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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141)화 (141/143)

141화.

딜리언은 조용히 오벨러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가 제 뒤를 따르는 것을 본 오벨러스는 천천히 운을 띄웠다.

“네가 리아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지만 그래도 그렇지, 저주를 가져올 생각을 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무모했다며 오벨러스가 쯧쯧, 혀를 찼다.

“리아가 많이 울고 있어.”

“리아가…….”

차가운 겨울, 그 시린 날에 홀로 남은 그녀를 떠올리자 가슴이 지끈거렸다.

“몇 날 며칠을 내리 울기만 하기에 걱정이 되어 만나러 갔더니 나를 원망하더구나.”

처음 받아본 원망에 시무룩하던 것도 잠시, 오벨러스는 흐릿하던 입매를 당겨 올렸다.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기회, 라고?”

딜리언의 걸음이 멈췄다. 당황과 놀람, 그리고 희미한 희망의 빛에 오벨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라면 너는 저주를 몸에 담은 죄로 지옥에 갈 예정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짝, 오벨러스가 손뼉을 치자 나사가 풀린 것처럼 멍하던 그의 정신을 깨웠다.

“그 말인즉, 너흰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거지.”

“정말인가? 개수작은 아니겠지?”

“개수작이라니, 신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말버릇이 너무 험하다며 고개를 저은 오벨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리아는 내가 가장 아끼는 아이고, 너는 내가 첫 번째 왕으로 선택한 아이란다. 내게는 너희 둘 다 소중한 자식인데, 나라고 너희가 고통받는 걸 보고 싶을 리가.”

물론, 리아에겐 작은 시험을 하나 내긴 했지만.

속으로 그 말을 삼킨 오벨러스는 잘게 떨리는 붉은 눈을 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이리로 나가거라.”

오벨러스가 한 곳을 짚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밝은 빛이 회오리쳤다.

딜리언은 홀린 듯, 그 문을 향해 걸어갔다.

“리산드로.”

딜리언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그러자 처음 보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그를 향해 물었다.

“다시 리아를 만난다면, 너는 다시 사랑에 빠질까?”

“당연한 걸 묻고 있군.”

몇 번을 만나든, 어떤 모습으로 만나든 사랑할 거다.

내 영혼에 리아를 아로새겼으니까.

“기억을 잃어도? 이 문으로 나가면 너희는 모든 걸 잊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래도 상관없나?”

“그래.”

“그렇다면 리아도 너를 사랑하게 될까?”

“글쎄. 하지만 리아 씨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가 사랑하면 되니까.”

딜리언은 오벨러스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리아는 결국 나를 사랑하게 될 거다.”

내 영혼에 그녀를 새긴 것처럼,

그녀의 영혼에 나를 새겼으니.

“정답이다.”

따스한 온기가 딜리언을 포근하게 감쌌다.

“이만 가보거라.”

오벨러스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리아가 기다리고 있으니.”

* * *

마침내 꿈의 끝이 다가왔다.

서 있던 딜리언의 발밑이 천천히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누군가 잡아당긴 듯, 순식간에 끌려왔다.

찰싹. 매서운 손이 딜리언의 뺨을 후려쳤다.

“딜리언! 정신 차려! 눈을 뜨라고!”

찰싹!

그 손이 얼마나 아픈지 집 나갔던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딜리언, 제발 눈 좀!”

다시금 뺨을 향해 날아오는 손을 낚아챈 딜리언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리아 씨, 저 정신 차렸습니다.”

“딜리언 씨?! 정신이 들어요? 저 보여요? 제 목소리 들려요?”

누가 잡아가는 것도 아닌데, 리아가 숨 쉴 틈도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잘 보입니다. 잘 들리고요. 그리고 뺨도 아픕니다.”

기억을 찾았으니 이제 감동의 재회를 할 줄 알았건만 돌아오는 건 따귀 세례였다.

‘이게 우리답긴 하지.’

평소와 같은 일상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작 리아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말이다.

“큼, 그건 딜리언 씨를 깨우려고 그랬던 거예요……. 많이 아파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은지, 딜리언의 붉어진 뺨을 보며 리아가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바로 치료해줄게요.”

리아는 허리를 일으켜 앉은 딜리언의 뺨에 손을 올렸다.

“정말 다행이에요.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멀쩡하다고 했잖아.”

“너는 리산드로만 관련되면 흥분하는 게 문제야.”

나단과 아레스트가 주거니 받거니 쯧쯧, 혀를 찼다.

붉은 뺨을 쓰다듬으며 부기를 가라앉히던 리아는 딴청을 부리는 두 신수를 노려보았다.

리아라고 무식하게 딜리언의 뺨을 때릴 생각은 아니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딜리언이 깨어나지 않자, 또다시 제 곁을 떠난 게 아닐까 하고 덜컥 겁을 먹은 리아를 향해 두 신수가 속삭였다.

