잣댔군.’

까앙, 깡. 나는 텅 빈 물감통들을 발로 차서 쓰레기통에 골인 시킨 뒤 저택으로 돌아왔다.

머리는 무거웠지만, 몸은 한결 가벼웠다. 오는 길에 털 모피를 광장에서 파는 샤베트와 바꿔 먹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더워서 이대로 가다간 열사병으로 먼저 죽을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어디 오늘은 얼마나 채웠나…….”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뜨거운 물에 몸도 푹 담갔다. 나는 자작의 술창고에서 훔친 위스키까지 한 잔 원샷하고서, 시스템 창을 열었다.

[관심 수치: 81%

남은 시간: 1일 2시간 15분 4초]

비참한 기분으로 침대에 다이빙한 나는 우울해할 겨를도 없이 바로 다음 계획을 짜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청각적인 것도, 시각적인 것도 안 된다면…….’

아니, 애초에 몸으로 이리저리 구르는 게 안 통한다면.

더 이상의 광대짓은 의미가 없었고,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아직까진 아슬아슬하게 어떤 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더 넘어가면 반감을 사게 돼서 오히려 관심 수치가 떨어졌다.

무턱대고 말을 거는 것도, 파티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경우도 그랬다.

오늘 아침 식사 같은 경우가 이례적이었던 거지, 본래는 그랬다.

나는 노선을 조금 틀어보기로 했다.

음치박치인 내가 노래를 부를 수도, 춤을 출 수도, 그렇다고 악기를 연주할 수도 없으니 별 쇼를 다 한 것이었지만.

내가 잘 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곳보다 수배는 더 뛰어날 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마법과 신성력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선 의술도 아닌 이 학문을 중시하지 않았을 테니까.

‘대한민국 수학과 대학원생의 한을 보여주마.’

나는 튕기듯이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달려갔다. 서랍을 뒤져 종이뭉치를 두둑하게 꺼내고, 잉크병에 막 굴린 깃펜을 정신없이 휘갈겼다.

하룻밤 사이에 엉성한 소논문 하나라도 완성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랐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종이는 어느덧 새까맣게 칠해졌다.

무수한 수학 공식과 정리들이 깨알같이 새겨지며 나란히 줄을 이어갔다.

그렇게 욕을 퍼부었던 전공이 어쩌면 도움이 될 지도 몰랐다. 한동안 뻘짓만 하느라 굳어있던 머리를 악다구니처럼 쥐어짜냈다.

빙의를 했는데도 왜 전생에서 벗어날 수가 없나, 마음속에선 천불이 일었지만 별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 승부패라도 되었으면 하니까.’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창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즈음.

나는 8시간 동안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처음으로 뗐다.

‘드디어 완성이다.’

몸이 젊으니까 이렇게 이틀 밤을 새도 멀쩡하고 참 좋았다. 다크서클이 좀 내려온 것은 어쩔 수 없다만.

나는 깔끔하게 씻고 어제 달리아가 만지고 나간 모양 그대로인 침대를 정돈하는 척하며 그녀를 기다렸다.

똑똑. 노크소리가 났다.

“들어와, 달리아.”

달리아는 항상 세 번까지 노크를 하다가 답이 없으면 들어와서 날 깨우곤 했다.

한데 한 번 만에 안에서 대답이 돌아오니 놀랐는지 밖에서 주춤하는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가씨.”

그리 말하는 달리아의 시선은 깔끔하게 정리된 침구에 박혀있었다.

나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걸치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응. 오늘은 치장 좀 부탁할게. 어제 한 번 해봤는데, 영 아니더라고.”

달리아가 줄곧 침구만을 향하던 눈을 거두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유능한 하녀였다.

어제 페인트로 하루 종일 시달린 머리칼이라 상당히 해방을 외치던 스타일이었음에도, 달리아는 능숙하게 빗겨냈다.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본연의 윤기를 되찾은 머리칼은 다시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몽글거렸다.

