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 *
티피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리아, 또 놀러 올 거지?”
“당연하지. 매년 보러 올게.”
“정말? 약속이야!”
“응.”
나는 딜리언의 눈을 피해 티피를 꼭 껴안아 주었다.
“다음에 또 봐!”
티피의 배웅을 받아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곧장 대신전으로 향했다.
아레스트가 돌아오길 오매불망 기다리는 신수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아레스트, 가서 애들이랑 제대로 인사 나눠. 다들 네 걱정 했다고.”
“흥,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괜히 유난은.”
걱정을 끼친 게 쑥스러운지 괜스레 입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솔직하지 못하긴.’
아레스트의 그 퉁명스러운 태도는 신전에 도착해서도 그대로였다.
“아레스트!”
그를 발견한 하니샤가 울먹거리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레스트는 매정하게 몸을 피해버렸다.
“달라붙지 마. 징그럽게.”
약한 모습을 보인 게 민망한 건지, 아니면 걱정을 끼친 게 부끄러운 것인지 아레스트는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며 신수들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런다고 가만히 있을 신수들이 아니다.
하지 말라는 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그들이다.
이때다 싶어 달려들자, 아레스트가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왜, 왜 이래!”
“가족끼리 포옹 좀 하자는데 피하지 마라!”
“미친 거냐? 가족끼리 누가 포옹을 해!”
“원래 인간 가족들은 포옹을 하는 법이지.”
사미엘이 커다란 날개를 펼쳐 아레스트를 붙잡았다.
아레스트 또한 매 신수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맹금류였지만, 독수리 신수인 사미엘을 이길 수 없었다.
“악! 하지 말라고!”
“아레스트, 까칠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사미엘이 아레스트를 와락 껴안자, 하니샤와 미카도 함께 날개를 펼쳤다.
“아레스트! 살아서 정말 다행이야!”
“그래. 아레스트, 가끔은 재회의 포옹도 나쁘지 않아.”
“오랜만에 다 같이 안아보자!”
마지막으로 참전한 나단이 날개를 펼쳐 아레스트를 껴안았다.
신수들 품에 갇힌 아레스트가 몸을 비틀며 소리를 질렀다.
“아악!”
누가 보면 고문당하는 줄 알겠네. 좀 껴안았다고 죽는 소리까지 내다니.
“저 녀석도 참 한결같습니다.”
“그러게요. 부끄러움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예요.”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게 눈에 너무 잘 보였다. 펑 터지려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보기 좋지 않습니까.”
내 곁으로 다가온 에런이 흐뭇하게 웃었다. 손주들의 재롱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미소였다.
“아레스트 님이 당하고 계셔…….”
반대로 아이나는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인지, 그녀의 눈동자가 길을 잃고 떨렸다.
“전하, 리아 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힘든 일도 아니었는걸요. 그리고 좋은 일만 가득했어요.”
딜리언이 전생을 기억해냈는걸.
나는 딜리언의 손을 잡으며 싱긋 웃었다.
“그래서 그렇게 행복한 얼굴인가 봅니다.”
“……티 나요?”
“리아 님을 만난 이래 가장 행복한 얼굴입니다.”
나는 뺨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 혹시 혼인 날짜를 잡으셨나요?”
“네? 그건 아니…….”
“뭐? 혼인? 벌써?”
아이나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아레스트를 예뻐해 주던 신수들이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혼인? 호오온인?”
나단이 노발대발하며 우리를 향해 매섭게 날아왔다. 그 뒤를 신수들이 쫓아 날아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음 타깃이 딜리언이라는 것을.
“혼인이라, 그럴 때가 되긴 했지.”
“그래도 너무 이르지 않아?”
“그래! 하긴 뭘 해!”
사미엘과 하니샤, 나단이 혼인에 대해 열을 올리던 그때, 유일하게 이성을 유지한 미카가 딜리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땐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했는데, 여전하구나. 리산드로.”
“딜리언이다.”
딜리언이 이름을 정정해주자, 사미엘이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흐음.”
“흐으음.”
신수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딜리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강강술래를 하는 것처럼.
신수가 커다란 사내를 둘러싼 희귀한 광경에 신관들이 이곳을 흘끔거렸다.
갑자기 시선이 집중되자 딜리언이 눈썹을 들썩이며 신수들을 밀쳐냈다.
“리아 씨 앞을 막지 말고 비켜.”
“흠, 성격은 그대로구만.”
“괜찮아. 훤칠하게 잘생겼잖아.”
하니샤가 볼을 붉히며 딜리언의 어깨에 자리를 잡더니 그의 뺨에 머리를 비볐다.
“예전 얼굴도 참 잘생겼었는데, 이번 얼굴도 잘생겼어.”
하니샤의 눈이 반짝거렸다. 흡사 사랑에 빠진 눈이었다.
“하니샤, 정신 차려. 이런 얼굴을 한 놈들은 하나같이 얼굴값을 한다고. 이놈이 리아를 울린 거 기억 안 나?”
