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왜 그래? 무서워?”
“……리아. 그때처럼 종말이 찾아오면 어떡하지?”
과거에 사로잡힌 듯, 아이나가 중얼거리며 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또 실패하면…….”
“내가 있잖아.”
“…….”
“네 수호천사가 여기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평소라면 죽어도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말이었다.
‘내가 먼저 이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불안으로 검게 죽어있던 아이나의 눈에 빛이 돌았다.
“네가 꼭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 같이 할 거지?”
“당연하지.”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아이나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저 구멍을 막을 거야.”
리아가 신성력으로 만들어낸 화살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확률은 반반이야. 우리 힘이 더 강하면 저 문이 닫힐 거고, 아니라면 마물에게 먹히고 말겠지.”
리아는 정확히 구멍을 조준한 후,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아이나.”
리아의 부름에 아이나가 화살 위로 제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두 사람의 신성력을 품은 화살이 구멍 안으로 쏘아졌다.
휘이이이잉.
상극된 힘이 회오리치며 뒤엉켰다.
갑작스레 열린 구멍은, 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닫혔다.
“리아, 성공이야!”
아이나가 뛸 듯이 기뻐했지만 리아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온 마물은 여전히 많았으니까.
“나단. 딜리언 씨를 도와줘.”
“넌?”
“난 저 녀석을 잡아야겠어.”
리아의 시선이 코마에게 박혔다.
한편,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곳에서 홀로 유유히 걸어간 코마가 렉스터의 앞에 섰다.
“꼴이 엉망이네. 지저분해서 만지기도 싫을 정도야.”
노골적인 비난에도 렉스터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읍! 으읍! 읍!”
“시끄럽네. 정말.”
렉스터의 입을 틀어막은 재갈을 풀어내자, 막혀있던 숨이 거칠게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왜 이제 온 거냐!”
그간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굴렀던 것이 분했는지, 렉스터가 역정을 냈다.
“하여튼 고맙다. 역시 우리는 한편이야. 자, 얼른 이 손도 풀어…….”
푸욱. 날카로운 무언가가 그의 배 속을 헤집었다.
렉스터는 배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팔이 보였다.
“너…….”
“한편은 무슨, 장기 말 주제에.”
코마가 입매를 비틀며 넋이 나간 렉스터를 비웃었다.
슈우우욱.
렉스터에게 넘겨주었던 저주가 코마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네 쓸모는 여기까지다.”
코마는 저주에 이어, 렉스터의 생명까지 빼앗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안 돼!”
렉스터는 코마의 손을 빼내려 발버둥 쳤지만, 그런다고 제 생명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만, 그……만…….”
코마의 팔을 잡은 손이 점점 말라 갔다.
바짝 마른 앙상한 가지처럼 변한 팔을 본 코마가 그의 몸에서 손을 뺐다.
그러자, 털썩- 소리와 함께 렉스터의 몸이 무너졌다.
파스스.
바닥에 부딪힌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후, 이제야 숨이 좀 트이네.”
배부른 고양감에 나른하게 웃던 코마가 몸을 뒤로 젖혔다.
촤악-!
어깻죽지에서 검은 날개가 솟구쳤다.
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검은 저주가 꿈틀거리며 코마의 얼굴을 뒤덮었다.
흰자마저 검게 물든 눈이 번들거리며 주변을 훑었다.
“어디에 있지?”
“여기야.”
비명과 괴성이 섞인 그 사이로 맑은 목소리가 정확히 그의 귀에 꽂혀 들었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리아……!”
잔잔한 호수와 같은 리아의 눈에 풍랑이 일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그녀의 손을 떠났다.
푸욱.
리아의 화살이 정확히 코마의 어깨에 꽂혔다.
그 순간, 새하얀 빛이 터지며 검은 무언가가 코마의 얼굴을 덮쳤다.
“이게 뭐야! 읍!”
[리아를 괴롭히지 마!]
퍼억!
코마의 얼굴에 몸을 들이받으며 그의 시야를 가린 까망이가 소리쳤다.
[리아는 코마 싫어해! 그러니까 그만해!]
팔 하나를 망가트린 신성력과 갑자기 덮쳐온 까망이 때문에 균형을 잃은 코마가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빠르게 균형을 되찾은 코마가 이를 으득, 갈며 제 얼굴에 달라붙은 까망이를 잡아 뜯었다.
“이 배신자 같으니.”
[배신자는 너야! 왜 자꾸 리아를 아프게 해!]
“내게서 태어난 주제에 나를 거부해?”
까망이를 노려보는 눈이 형형했다. 그 살벌한 눈빛에도 까망이는 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너랑 나는 달라. 나는 리아를 지켜주고 싶어.]
“그래?”
그 올곧은 태도에 코마는 심사가 뒤틀렸다.
분명 제 몸에서 태어났으면서 다른 태도를 보이는 분신을 완전히 짓눌러 버리고 싶었다.
“다시 내 몸으로 돌아와라. 그럼 너도 나를 이해하겠지.”
쩌억.
코마가 몸을 뒤로 젖히고 입을 벌렸다. 까망이는 가만히 몸을 맡기며 리아를 향해 활짝 웃었다.
[리아. 다음에 또 보자!]
꿀꺽.
