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빛이라니.
그 말의 뜻을 이해한 나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신수에게 빛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그런 게 어딨어, 신수잖아. 신수가 이렇게 쉽게 죽으면 안 되잖아!”
격하게 부정했지만, 나도 알고 있다.
영생을 살 것 같은 신수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렇게 죽는 건 아니잖아. 이렇게 허무하게, 고통스럽게…….’
단상을 짚은 손이 떨렸다.
“리아 씨.”
다가온 딜리언이 떨리는 내 손을 감쌌다. 그 온기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만났는데,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어요.”
“그건 아레스트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눈을 떴군요.”
“뭐, 눈을 떠?”
“아레스트! 깨어났느냐!”
딜리언의 말에 신수들이 호들갑을 떨며 단상으로 몰려왔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아레스트가 초점이 나간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레스트!”
게슴츠레 눈을 뜬 아레스트가 무어라 입을 뻐끔거렸다.
“응? 뭐라고?”
귀를 바짝 가져다 대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 끄럽다. 입, 다물어…….”
한마디로 닥치라는 소리였다.
“너…….”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다는 말이 입 닥치라는 거야?
황당함에 입을 벌리던 나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성질머리 그대로인 거 보니까 아직 죽을 때 안 됐네.”
“그러게 말이다. 괜히 걱정했군.”
나단과 사미엘이 허,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레스트! 정말 너 죽는 줄 알았어!”
“하니샤. 그렇다고 달려들진 말고.”
하니샤가 아레스트에게 몸통 박치기를 할 기세로 달려들자 미카가 그녀의 앞을 막아 세웠다.
순식간에 시장 통처럼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아레스트가 눈을 찌푸렸다.
“……죽긴, 누가 죽어. 쿨럭, 잘 거니까 다들, 꺼져.”
가족이나 다름없는 신수들을 향해 거침없이 쓴소리를 날리던 아레스트의 다음 표적은 나였다.
“너는 왜 못, 쿨럭, 못생긴 얼굴로 있냐. 누구, 초상 치르냐? 죽상 하지 말고……, 너도 나가.”
“죽을 때가 돼서 그런가? 시력에 문제가 생겼군.”
내가 못생겼다는 말이 거슬렸던 걸까.
딜리언이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아니면 미적 감각이 남들과 다른가? 리아 씨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못생겼다고 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어느 놈이 주제도 모르고…… 리산드로?”
축 늘어져 있던 몸이 움찔거렸다.
“리산드로 이놈이 살아있어?”
“리산드로가 아니라 딜리언 시나이즈다.”
“……다시 태어나도 저놈의 싸가지는 그대로군.”
질린다며 중얼거린 아레스트가 다시 힘없이 늘어졌다. 잠깐 생기가 돌았던 목소리가 옅어졌다.
타이밍 좋게 끼어든 에런이 손뼉을 쳤다.
“기쁜 마음은 이해하나, 환자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좋지 않습니다. 우선 나가서 진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너도, 나가.”
“전 아레스트 님을 보살펴야지요.”
“……능구렁이 같은 놈.”
아레스트가 아무리 성질을 내고 화를 내도 에런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저게 연륜인가.’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럼,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명백한 축객령에 우리는 터덜터덜 방을 나섰다.
쾅, 닫힌 문이 야속했다.
축 처진 어깨를 감싼 딜리언이 나를 다독였다.
“아레스트가 멀쩡해서 다행입니다.”
“네, 의식을 찾아서 다행이에요.”
멀쩡은 아니지만, 눈을 뜨고 여전히 성질을 부린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그러다 문득, 아이나가 지금까지 한마디도 뱉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이나, 괜찮아? 많이 놀라서 그래?”
“아, 으응. 아레스트 님께서 기분 안 좋을 때 말을 걸었다가 혼난 기억이 있어서……. 첫 만남부터 혼나고 싶진 않거든.”
아이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도대체 얼마나 혼낸 거야……?’
아이나가 눈치를 볼 정도라니. 아주 호되게 혼이 난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의식을 되찾으셔서 정말 다행이야.”
“그러게.”
우리는 아레스트의 방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였다.
“의식을 찾았으니 좋은 징조다.”
“맞아. 괴팍한 아레스트가 벌써 신의 곁에 돌아갈 리가 없잖아.”
“어떻게든 치료할 방법을 찾아보자.”
사미엘이 운을 띄우자 하니샤와 미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레스트의 신전으로 돌아가는 거지만…….”
나단의 말에 신수들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신수들이 가지는 힘의 원천은 본인의 신전에서 나온다.
사람들의 신앙심과 신관들의 깨끗하고 맑은 마음이 합쳐서 신전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아레스트의 신전은 위에서 말한 모든 게 부서진 곳이었다.
바닥을 치는 신앙심과 부패를 일삼는 신관들.
항상 깨끗하고 신성해야 할 신전은 버려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에게 실망해 등을 돌린 아레스트.
‘코마가 노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지.’
신전이 부패하면 부패할수록 그곳에 발을 들이기 쉬웠을 테니까.
신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 아레스트는 덮쳐오는 어둠을 막을 수 없었을 거다.
