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철옹성처럼 단단하던 몸이 비틀거렸다.
“딜리언!”
거짓말. 꿈이야. 이건 꿈이라고.
왜, 딜리언의 심장에 가시가 박힌 거야?
왜, 피를 토하고 있는 거냐고.
“아니야. 아니라고. 안 돼!”
털썩, 커다란 몸이 무너지며 무릎을 꿇었다.
푹 숙인 고개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딜, 딜리언 씨. 정신 좀 차려봐요. 제발.”
무너지는 몸을 껴안으며 리아가 절규했다.
“안 돼. 안된다고.”
패닉에 빠져 같은 말만 반복하는 리아의 모습에 코마가 환희하며 입을 찢었다.
“하, 하하하! 그래, 리산드로! 네가 올 줄 알았다. 알고 있었어!”
“…….”
“리아, 봐. 이게 내가 너한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야. 네 앞에서 다시 한번 이 녀석의 목숨을- 커헉!”
거칠게 몸을 떨며 피를 토해낸 코마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언제 검이 박힌 거지?’
코마는 제 심장을 헤집은 검을 보다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손잡이를 잡은 단단한 팔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자 보이는 건,
“이것도, 예상했나?”
시니컬하게 웃고 있는 딜리언이었다.
“어, 어떻게…….”
“글쎄, 네가 그토록 증오하는 신이 내 편을 들어줬나 보지.”
코마의 심장에 박힌 검에서 빛이 터졌다.
“이건, 성검……!”
그의 심장을 찌른 성검과 몸 안에 맴돌고 있는 신성력이 만나, 코마를 들쑤셨다.
“으아아아악!”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에 코마가 온몸을 비틀며 바닥을 굴렀다.
“아파! 아프다고! 제발 나 좀…… 우욱!”
벌어진 입에서 주먹만 한 벌레 한 마리가 몸을 비틀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코마의 본모습이었다.
[내가, 내가 이 꼴로! 다시 이 끔찍한 모습으로 돌아와 버렸어!]
아악, 악을 지르던 코마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급히 중얼거렸다.
[몸, 몸이 필요해. 누구라도 좋으니까 몸을-!]
무엇이든 좋다. 살아서 도망칠 수 있는 몸이라면!
[내 몸! 내 거야! 내 거!]
코마는 제 앞으로 다가오는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제국을 공포로 물들인 어둠이 하찮은 벌레였다니. 놀라운데?”
새가 벌레를 낚아채듯, 빠른 속도로 코마를 잡아낸 아이나가 이를 갈았다.
“태초에 먼지였다고 듣긴 했지만, 이토록 하찮은 존재일 줄이야.”
[이거 놔! 멍청한 인간 주제에, 더러운 인간 주제에!]
아이나의 주먹에 갇힌 코마가 몸을 비틀며 그녀의 손을 깨물었다.
[미워, 인간이 미워! 전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너도, 너도, 너도!
코마가 제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죽어, 죽어!’ 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 꼴사나운 모습에 입술을 비튼 딜리언이 고개를 숙였다.
엉망으로 뒤엉킨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쿨럭.”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더는 한계였다.
균형을 잃은 몸이 무너지며 리아의 품으로 쓰러졌다.
웅웅- 귀가 울렸다.
눈꺼풀이 자꾸만 아래로 밀려 내려갔다.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그리 여긴 그때.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꽂혀 들었다.
“딜리언 씨. 내 말 들려요?”
“……리아 씨.”
“정신 놓지 말아요. 내가, 내가 지금 치료해줄게요.”
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딜리언의 가슴을 더듬었다.
‘괜찮아. 치료할 수 있어.’
상황이 좋지 않지만, 심장이 멎지만 않는다면 살려낼 수 있다.
리아는 재빨리 신성력을 풀어 딜리언의 상처를 감쌌다.
‘빨리, 딜리언이 더는 아프지 않게…….’
몇 번이고 다친 사람을 치료해봤다.
