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그의 공간에 초대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성녀일 적에도 부르지 않던 공간에 나를 부른 건 필시, 이유가 있을 터.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부르신 거지.’
긴장감에 주먹을 쥔 손에 땀이 고였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오벨러스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건 천천히 이야기하자꾸나. 그보다 내가 우린 차란다. 마셔보렴.”
오벨러스가 준 차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처럼.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코마의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뺀, 아주 소소한 일상 이야기였다.
“딜리언이 전생의 기억을 찾았다지?”
“네.”
“그래, 그렇구나.”
오벨러스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예상하셨어요?”
“어느 정도는. 그 아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을 것 같았거든.”
“정말요?”
“널 만나기 위해서라면 지옥에서도 기어 올라오겠다는 녀석인데, 당연하지.”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설마 정말로 지옥에서 올라와서 다시 태어난 거예요?”
줄곧 궁금했다. 딜리언과 내가 어떻게 같은 시간대에서 만난 건지.
“아버지께선 분명 제가 시험을 통과해야 딜리언 씨의 영혼을 구원해준다고 하셨잖아요. 왜 마음을 바꾸신 거예요?”
시험을 통과하기 전까진, 절대 못 볼 것처럼 말했으면서.
“궁금했단다.”
“무엇이요?”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리 말한 오벨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잠깐 걸을까.”
때마침 찻잔을 가득 채운 차가 바닥을 보였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오벨러스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
“딜리언이 그러더구나. 기억을 잃어도, 다시 태어나도 널 사랑할 거라고.”
“딜리언 씨가…….”
“그래서 내가 물었지. 네가 딜리언을 잊고, 다시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쩔 거냐고. 그랬더니 딜리언이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상관없다고 했을 것 같아요.”
내가 아는 딜리언이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내가 더 사랑하면 된다고 했을 거예요.”
나도 그리 말했을테니까.
딜리언이 나를 잊었더라도, 그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만큼 내가 더 사랑하면 되니까.
“그리고 딜리언 씨는 자신이 있었을 거예요.”
언젠가 내가 딜리언을 다시 사랑하게 될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이.
“우린 결국 사랑하게 됐을 거예요. 그럴 운명이었는걸요.”
전생의 기억이 없어도, 서로 사랑하게 된 지금처럼.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도, 결국 사랑하게 됐을 거다.
“정답이다.”
인자하게 웃은 오벨러스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로 사랑한다는 너흴, 내가 어찌 갈라놓겠니.”
짧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은 그가 짓궂게 나를 놀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딱 맞아.”
“……감사합니다.”
결국, 천년의 사랑에 오벨러스가 두 손 두 발을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목 끝까지 얼굴을 붉힌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서글프게 울던 그때와 다르게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자연스럽게 코마를 떠올리자 어깨가 경직됐다.
“코마가 완전히 소멸했는지 궁금한 거지?”
“……네.”
분명 내 앞에서 사라졌고, 딜리언의 저주도 풀린 걸 확인했지만, 오벨러스의 입으로 확답을 듣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오벨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안심하렴.”
“그렇군요.”
덤덤하게 답하는 나를 보며 오벨러스가 물었다.
“슬펐니. 네가 키운 아이를 네 손으로 끝내서.”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는걸요.”
이번엔 내가 오벨러스에게 물었다.
“그러는 아버지야말로 후회하세요? 코마를 만들고, 세상에 풀어 악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둔 것을…… 과오라고 여기세요?”
앞장서던 오벨러스가 걸음을 멈췄다.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아니. 후회하지 않는다. 부끄럽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 아이 또한 내가 만든 창조물이니까.”
코마는 아버지가 그를 만든 것을 실수라고 여기고, 후회할 거라 믿었지만 아니다.
오벨러스는 코마가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여전히 평등하게 사랑했다.
“다만, 그 아이로 인해 너희가 고통받고 슬퍼한 일에는 책임을 느끼고 있다.”
오벨러스가 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에 작고 하얀 덩어리들이 작게 꿈틀거렸다.
“코마가 먹은 영혼이군요.”
“그래, 이 아이들은 다시 태어날 거란다.”
나는 영혼을 쓰다듬는 오벨러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때로는 아버지, 때로는 어머니.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 여러 얼굴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인간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지만 동시에 무한하다. 때가 되어 생을 마치면 죽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지.”
오벨러스의 곁에서 떠난 영혼은 빛의 문을 지나 새로이 태어났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야. 그렇지?”