‘리아, 이제 어쩔 수 없다. 최후의 수단으로 뺨을 후려치는 거다!’

‘뭐? 하지만…….’

‘네가 고민하는 사이에 저놈이 떠나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나단과 아레스트가 옆에서 바람을 넣으며 부추기자 거기에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그 말만 믿고 뺨을 때린 나도 잘못이지만…….’

샐쭉거리는 저 눈을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너희 입 다물고 있어. 그리고 티피, 너도 다음부터 뭔가를 할 거면 나한테 알리고 해. 알았지?”

“……으응.”

리아에게 크게 혼이 났는지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티피가 딜리언에게 달려들었다.

“봤어? 봤어? 어땠어?”

시무룩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티피가 꼬리를 흔들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도대체 뭘 봤다는 건지.’

언제 저렇게 친해졌는지 저들만의 세계에 빠진 둘을 뒤로한 리아는 은근슬쩍 내빼려는 신수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어디 가려고? 설마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도망이라니!”

“리아, 어쨌든 일어나긴 했잖아. 이거 다 우리 덕이다?”

뻔뻔함을 빼면 시체라고 불리는 아레스트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리아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 죽어가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아레스트는 아주 쌩쌩 날아다니며 리아의 속을 긁어댔다.

“너 정말…….”

눈을 뾰족하게 뜨며 아레스트를 노려보던 리아는 제 손등을 덮은 온기에 고개를 돌렸다.

“딜리언 씨?”

언제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한참이 지나도 딜리언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치, 그의 눈에 리아를 새기듯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리아 씨가 성녀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요.”

“갑자기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녀라는 이유로 제 청혼을 거절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게 뭐예요.”

픽, 웃던 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커다란 눈이 딜리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딜리언 씨, 설마…….”

“기억나면 바로 말하라고 했잖아요.”

딜리언은 파르르 떨리는 리아의 눈가를 매만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번 생에서도 혼인하지 못하면 억울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그 말에 리아가 눈을 일그러트렸다.

딜리언의 기억이 돌아왔다.

그에겐 기억이 없어도 좋다고 했지만, 혼자만 과거를 추억하는 건 외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기억이, 추억이 우리의 것이 됐다.

그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감정을 참지 못한 리아가 딜리언을 와락 껴안았다.

“정말로, 다 기억났어요?”

“네.”

딜리언도 두 팔을 벌려 리아를 힘껏 껴안았다.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맞붙은 둘의 어깨에 올라탄 티피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리아. 선물이었다니까.”

“티피!”

딜리언의 품에서 벗어난 리아가 티피에게 입을 맞췄다.

“헤헤.”

쏟아지는 뽀뽀 세례에 티피가 볼을 붉히며 몸을 꼬았다.

반대로 딜리언의 얼굴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망할 도마뱀에게 선수를 빼앗긴 딜리언이 무표정한 얼굴로 티피를 집어 던졌다.

“무, 무슨, 악!”

안전하게 꽃잎에 떨어진 티피는 리아의 입술을 연신 문지르는 딜리언을 보고 눈을 흘겼다.

“아무하고 덥석덥석 입을 맞추다니, 걱정입니다.”

“티피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정령과 인간을 동일 선상에 놓으면 어떡하냐고.

리아가 변명했지만 딜리언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다.

그에겐 정령이든 사람이든, 리아의 입맞춤을 가져간 자는 제거 대상이었으니까.

“리아 씨, 기억하죠? 저 말고 다른 녀석에게 입을 맞추면 어떻게 되는지.”

알다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데!

과거의 딜리언은 지금만큼이나 질투가 심했고, 아이에게 입을 맞추는 것도 싫어했다.

축복을 내려주는 행위조차 말이다!

그 모습을 들키는 날엔 그날 밤 두 배로 시달렸다.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써먹다니……!’

리아가 주춤거리며 몸을 물렸다.

하지만 어느새 허리를 붙잡히고 말았으니.

제 허리를 감싼 단단한 손길에 볼을 붉힌 리아가 웅얼거렸다.

“아니, 보는 눈이 너무 많은데…….”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자리를 피하겠죠.”

알아서 꺼지라는 말을 예쁘게 돌려 한 딜리언이 리아의 입술을 삼켰다.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딜리언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복장이 터지는 건 나단이었다.

“저, 저!”

펄쩍 뛰는 나단 뒤로 아레스트가 썩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단, 나는 역시 저놈이 싫다.”

“나도야.”

어느새 둘의 곁에 선 티피까지.

딜리언을 흘기던 셋은 이내 자리를 피했다.

딜리언의 말마따나, 좋은 시간을 방해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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