신이 내린 달리아의 손은 이어 바쁘게 얼굴 위를 오갔다. 밤을 새느라 칙칙해진 낯빛이 옅은 화장 아래 감춰졌다.

머리는 한쪽으로 땋아 내린 뒤 가지고 있는 옷들 중 가장 단정한 옷을 입었다.

단장을 전부 마친 나는 거울 앞에 섰다.

몇 주간 거지꼴로 다녔던 탓인지 퍽 예뻐 보였다.

여긴 가인(佳人)들이 하도 많아서 그리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하얀 피부와 옅은 물빛 머리칼, 초롱초롱한 호박색 눈은 제법 봐줄 만했다.

‘어찌 된 게 생긴 것도 이리 무해한 조합이란 말이냐.’

강아지 같은 눈망울은 순둥순둥하기 그지없었고, 키도 조막만한 게 만만하게 보기 딱 좋았다.

‘크윽. 빙의를 하더라도 키 크고 늘씬한 고양이상 미녀의 몸에 하고 싶었는데.’

이런 밍숭맹숭한 인상이라니. 관종 지망생에겐 너무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물론 가혹한 현실에서도 오뚝이 마냥 사는 나란 관종은 개의치 않고 벌떡 일어났다.

“아 참, 달리아. 오늘은 일찍 가볼 데가 있어서 그러는데 샌드위치 좀 준비해줘. 나가서 먹게.”

학회에 가서 내 논문을 발표하려면 한시가 급했다.

달리아가 고개를 꾸벅이고 물러나자, 나는 새벽을 갈아 넣어 겨우 완성시킨 논문을 서류가방에 쓸어 담았다.

마지막 동아줄을 애지중지 챙기고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찰나. 반대쪽 복도에서 걸어오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좋은 아침, 미하일. 아침 먹으러 가는 거지?”

미하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 옆에 찰싹 붙어 계단 난간에 손을 올렸다.

“같이 내려가자.”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던 미하일은 곧 내 보폭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제 겨우 열 세 살 이었지만 덩치는 나랑 비슷했다.

‘흠. 이정도 사이즈라면 괜찮겠는데? 다니엘이나 노아 오빠 건 너무 클 게 뻔하고.’

나는 계단을 다 내려와서 중앙홀로 향하는 미하일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저기 미하일.”

미하일이 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봤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말씀하세요, 누님.”

미하일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기뻐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손가락을 뻗어 그가 입고 있는 재킷을 가리켰다.

“네 옷, 하루만 빌려주라.”

별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걸어 다니는 정장들이 대다수일 게 분명한 공간에 하늘하늘한 드레스는 다른 의미로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나는 관심받고 싶은 것이지, 무시당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부탁이었지만 미하일은 알겠다는 대답도 없이, 아니 그전에 일말의 주저도 없이 옷을 벗어 내게 건넸다.

오히려 얼떨떨한 기분으로 옷을 받은 건 내 쪽이었다.

미하일의 짙은 속눈썹 아래 자리한 황금색 눈동자는 당최 무슨 생각 중인 건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별일이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미하일은 몸을 돌리려다 멈췄다. 그리고 내게 한 마디를 던졌다.

아니, 무려 열 마디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되시길 빌겠습니다, 누님.”

그러고서 식당으로 가버렸다.

세상에, 세상에. 나는 내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빙의한 후로 미하일에게 들은 가장 긴 문장이었다.

서둘러 상태창을 켰다.

[관심수치: 82%

남은 시간: 15시간 20분 42초]

헉. 벌써 1퍼센트나 올랐잖아!

나는 발을 구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오늘 100퍼센트를 채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날듯이 도착한 주방에서 앤더슨 부인에게 샌드위치를 받은 뒤, 가벼운 마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왠지 오늘 예감이 좋았다.

* * *

“안됩니다.”

‘아니, 예감 좋다고 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이러기 있냐고.’

얇은 금테 안경을 쓰고 멀끔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왜요?”