“네, 그러네요.”
얼마간, 그 모습을 바라보았을까.
오벨러스가 나를 돌아보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지켜낸 것이다.”
“제가 제대로 지켜낸 걸까요.”
“그래, 아주 훌륭하게 해냈구나.”
그 다정한 손길에 속이 울컥거렸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어루만지는 그 목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험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너의 승리다. 나의 아이야.”
승리라. 결과적으로 보면 그래, 나의 승리다.
하지만 딜리언을 잃었다면, 난 시험에서 실패했겠지.
“펜던트, 일부러 딜리언 씨에게 준거죠?”
“네게 두 번이나 원망을 받고 싶진 않았거든.”
눈꼬리를 늘어트린 그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는데, 마음에 들었니?”
“감사합니다. 정말로 기뻤어요.”
나는 진심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딜리언이 내 곁을 떠났다면, 나는 모든 걸 포기해버렸을지도 몰랐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런, 감사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는데.”
곤란하다며 중얼거린 오벨러스가 내 어깨를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리아, 보렴. 동이 트는구나. 이만 돌아갈 시간이야.”
저 멀리서 새벽의 푸른빛이 몰려오고 있다.
곧이어 붉은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기다리고 있으마.”
그리 말한 오벨러스는 곧바로 덧붙였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오지 말고. 오래오래 살다가 오거라.”
“그러다가 할머니가 되어버리면요?”
“겉모습이 무슨 상관이겠니. 너는 영원히 내 아이인 것을.”
오벨러스가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하지만 다시 만난다면 그땐 조금 욕심을 낼 거란다.”
그는 아이를 안아주는 것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내 등을 토닥였다.
“그때 결정하렴. 내 사도가 될 것인지. 다시 인간이 될 것인지.”
“네?”
“대답은 다음 만남 때 듣는 거로 하자.”
내 말을 가로챈 오벨러스가 손을 놓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뒤로 넘어갔다.
“행복하게 지내렴.”
동시에 의식이 멀어졌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단다.’
언뜻 그런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 * *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이가 장난을 치듯, 머리를 만지던 손은 천천히 내려와 뺨을 쓰다듬었다. 그 다음엔 눈, 코, 입술까지.
솜털처럼 가벼운 손길에 웃음이 터졌다.
“간지러워요.”
“일어나야죠.”
“더 자면 안 돼요?”
누구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눈을 감은 채 웅얼거리자, 입술에 뜨겁고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닿았다.
순식간에 내 입술을 훔친 딜리언은 멀어지기는커녕, 입술이 맞닿은 채로 중얼거렸다.
“아침은 먹어야죠.”
“으응…….”
귀찮다고 칭얼거렸지만, 딜리언은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결국 백기를 든 건 나였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마주친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문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만히 눈만 마주치고 있어도 행복했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며 그를 바라보자, 내 머리를 빗겨주던 딜리언이 귓가에 속삭였다.
“매일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침대에, 같은 이불을 덮고, 함께 눈을 뜨는 그런 미래를 그리는 그의 이야기가 내 심장을 간지럽혔다.
나는 허리를 일으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럴 거예요. 매일매일, 오늘처럼 함께할 거예요.”
손을 뻗어 딜리언의 뺨을 감싼 나는 그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만난걸요.”
우린 다시 만날 운명이었으니까.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입을 맞추자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딜리언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아침부터 자극하는 건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요.”
“네?”
느리게 상체를 일으킨 딜리언이 내 허리를 잡아당겼다. 짙게 물든 눈이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다가왔다.
“제발 놓아달라고 울 땐 언제고.”
잔뜩 잠겨 가라앉은 목소리에 어깨가 떨렸다.
“부족했어요?”
아니, 도대체 뭐에 반응하는 건데!
“난 그런 의미로 한 게 아니거든요? 모닝키스 몰라요? 가볍게 하는 거라고요!”
“연인 사이에 가볍게가 어디에 있습니까.”
“잠깐-!”
“이미 늦었습니다.”
“아침 먹자면서요!”
“조금 이따 먹어도 됩니다.”
어떤 방법을 써도 폭주하기 시작한 딜리언은 막을 수 없었다.
딜리언의 등 너머, 벌어진 커튼 사이로 떠오르는 해가 보였다.
‘나도 모르겠다.’
환하게 타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눈을 감고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아침이 아니라 점심을 먹게 생겼지만, 뭐 어때.
즐거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