“아, 맞아. 그랬지.”
사미엘이 핀잔을 주자 꺄악 소리를 지르던 하니샤가 눈을 치켜뜨며 위협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리아 울리면 죽여버린다?”
“이중인격이냐…….”
내 중얼거림이 안 들리는지, 하니샤가 턱을 치켜들었다.
“카악, 아무리 잘생겨도 리아 울리면 가만 안 둬!”
금방이라도 침을 뱉을 것처럼 건들거리는 모습은 동네 양아치와 다를 게 없었다.
“리아! 저놈이 널 울리면 당장 내 신전으로 와. 내가 책임질게!”
의기양양하게 외치던 하니샤는 곧이어 들려온 딜리언의 말에 입을 쩍 벌렸다.
“흠, 누굴 닮았나 했더니 나단을 쏙 빼닮았군. 나단만큼이나 막무가내야.”
“뭐? 나단만큼이나? 그거 신수 모욕이야! 나단처럼 꽉 막힌 신수랑 나를 비교하다니!”
나단과 비교당한 게 그리도 자존심 상하는지 당장 사과하라며 하니샤가 방방 뛰었다.
가만히 있다가 공격당한 나단도 함께 뛰어올랐다.
“뭐라?! 하니샤! 꽉 막히긴 누가 꽉 막혀!”
“맞잖아! 너랑 사미엘은 아주 꽉 막혔어!”
“가만히 있는 나는 왜 건드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미카도 만만치 않아!”
“……다 같이 늙는 처지에 참 말이 많아.”
“시끄러워 죽겠네, 진짜.”
딜리언이 쏘아올린 공에 차례대로 맞은 신수들이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여러분, 여기서 싸우시면 안 됩니다.”
갑자기 한데 엉켜 싸우는 신수들에 당황한 에런과 아이나가 그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그 싸움으로부터 한발 물러난 딜리언이 내 어깨를 감쌌다.
“다들 나이를 거꾸로 먹었나 봅니다. 그렇죠?”
그렇긴 뭐가 그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딜리언의 옆구리를 찔렀다.
“일부러 그랬죠?”
“뭘요?”
“다혈질인 나단과 하니샤를 자극해서 싸움을 붙인 거잖아요.”
그리고 나단과 하니샤가 싸움이 붙기 무섭게 줄줄이 사탕처럼 모두 끌려나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기억을 모두 찾은 딜리언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노린 게 분명했다.
“잘했죠?”
역시나. 딜리언은 부정하기는커녕, 칭찬을 요구하며 요망하게 눈을 휘었다.
“헛소리를 막으려면 저 방법뿐이었습니다.”
“헛소리라면, 딜리언 씨가 절 울리면 하니샤의 신전으로 오라는 말이요?”
정답인지 딜리언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 농담이었는데, 딜리언은 아니었나 보다.
“저는 리아 씨가 울게 될 거라는 가정을 하는 것조차 싫습니다.”
딜리언이 엄지로 내 눈 밑을 문질렀다.
“눈물은 충분히 흘렸잖아요. 더는 리아 씨를 울리지 않을 겁니다.”
딜리언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행복하게 해줄게요. 항상 웃는 일만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해요.”
이렇게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했다.
“애써 노력할 필요 없어요. 딜리언 씨가 행복하면, 그게 제 행복이니까요.”
나는 딜리언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그리고 부디,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활짝 웃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딜리언이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나른한 숨을 터트렸다.
“……제가 졌습니다. 어떻게 해도 리아 씨는 못 이기겠어요.”
“그럼요. 절대 못 이기죠.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그럼 저는 평생 못 이기겠군요.”
내 손을 끌어간 딜리언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주친 붉은 눈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장담하는데 리아 씨가 절 사랑하는 것보다, 제가 더 리아 씨를 사랑할 겁니다.”
“그건 두고 봐야죠. 제 사랑도 딜리언 씨에게 뒤지지 않아요.”
“그건 그거대로 좋네요. 기뻐서 지금 당장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건 안 돼요.”
단호하게 거절하자, 그럴 줄 알았다며 딜리언이 웃음을 흘렸다.
“날이 늦었습니다. 저 바보들은 내버려 두고 저흰 이만 집으로 갑시다.”
나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 신수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서 집에 가요.”
딜리언의 손을 맞잡은 나는 그와 함께 등을 돌렸다.
해가 저문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우리는 붉게 지는 노을을 배경 삼아 발을 맞춰 걸었다.
우리의 집을 향해.
* * *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나를 반겼다. 나는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아버지.”
“왔니? 이리 오렴.”
나는 오벨러스의 맞은편에 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의 뒤로 펼쳐진 드넓은 대지에 나는 탄성을 터트렸다.
“아름답네요.”
“이곳에 온 건 처음이지?”
“네. 아버지께서 불러주신 건 처음이니까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오벨러스가 내어주는 차를 받으며 물었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