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구역 관종은 나야나
#1
X됐다.
나는 정말이지, 완벽하게 X됐다.
내가 평소에 고운 말을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적합한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기에.
‘망했어! 완전히 망했다고…!’
거대한 종이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단언컨대 이런 장면을 두 눈에 담게 되리라곤 모기 눈곱만큼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물론 남주란 새끼가 유별나게 재수 없고, 덕분에 갈아 마시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일곤 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처리는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놈 시원하게 따왔어요-!”
남주-였던 무언가-가 포대자루에 담겨, 달랑거리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리라곤 꿈에서조차 그려본 적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그래, 이해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러니 친절하게, 직설적으로 다시 설명해 주겠다.
남주의 모가지가 사과마냥 똑 따였단 뜻이다.
“오늘 아침에 따서 굉장히 신선해요!”
그것도 다름 아닌 여주에게.
누구보다도 그를 사랑했어야 할, 여주인공에게 말이다.
* * *
“왜 관종들은 하나같이 다 죽을까?”
내 자취방에 눌러앉은 친구 놈이 뒹굴거리다가 무심코 했던 질문.
신제우가 보고 있던 공포영화 속에서는 시종일관 나대던 한 등장인물이 막 초킬 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뭐라고 답했더라.
“그게 걔네들 역할이잖아. 적당히 어그로 좀 끌거나 발암 유발해서 시청자랑 독자들 관심 끌고, 징벌당한 후에는 통쾌감 느끼게 해주는 거. 드라마나 소설에 꼭 필요한 일종의 장치 같은 거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제우는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내밀었다.
책 표지에는 멋들어진 타이포로 「헤이즐에서 아침을」이란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로판 추천해주는 남사친은 너밖에 없을 거야.”
“그래서, 안 읽는다고?”
“아니, 고맙다고.”
나는 제우의 손에서 책을 뺏어들었다. 마침 좀 무료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다 싶어 신나게 첫 장을 넘겼다.
어느새 페이지가 반절 정도 넘어갔을 무렵, 잠시 책을 내려놓았다.
설정도 독특하고 스토리도 나름 괜찮아서 보통 같았으면 흥미진진하게 읽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다음 내용이 예측이 됐다.
“어, 나 이거 읽었었나? 내용이 익숙하네.”
“너 내가 추천해주면 열에 아홉은 맨날 읽은 거면서 안 읽었다고 우기잖아. 부실한 기억력 좀 어떻게 해 봐.”
“새끼가. 죽을래?”
나는 신제우를 한 번 째려봐주고서 다시 책을 집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줄거리가 익숙한 걸 넘어서 묘한 기시감마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등장인물들을 직접 봐오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감자칩을 입에 한가득 욱여넣으며 책장을 넘겼다.
“이거 뭐, 남주가 자기 시간을 대가로 여주 살리고 그런 거냐?”
“봤네, 봤어.”
제우가 혀를 끌끌 차며 책을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이게 어딜. 나는 짧은 다리를 뻗어 녀석을 쭈욱 밀어냈다.
“아 스포 노.”
“이미 읽은 거잖아.”
“그래도 다는 기억 안 난단 말야.”
신제우의 방해 공작을 완벽하게 차단한 뒤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씩씩하고 당찬 여주와 매력적인 주변 인물들, 여주를 따르는 귀여운 늑대와 용까지.
묘한 기시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퍽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순식간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서 나는 제우에게 책을 넘겨주었다.
받아든 책을 대수롭지 않게 두어 번 팔락인 그는 이번엔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다.
별안간 시야를 차지한 핸드폰 액정에는 또 다른 소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거 방금 네가 본 소설 연작으로 나온 건데. 볼래?”
“오, 진짜? 줘 봐.”
“근데 아직 몇 화 안 나왔어.”
“괜찮아. 여주 남주가 어떤지만 알면 되지.”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아 다음 이야기에 목말라있던 차였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에 제우의 폰을 덥석 채갔다.
연작은 ‘헤이즐에서 아침을’이 완결 나고 30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게다가 이제 겨우 초반부라, 다 읽는 데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제우에게 폰을 돌려준 뒤 나는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멍한 시선이 저절로 천장을 향했다.
형광등 두 개 중 하나는 이미 나간 지 꽤 된 터라 딱히 눈이 부실 것도 없었다.
“아, 나도 소설 속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다.”
무심결에 나온 속마음에 제우가 얼굴 위로 물음표를 띠웠다.
“왜?”
“얘네들은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어떻게든 이겨내고 해피엔딩을 맞잖아. 나 같은 소시민은 하루하루 끙끙대기 바빠서 허덕이며 겨우겨우 버텨내는 게 전분데.”
해가 진 어둑어둑한 하늘에선 연신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세찬 비가 얇은 창문을 덜컹거리도록 연거푸 때렸다.
제우는 말없이 마시던 물컵을 침대 옆 가장자리에 두었다. 곧 벽지 틈을 파고든 물방울이 컵 안으로 똑똑 떨어졌다.
한숨 섞인 내 먹먹한 목소리도 함께였다.
“아니다. 주인공이 뭐냐. 엑스트라만 돼도 좋겠다. 요즘 엑스트라는 엑스트라가 아니잖아. 자기가 주인공 자리 결국엔 꿰차는 게 대세니까…….”
물때가 넓적하게 진 천장은 보수공사를 하지 못해 오래된 고지도처럼 보였다.