코마의 목젖이 크게 움찔거렸다.
제 분신을 완전히 분해하려는 듯, 잘근잘근 씹던 코마가 입가를 훔쳤다.
“후, 약해빠져서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군.”
찝찝한 끝 맛에 혀끝을 차던 코마가 무섭게 가라앉은 리아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리아, 왜 그런 얼굴이야. 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
리아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시간을 잴 뿐.
하나.
“아, 날 죽이고 싶구나. 하지만, 역시 못 죽이겠지?”
둘.
“이제 그만 포기해. 네가 내 손을 잡으면 이 녀석들 전부 풀어줄 테니까.”
“셋.”
“셋? 무슨 셋?”
영문을 모를 말에 눈을 찌푸린 그때.
쿵!
누군가 심장을 두드린 것처럼 커다란 울림이 느껴졌다.
두근. 두근. 두근.
느릿하던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왜, 이러는, 쿨럭!”
피가 쏟아졌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코마는 멍하니 피로 점철된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그 순간, 낯선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걸 먹으면 넌 죽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까망이, 리아 편! 같은 편은 동료를 위해서 목숨도 버릴 수 있어.]
‘미안해. 이런 걸 부탁해서.’
[리아한테 도움 되는 일! 좋아!]
까망이가 리아의 품에 뛰어들어 행복하게 웃었다. 그와 반대로 슬프게 웃은 리아가 까망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부탁해. 그 녀석을 끌어내 줘.’
장면이 바뀌었다.
리아는 어디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아이나가 채웠다.
‘다 됐어. 어둠이 너를 삼키면 신성력이 온몸으로 퍼질 거야. 넌 어때? 리아와 내 신성력을 뭉쳐서 만든 건데 아프진 않아?’
[응, 따뜻해. 리아처럼 상냥해. 아이나도 따뜻해!]
‘네가 착한 녀석이라서 그런가 봐.’
[아이나도 착한 사람. 다정하고 상냥해!]
‘가서, 어둠의 속을 전부 헤집어버려.’
리아와 분신, 그리고 아이나. 셋의 대화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코마가 입을 벌렸다.
‘독이다!’
제 분신이 자신을 배신하고 독,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제 알겠다. 약해빠진 주제에 거침없이 달려든 이유를.
일부러 먹힌 거다. 저를 죽이기 위해!
‘젠장.’
당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목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욱신거렸다.
‘토해내야 해. 신성력이 퍼지기 전에……!’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그때.
“우웨웨엑!”
피가 쏟아졌다.
“늦었어.”
분노로 눈이 뒤집혀 까망이를 잘근잘근 씹은 탓에 예상보다 빨리 신성력이 돌기 시작했다.
“우욱, 욱!”
용암처럼 속이 들끓고 울컥거렸다.
“웩, 웩. 헉, 허억.”
그 자리에서 무너져 몸을 웅크린 코마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피를 토해냈다.
“허억, 허억.”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무너진 코마를 향해 다가온 리아가 무릎을 굽혔다.
“이만 단테의 몸에서 나와.”
“내가, 욱, 강제로 빼내면 이 녀석 정신이 망가진다고, 했을 텐데. 잊었어?”
“알아.”
“지금, 알면서…… 우욱!”
“그런데 너 말이야. 지금 단테한테 손은 댈 수 있어?”
허를 찌르는 리아의 말에 코마가 멈칫했다.
‘설마?’
코마는 깊숙이 잠들어 있는 단테를 찾아 정신을 집중했다.
곤히 잠든 단테를 찾은 그때.
[오지 마.]
단테의 주변에 새하얀 신성력이 일렁거렸다.
마치, 그를 보호하듯이.
[작은 아이를 괴롭히는 건 나쁜 짓이야.]
신성력의 정체는 코마에게 흡수당한 까망이였다.
[여기서 나가!]
자신의 일부분이면서, 제 의지를 벗어나 단테를 지키는 꼴을 보자 머리에 열이 확 뻗쳤다.
“이, 버러지 같은- 커헉!”
코마가 피를 뿜으며 헐떡거렸다.
“이제 알겠지? 이제 얌전히 나와.”
설령 일이 잘못되어 단테가 망가진다고 하더라도, 이제 멈출 수 없다.
‘그땐, 신께 빌어야겠지. 이 가여운 아이를 부디 구원해달라고.’
자꾸만 무너지려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한 리아는 얌전히 기다렸다.
코마가 단테의 몸을 버리고 뛰쳐나오기만을.
리아는 차분한 눈으로 그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그만 포기해.”
“포기? 웃기지 마. 크윽, 내가 가질 수 없으면.”
핏줄이 선 눈이 리아를 노려보았다.
“누구도 가질 수 없어!”
그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너도, 같이 가는 거야!”
리아를 향해 달려든 코마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반쯤 부서져,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인 검은 날개가 가시처럼 쏘아졌다.
절대 혼자 죽지 않겠다는, 추악한 마음이 만들어낸 공격이었다.
푸욱.
뚝, 뚝.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리아는 제 앞을 막아선 커다란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딜리언이 내 앞에 있는 거지?’
충격을 받은 머리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따라가지 못했다.
“딜리언 씨……?”
“리아…….”
쿨럭.
딜리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