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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140)화 (140/143)

140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 리아와 함께 지낸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긴 시간이었으나 딜리언에겐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 사는 게 아니라 기억의 발자취를 뒤따라 걷는 것뿐이었으니까.

어떤 날은 하루가 길었고, 어떤 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있었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빠르게 달리는 시간 속에 몸을 맡긴 와중에도 딜리언은 리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나으리. 곧 봄인가 봐요. 새싹이 돋았어요.”

길을 가다 밟으면 밟았지, 누구도 쳐다보지 않을 들꽃을 보고도 리아는 봄이 왔다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이때나 지금이나 한결같구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리아가 입을 연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으리.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죠.”

“리아. 또 그 얘기입니까.”

“황제가 되셔야죠. 나으리를 황제의 길로 이끄는 게 제가 해야 할 일이랍니다.”

덥석, 제 손을 잡아 온 리아가 간절하게 말했다.

“여기에서 시간을 헛되이 쓰시면 안 돼요.”

자꾸만 저를 밀어내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빌헬름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수도로 돌려보내려 하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런 점까지 똑같을 줄이야.’

비슷한 점은 이뿐이 아니었다.

“이놈! 당장 리아에게서 떨어져라!”

리아와 자신이 단둘이 있는 걸 본 나단이 바람처럼 날아와 경계했다.

‘이 관계는 조금도 변하질 않았군.’

천 년 전의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익숙했다.

“저놈의 눈이 아주 불순-읍!”

“나단! 요즘 왜 이러는 거야?”

“흥, 저놈이 너한테 흑심을 품고 있다니까.”

“너, 정말!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으리, 죄송해요.”

“맞는데.”

“네?”

“나단의 말이 맞습니다.”

그의 고백에 리아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지난 한 달간 열심히 제 마음을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던 걸까.

“리아. 저와 함께 수도로 갑시다. 그대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아…….”

“제가 황제가 되길 바란다면, 황제가 되겠습니다.”

리아의 손을 잡아 깍지를 낀 그가 미소 지었다.

“그 대신, 제 옆에 서주세요. 제가 황제가 된다면 그 옆자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리아의 뜻이 아니라도 황제가 될 생각이었으면서.

리아의 뜻대로 움직이는 척, 그녀를 속였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단도, 티피도 저를 볼 때마다 그대로라고 욕을 하는 이유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생각하는 게 똑같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리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선홍빛을 띠던 그녀의 볼이 점점 붉어졌다. 물감이 번지듯, 번져가는 붉은 기가 리아의 얼굴을 완전히 뒤덮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리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내 정신 좀 봐. 점심 준비할 시간이네! 저 먼저 가볼게요!”

그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말을 쏟아내더니 냅다 도망치는 게 아닌가.

덩그러니 홀로 남은 딜리언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곁에 남은 나단을 향해.

“별일이군. 리아를 따라갈 줄 알았는데.”

“너 정말로 리아와 함께 갈 생각이냐.”

방정맞게 조잘거리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나단이 그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리아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라면 그만둬라.”

“가벼운 마음이라……. 차라리 가벼우면 좋겠군. 그랬다면 진작에 이 성을 떠나 수도로 돌아갔을 텐데.”

딜리언은 몸을 뒤로 젖히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본래라면 보름 전에 떠났어야 했는데.’

그녀를 만난 지 일주일 만에 모든 상처를 회복했다. 눈보라도 그친 지 오래다.

하지만, 그는 자꾸만 핑계를 대며 이 성에 머물렀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제 이성 또한 외면한 채.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냐며 떠보는 리아의 마음을 모른 척했다.

조금이라도 리아와 함께 있고 싶어서.

“내 목표는 황제가 되는 것이다. 평생의 꿈이었지. 그런데 요즘은 모든 걸 그만두고 리아와 함께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네놈…….”

“리아가 함께 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쉽진 않겠지.”

“…….”

“그렇다고 리아를 홀로 두고 가자니 발이 안 떨어지는군.”

딜리언은 입을 쩍 벌린 채 굳어버린 나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널 납치해서 수도로 떠나면 리아가 따라올까?”

“이,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누가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으려고 해!”

“리아도 마음이 없는 건 아닌 듯한데.”

“이, 이……!”

이 망할 놈!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잖아! 나단이 털을 세우며 잔뜩 성을 냈다.

“아이고, 리아는 어쩌다 너를 만나서…….”