“시험을 보고 결과에 따라 협회에 정식으로 등록한 사람만이 논문심사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아가씨께선 불가하십니다.”

“하지만 한 번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여태껏 발표된 적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니까요?”

“그래도 규정을 따르셔야 합니다.”

이런 고집불통 천하의 답답맨 같으니라고!

속이 탔지만 일단 타결책을 찾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났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안에 이 혁신적이고 놀라운 지식들을 밝혀, 세상도 밝히고 내 앞길도 밝혀야만 했다.

……조금 폭력적인 방법을 쓰게 되더라도.

‘안경을 부러뜨리면 앞이 잘 안 보이니까 날 못 따라오지 않을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도 이보다 마땅한 꼼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별수 없이 저 답답맨을 물리적으로 쳐서 협회에 들어갈 단계를 모색해보고 있는데, 그 주인공이 먼저 내게 다가왔다.

“시험을 보고 싶으시다면, 고사장은 저쪽입니다.”

나는 기다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마다 손에 두툼한 종이뭉치를 들고 중얼중얼 외우며 줄지어 입실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운 좋게도, 마침 오늘이 시험 날이었다.

나는 답답맨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대신에 그를 한 번 안아주는 것으로 감사를 표한 뒤, 고사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매우 다행스럽게도, 또 몹시 기쁘게도. 시험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나는 단 1점의 감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거의 책 한 권을 엮어낼 분량만큼 답을 작성해 나갔다.

‘개껌이네, 껌이야.’

시험이 종료되려면 아직 한 시간도 더 남았지만 유유자적하게 고사장을 가로질러 답안을 제출하고 퇴실했다.

별로 인기도 없는 학문인데다 난이도는 또 높아서 응시자는 많지 않았다.

내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심사결과가 하루 만에 나오니까.

결과가 나올 때까지 관종짓을 하고픈 욕구가 드릉드릉 시동을 걸어도 가만히 있었다.

이곳은 신성한 학습의 장이라 잘못 처신했다간 바로 쫓겨날 게 뻔했다.

그 예로 아까 입실하기 전 만난 답답맨이 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었다.

잠깐, 주시해?

황급히 관심 수치를 확인했다.

[관심수치: 82.5%

남은 시간: 9시간 34분 9초]

뭐야, 이 자슥 기특하게도 수치를 올려줬잖아? 나는 싱그러운 미소를 잽싸게 장착하며 답답맨에게 다가갔다.

“점심 드셨어요?”

답답맨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나는 초롱초롱한 눈을 더욱 들이밀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저었다.

“안 드셨구나아, 어머 배고프시겠다. 그럼…….”

나는 가방에서 포장된 샌드위치를 꺼내 그 앞에 내밀었다.

“저랑 같이 드실래요?”

그가 이렇다 저렇다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손을 잡고 벤치로 이끌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받아갔다.

나무 그늘은 시원했고,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분위기가 썩 괜찮았다는 뜻이다.

물론 핑크빛 말고, 그냥 대화하기에. 관종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라.

“시험이 많이 어려웠죠?”

놀랍게도 먼저 말문을 튼 이는 답답맨이었다.

나는 꼬박 밤을 샌 터라, 몹시 허기가 진 상태였기에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삼키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대답할 정신 정돈 있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녀, 풍 망 하덩데여.”

“…그럼 왜 이렇게 빨리 나오셨습니까?”

아무래도 그는 내가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일찌감치 포기하고 퇴실했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흠, 적당히 좀 뻐겨볼까. 나는 크게 한 입 베어 문 샌드위치를 꿀꺽 삼키고서 말했다.

“다 풀었으니까요.”

내 말이 헛소리처럼 들렸는지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네?”

나는 친절하게 자세한 답을 다시 주었다.

“여기서 다 풀었다는, 찍거나 빈칸으로 낸 풀었다가 아니라, 다 답을 냈다는 의미예요. 한 문제도 빠짐없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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