나는 오늘은 또 어느 나라가 어디에 새로 탄생할지 헤아려보다가 관두었다.
“됐다, 이런 실없는 소리해서 뭐해. 애도 아니고. 그나저나 넌 집 안 가냐?”
몸을 일으켜 앉은 나는 신제우의 어깨를 툭 쳤다.
평소대로라면 책만 던져주고 갔을 녀석이, 오늘따라 내가 다 읽는 걸 기다리겠다고 버틴지라 시곗바늘은 어느새 저녁시간을 훌쩍 넘어 있었다.
하지만 제우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비가 오는 하늘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한해원. 정말 되고 싶어?”
신제우의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목소리.
서늘한 음성이 거미줄 위에 떨어져 구르는 물방울처럼 그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십 년을 넘게 봐온 소꿉친구가 갑자기 낯선 이처럼 느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소설 속으로 들어가고 싶냐고.”
하늘에서 고개를 돌린 제우의 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흉흉한 빛으로 번득였다.
“뭐야, 너 진짜 왜 그…….”
심상치 않은 기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때.
꽈르릉! 쾅!
무지막지한 천둥이 귀청을 강타함과 동시에 간당간당하던 하나 남은 전등도 팍 나가버렸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으스스한 분위기가 절로 조성되자, 나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야, 신제우. 너 빨리 집에 가.”
번개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제우의 몸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는 축객령에도 아랑곳 않고 한숨 비슷한 웃음을 옅게 내뱉더니, 내 이마를 밀어서 기어코 침대에 눕혔다.
“한숨 푹 자. 전등은 내일 와서 갈아줄게.”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 녀석은 다시 평범한 소꿉친구로 돌아왔다.
비로소 조금 안심이 된 나는 방금 전에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 했으나, 갑자기 해일처럼 졸음이 밀려오는 통에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왜… 몸이 꼼짝도 안 하지?’
밤샘에 최적화된 내 몸이었다. 자정도 되지 않았는데 잠이 온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러나 사정없이 감기는 눈꺼풀은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가지가 않았다.
이상한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평소에 몸의 피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여 일하고, 잘 때는 죽은 듯이 자는 타입이었다.
때문에 꿈같은 건 제대로 꿔 본적이 일생을 통틀어 손에 꼽았다.
그럼에도 이 날은 긴긴 꿈을 꾸었다.
게다가 그 꿈은, 몹시 기분 나쁘고 해괴하기 그지없었다.
실루엣이 흐릿한 한 여자가 나타나 다짜고짜 내게 저주를 퍼붓는 내용이었다.
[죽어. 그냥 죽어. 나는 네가 죽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눈앞에 영영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 이런 개 같은…….
나는 형체도 제대로 안 보이는 그 여자를 향해 쌍욕을 날리며 꿈에서 깼다.
제우가 다녀간 다음날, 그러니까 소름끼치는 꿈에서 깬 오늘.
“아가씨, 아침식사에 늦겠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소설 또는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차림의 하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날 일으켰다.
‘누구더러 아가씨… 미친.’
그 후는 정신 차릴 겨를도 없는 경악의 연속이었다.
물때가 그린 중세 판타지 스타일 천장이 아닌, 깔끔하고 고급스런 분위기의 조명과 방.
프릴이 가득한 공주님 침대.
내가 머리에 구멍이 뚫리지 않고서야 절대 입을 일이 없는, 하늘하늘 나풀거리는 옷.
‘X발.’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그것도 고작 10화밖에 나오지 않은.
* * *
그로부터 몇 주 후.
나는 이곳 생활에 퍽 빠르게 적응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긴 했다만.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곤 천천히 내뱉었다.
‘후,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너 이걸로 콘테스트에서 상도 받았잖아. 쫄지 말자.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 횟수가 두 자릿수로 넘어가고서야, 나는 당당히 어깨를 피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은 광장 한가운데에 위치한 단상.
사용에 딱히 제한이 걸려있는 건 아니었지만 축제 공연이나 연설, 혹은 중요한 공지사항이 있을 때에만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내가 매일같이 서는 곳이기도 했다.
한차례 심호흡한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입술이 팽창하고 침이 워터파크 마냥 튀기는 모습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원래 이걸 할 때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여러분! 저는! 입으로 악기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쩌렁쩌렁하게 선전포고까지 마치고서, 나는 왕년에 갈고닦은 비트박스 실력을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다.
이질적인 빠른 템포의 비트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한때 힙합에 미쳐서 힙찔이로 살던 시절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이래서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하기가 드라이아이스보다 더했다.
관종에겐 먹금-이하 먹이금지-이라는 규칙을 이미 알고 있는지 각자 제 갈 길 가기 바빴다.
사실 안 바쁜 사람이라고 해서 내게 관심을 주지는 않았다.
여유로움이 넘쳐날 게 분명한, 아니 딱 봐도 여유로워 보이는, 몇 시간 째 광장 분수대 옆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조차. 따분하게 하품만 연거푸 할 뿐 내 쪽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으니까.
아니, 이 정도 해괴한 소리가 들리는데 한 번쯤은 봐줄 법도 하지 않나? 내 광대짓이 불쌍하지도 않아?
나는 열이 바짝 올라 비트에 더욱 가세를 올렸다. 내가 광장 한복판에서 비트박스를 하고 있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저 내가 관종이기 때문이었다.
‘이 거지같은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