“날 주워온 게 리아인데 누굴 탓하는지 모르겠군.”

“악! 난 정말 네가 싫다!”

한탄 가득한 목소리에 딜리언은 소리 높여 웃었다.

* * *

‘제가 나으리를 황제로 만들어드릴게요.’

리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리산드로는 무너진 왕국, 조각난 나라를 한데 모아 제국으로 만들었지만 백성들은 급변한 상황에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불안해했다.

또 나라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또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백성들은 군주를 기다린 동시에, 두려워했다.

그리고 리아는 그 논란과 불안을 한 번에 잠재웠다.

리아는 유일신 ‘오벨러스’가 선택한 초대 성녀.

그리고 자신은 초대 성녀가 선택한 자.

‘리산드로 로하임. 이분이 아버지께서 선택한 군주입니다.’

리아의 뜻이 곧 신의 뜻이니라.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폐하.”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리산드로.”

조심스럽게 흘러나오는 제 이름에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 리아가 눈을 흘겼다.

“남들이 볼 땐 절대로 이름으로 안 부를 거예요. 황제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는 걸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연인이라고 생각하겠죠?”

“그게 문제라니까요. 저한테 존대도 쓰지 마세요. 하대하셔야죠.”

남들 보기 무섭다며 리아가 입을 비죽였다.

그 모습이 귀엽고, 괘씸했던 그는 혼을 내주듯 입술을 물었다.

한참이나 끈질기게 괴롭히고 나서야 리아를 놓아준 그는 타오르는 얼굴을 보며 눈을 휘었다.

“성녀에게 하대하다니, 큰일 날 소리군요.”

“그래도…….”

“제가 황제가 되면 제 옆에 서기로 했잖습니까. 황후가 되기로 한 약속, 잊었습니까.”

“……리산드로. 전에도 말했지만, 혼인은 할 수 없어요. 저는 성녀잖아요.”

성녀가 혼인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리아는 한사코 그의 혼인을 거절했다.

성녀인 제가 앞장서서 신탁을 알리며 그를 황제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와 혼인을 한다면? 신탁의 의미가 퇴색할지도 몰랐다.

그럼 자연스럽게 황제의 정통성이 입방아에 오를 거다.

이 정도로 리산드로 로하임이 무너질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작은 흠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니 저 말고 다른 귀족 가문의 여식과 혼인을…….”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황제가 당연히 후사를 봐야죠!”

“방계에서 괜찮은 아이를 데려와 후계자로 키울 겁니다.”

그는 리아가 아닌 다른 여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당신 정말…….”

“그게 싫으면 황후가 되십시오.”

하지만 끝내 리아는 그의 청혼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두 사람은 식을 올리지 않았다 뿐이지 부부와 다름이 없었다.

딜리언은 제 품에 안긴 리아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하루라도 빨리 후계를 키워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몸집을 키웠다.

그토록 원하던 황제의 자리였지만, 리아를 만난 후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황제로 군림하는 삶이 아니라 리아의 남편, 혹은 그녀를 빼닮은 아이의 아버지로 살고 싶었다.

그는 매일매일 리아와 함께하는 날을 꿈꿨다.

그리고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지 마. 가지 말아요.”

이렇게 허무하게, 리아를 두고 먼저 떠날 줄은 정말 몰랐다.

* * *

어둠을 봉인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건 리아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여긴 어디지?”

자신은 분명 죽었다.

죽음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회색빛을 띤, 텅 빈 공간은 마치…….

“공허.”

끼어든 낯선 목소리에 딜리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네가 어둠으로부터 가져온 저주의 공간이란다.”

딜리언은 어느새 제 앞에 나타난 존재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오벨러스…….”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쓰나.”

말은 그렇게 해도 불쾌해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취미 한번 대단하단 말이지.’

딜리언은 장난꾸러기 같은 아이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내 진짜 모습이 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이는 무슨, 악취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나이 먹도록 아이의 모습이라니. 신이라는 자가 이리 변태였을 줄이야.”

딜리언의 신랄한 비판에 오벨러스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이 모습이 경계를 풀기 좋거든.”

동그란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보아라, 철혈의 군주라 불리는 너도 당하고 말았잖니.”

가볍게 뻗어져 나온 손이 딜리언의 이마를 톡, 쳤다.

아프지도 않고, 기분 나쁜 손길도 아니었다.

그저, 놀라웠다. 반응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라 막을 수도 없었다.

“잠시 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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