폭주한 딜리언도 치료하지 않았나. 이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분명 그래야 했다.
그런데 왜,
“왜,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왜 피가 멎지 않는 거야?
리아는 피로 흠뻑 젖은 제 손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더 많은 신성력을 풀고, 주변의 생명을 끌어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을 비웃듯, 신성력은 딜리언에게 닿자마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설마, 그때처럼…….’
천 년 전, 제품에서 죽어가던 리산드로의 모습이 딜리언의 위로 겹쳐졌다.
[아무리 신성력을 써도 소용없어! 내 저주에 찔린 이상, 걘 죽을 운명이었다고. 그때처럼 죽을 거야!]
하하하! 카랑카랑한 코마의 웃음소리에 리아가 눈을 일그러트렸다.
“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또 반복할 수는 없다고.”
리아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제 옷을 찢었다.
“우선, 지혈부터…….”
“리아 씨.”
저를 부르는 그 흐릿한 목소리에 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이 목소리를 잘 알았다.
“부르지 마세요.”
그때처럼, 그런 목소리로 날 부르지 말란 말이야.
눈물이 차올랐다. 일렁거리는 시야 때문에 딜리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로 다가온 손이 리아의 눈가를 훔쳤다.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그 손길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행입니다. 리아 씨 대신에 아플 수 있어서.”
‘다행이지. 그대 대신에 내가 아플 수 있어서.’
숨이 멎었다.
리아는 지혈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멍하니 딜리언을 바라보았다.
핏기가 사라져, 창백한 얼굴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미안합니다. 매번 울리기만 해서.”
“…….”
“웃는 얼굴만 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울리기만 하네요.”
‘늘 웃는 얼굴만 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나는 매번 그대를 울리기만 하는군.’
자꾸만 겹쳐지는 목소리에 리아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힘겹게 말을 뱉었다.
“그만해.”
“리아 씨.”
“제발, 말하지 마.”
“리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그때처럼 먼저 간다고 하지 말란 말이야.
“내 앞에서 두 번이나 죽으면 넌 진짜 개새끼야.”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다.
나 때문에 당신이 죽는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라고.
“안 죽어. 안 죽을 거야. 그렇죠?”
리아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대답을 종용했지만, 딜리언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뭐라고 대답 좀 해줘요. 네?”
“사랑해.”
점점 옅어지는 숨결 사이로 들려온 고백에 리아가 울음을 터트렸다.
“사랑해.”
딜리언은 끊임없이 사랑을 말했다.
여기서 끝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너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꼭, 그래야만 해?”
울음을 삼킨 목이 시큰거렸다. 리아는 원망을 담아 딜리언을 노려보았다.
“리아. 말해줘.”
리아는 입술을 씹었다.
죽어도 말하기 싫었다.
이 말을 하면 정말 끝일 테니까.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겠지.
느껴졌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게.
“나도…….”
신은 잔인하다.
두 번째 기회마저 이리 빼앗아가다니.
“사랑해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운명은 바꿀 수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쭉…….”
리아는 웃었다.
제 마지막 모습이 우는 얼굴이 아니길 바랐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엉망진창인 그 얼굴을 보며 딜리언은 미소 지었다.
그거면 됐다는 듯이.
그리고 이내, 눈이 감겼다.
[정말, 감동적인 사랑이네. 죽어서까지 사랑하겠다는 거야?!]
리아는 딜리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감긴 눈꺼풀은 더는 열리지 않았다.
[사랑이 그렇게 대단해? 그렇게 사랑을 좋아하면! 왜 나는 사랑해주지 않는 거야?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왜 너는!]
“……항상 궁금했어. 나는 너에게 모든 사랑을 줬는데 너는 그 사실을 모르는지.”
모든 감정을 잃은 듯, 하얗게 질린 리아가 딜리언을 품에 안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너는 내가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준 존재였어. 코마.”
그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코마가 멈칫했다.