이미 아레스트를 놓친 곳이다.
썩을 대로 썩어버린 그곳에서 아레스트를 치료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대신전을 믿었던 건데.’
결국, 대신전도 실패하고 말았다.
“차라리, 아버지께 부탁하면…….”
“그래! 그 방법이 있구나!”
내 중얼거림에 무언가를 떠올린 것인지 나단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방법이 있어?”
“리아, 너는 알고 있겠지. 세계의 끝, 떡갈나무가 있는 곳을.”
“설마…….”
“그래.”
그곳은 천 년 전, 코마를 봉인한 곳이었다.
그리고 나와 딜리언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그곳은 티피의 숲이었으니까.
* * *
티피의 숲.
지금의 빌헬름은 로하임 제국 국경의 끝이나, 그 당시엔 빌헬름이 세계의 끝이었다.
그 너머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으며, 때문에 누구도 개척하지 못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천 년이 지났다면? 강산이 뭐야, 세계가 변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 년 동안 어둠을 몸에 품고 있던 티피가 병이 든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연락 주시는 대로 찾아가겠습니다.”
며칠 동안 쉬지도 못하고 이동마법만 쓴 카나에의 얼굴이 핼쑥했다.
“고마워요. 카나에 씨. 그리고 미안해요.”
저러다 쓰러질까 봐 겁이 난 나는 그녀의 피로를 풀어준 후, 길을 떠났다.
오랜만에 다시 빌헬름으로 돌아온 우리는 티피의 숲을 향해 걸었다.
일행은 조촐했다.
나와 딜리언, 나단과 아레스트.
우리 넷이서 조용히 아레스트를 치료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어둠도 소멸했고, 숲도 저주가 풀렸으니 굳이 많은 인원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때 봤던 그 골렘처럼 생긴 마물이 어둠을 봉인하고 있던 겁니까?”
“네.”
급하게 오느라 과거와 티피의 숲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나는 딜리언에게 사정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그러다 어둠의 봉인이 풀리면서 완전히 저주에 걸렸지만, 그 전부터 힘은 약해지고 있었어요. 숲과 산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백 년 전에도 돌았다고 전해지거든요.”
코마의 저주를 이기지 못한 티피는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고, 백 년 전을 기점으로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을 거다.
그리고 티피가 모든 힘을 잃은 그 순간, 타이밍 좋게 렉스터와 마누스가 나타나 코마의 봉인을 풀어준 거겠지.
“혼자서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나는 티피의 몸에 박혀 있던 검은 가시를 떠올리고 눈을 찌푸렸다.
내가 너무 큰 짐을 그에게 넘긴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세상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그 결과는 티피에게 독이 되어 돌아갔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이번에도 마중 나올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내게 실망하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꼭 티피를 알아봐야 했는데.
“분명 오고말고.”
아레스트에게 내 품을 빼앗긴 나단은 딜리언의 어깨에 매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숲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생경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진짜 숲 같군요.”
“네, 건강해 보여요.”
“산꼭대기까지 전부 나무가 파릇파릇하구나.”
나는 숲을 넘어, 산 전체를 덮은 푸른 기운에 활짝 웃었다.
눈이 녹고, 봄이 찾아온 숲은 검게 썩어 죽어가던 겨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 누구도 이 숲을, 저 산을 저주받았다고 말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을 누가 욕한단 말인가.
“리아 씨, 저기 좀 보십시오.”
딜리언의 부름에 눈을 돌리자, 익숙한 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우리 집이에요.”
“그리고 여전히 박살이 난 상태고요.”
자연스럽게 우리 집이라 칭하며 흐뭇하게 웃는 딜리언과 달리 나는 아련한 얼굴로 무너진 집을 바라보았다.
저 집에서 지낸 일 년과 딜리언을 만난 일들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첫 만남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재밌었죠?”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도 다 추억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웃으면서 지내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고…….
“다시 저 집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아요. 그때처럼 재밌겠죠?”
별생각 없이 흘리듯 뱉은 말이었건만, 딜리언에겐 다르게 와닿았나 보다.
그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땅을 사버릴까요? 그리고 리아 씨가 좋아하는 예쁜 집을 지어줄게요.”
“갑자기요?”
“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저 집은 낡고 좁았으니, 아주 큰 저택을 지어서 편하게 지내면 좋겠군요.”
“그리고 다 같이 사는 거예요? 손님도 자주 부르고?”
큰 집에서 셋만 살면 적적할 것 같은데…….
그 순간, 딜리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실언입니다. 집이 커봤자 청소하기만 힘들죠. 역시 신혼집은 단둘이 지낼 만한 크기가 딱 좋습니다. 전에 살던 그 집처럼.”
“솔직히 말해요. 그냥 저랑 단둘이 있고 싶은 거죠?”
“알면서 왜 물어보십니까.”
우리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숲을 벗어나, 산을 올랐다.
“리아 씨, 발밑 조심하세요.”
“이 정도는 저도 갈 수 있어요.”
그동안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는지, 길이 난 덕분에 오르기는 어렵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리아!’
따뜻한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약속을 지키러 온 거야?’
꺄르륵,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