“누구보다 너를 아끼고 사랑했어.”
[거짓말!]
“그리고 너를 사랑한 만큼, 아꼈던 만큼 네가 미워.”
코마를 바라보는 눈은 텅 비어, 그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가슴은 분노로 들끓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뜨거워질수록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리아? 리아, 왜 그런 눈으로…….]
“줄곧 생각해봤어. 네게 가장 아프고, 괴롭고, 처절한 죽음이 무엇인지.”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리아는 고개를 돌려 딜리언의 뺨을 쓸어내렸다.
싸늘한 피부에 심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어. 내게 외면받고, 외롭고 쓸쓸하게 죽는 게 너한텐 가장 무서운 죽음이 아닐까, 하고.”
너는 언제나 내 관심을 갖고 싶어 하는 녀석이었잖아.
[리, 리아.]
“난 절대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네가 죽는 모습도 보지 않을 거다.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을 거다.
어떤 시선도 주지 않을 거다.
[리아!]
애타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외면하던 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이나.”
[안 돼! 안 돼, 리아! 날, 봐! 봐야지! 성녀가 아니라 나를 보라고! 리산드로를 죽인 건 난데 왜-!]
“죽여버려.”
아이나의 손에서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툭, 바닥으로 떨어진 코마가 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웅얼거렸다.
[리……아…….]
그 애절한 목소리에도 리아는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파스스-.
부서진 가루가 바람에 휘날렸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장막이 걷혔다.
딜리언의 목과 가슴을 어지럽히던 저주도 서서히 옅어졌다.
“저주가 풀렸구나.”
“응. 풀렸네.”
나단의 말에 리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주가 풀렸다.
이제 더는 폭주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괴물이라고 외면받을 일도 없다.
저주로부터 벗어난 딜리언은 자유였다.
하지만 딜리언은…….
“으, 으윽, 흑.”
꾹, 참고 누르던 울음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더는 뛰지 않는 그의 심장에 무너졌다.
리아는 붉게 물든 셔츠를 보며 숨을 헐떡였다.
“또 이렇게 돼버렸어.”
“리아.”
“나 때문에 딜리언이 죽었어. 내가 잘못해서. 딜리언이 오기 전에 다 끝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분명 살았을 텐데.”
“리아…….”
“다 내 탓이야.”
내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코마를 빼냈다면…….
다 의미 없는 가정이다.
이제 와 후회하면 뭐 하나. 딜리언은 이미 떠났는데.
“나는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가버리면 나는…….”
리아는 딜리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딜리언의 가슴에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닿았다.
화아악!
갑자기 터져 나온 빛에 리아가 눈을 감았다.
“저건……!”
딜리언의 감싸는 황금색 빛에 나단이 놀라 중얼거렸다.
피이이-
지금껏 본 적 없는, 수많은 나비가 날갯짓하며 딜리언의 곁에 맴돌았다.
“설마…….”
리아는 빛의 근원지를 찾아 딜리언의 조끼를 더듬었다.
주머니 속에 숨겨진 줄을 잡아당기자,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그때 그 펜던트…….’
언젠가, 딜리언과 함께 구경했던 노점상에서 선물로 받은 그 펜던트였다.
그때 그 아이가 이걸 주면서 뭐라고 했더라.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야.’
그래, 고마워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분명, 도움이 될 거라는 식으로 말을…….
“쿨럭.”
아래에서 터져 나온 기침 소리에 리아가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리아 씨?”
“딜리언 씨…….”
리아는 믿을 수 없었다.
다시는 자신을 향할 리 없다 여긴 눈이 정확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건, 생명의 불꽃이었다.
“이거 꿈이에요……?”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눈물로 얼룩진 뺨을 닦아주는 손이 따뜻했다.
“이게 꿈일 리 없잖아요.”
딜리언의 말대로다. 이게 꿈일 리가.
리아는 딜리언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맞댔다.
‘따뜻하다.’
지독히도 달콤하고 선명한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