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하, 하하.”
이 모든 게 허상이라니, 모두 자신을 잡기 위해 만들어놓은 판이었다니.
“X발! 놔! 리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네가!”
단테의 몸에 들어가면서 생각도 어려진 것일까?
코마는 떼를 쓰는 아이처럼 버둥거렸다.
검에 베여 피가 흘러도, 그는 리아의 등을 노려보며 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최후의 발악에도 리아는 시선 한 줌 주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단상 위만 보고 있었으니까.
“슈만.”
리아의 부름에 그가 가면을 벗었다.
그 순간, 갈색 머리카락이 사랑스러운 분홍빛으로 변했다.
“후,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털어낸 슈만이 리아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리아, 내 앞에서 뽀뽀하는 거 한 번만 더 걸려봐. 나 가만히 안 있는다.”
잘근잘근, 그림자를 지르밟은 슈만이 중얼거렸다.
“메이가 못 본 게 천만다행이지. 하마터면, 어둠이 아니라 공작 초상 치를 뻔했잖아.”
다가온 슈만이 무심하게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했다.”
“어떻게 온 거야?”
“다짜고짜 네가 납치당했대서 부랴부랴 달려왔지.”
슈만은 오늘 아침, 제게 온 연락을 떠올랐다.
‘메이 씨는 어디에 있지?’
‘다짜고짜 연락해서 뭐라는 거야. 메이 일 나갔다. 급한 일이냐?’
‘그럼 마탑주. 네가 와라.’
‘허, 내가 네 개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게?’
‘리아 씨가 납치당했다.’
‘무슨, 똑바로 설명을.’
‘아레스트 영지의 타런 거리로 와라.’
‘뭐? 야, 야!’
그게 끝이었다. 정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뚝, 연락을 끊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미친놈이 저를 놀리나 싶었겠지만, 상대는 딜리언 시나이즈다.
장난을 칠 성격도 아니지만, 리아의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달려왔더니 다짜고짜 경매의 사회자를 맡으라는 게 아닌가.
‘왜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나 했더니, 저 아이 때문이군.’
코마가 발버둥 칠 때마다 아이의 몸에 늘어나는 상처에 리아가 움찔거렸다.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홀 한가운데 렉스터를 집어 던진 슈만이 손을 풀었다.
‘제물은 준비됐고, 마법진만 그리면 되겠군.’
슈만이 바닥에 크게 진을 그렸다. 그가 진을 그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원 밖으로 걸음을 물렸다.
그곳에 남아있는 사람은 코마를 제압하고 있는 아이나뿐.
“……뭐 하는 거야.”
위협을 느낀 코마가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렀지만,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뭐 하는 거냐고!”
분노로 붉게 물든 눈이 리아를 노려보았다.
“리아! 기어코 나를 버리겠다는 거야?! 그때처럼? 두 번이나 나를-읍!”
뒤에서 뻗어져 나온 하얀 손이 코마의 입을 틀어막았다.
“항상 이런 개소리로 리아의 마음을 어지럽혔나 봐?”
머리 위에서 아이나가 싸늘하게 읊조렸다.
“입 다물고 얌전히 있어.”
“읍, 으읍.”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에 물이 차올랐다. 떨리는 눈이 퍽 가여웠으나, 그 수작에 속을 아이나가 아니었다.
인생 2회차.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동정심을 유발해도 소용없어. 리아랑 다르게 나는 이 아이와 연이 없거든.”
차갑게 일갈했으나, 그녀 또한 코마에게 몸을 빼앗긴 아이를 동정한다.
가엽고, 불쌍한 아이를 꼭 구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단테의 목숨과 제국의 평화를 저울질한다면 아이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제국을 지키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니까.
‘리아는 절대 하지 못해. 그러니까 내가 하는 거야. 내 손으로…….’
가여운 생명을 신의 곁에 보낸 죄는 평생 갚을 생각이다.
벌을 받는다면 달게 받을 것이다.
아이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됐다.”
슈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완성된 마법진에서 빛이 터졌다.
끝에서부터 차오른 황금색 빛이 빠르게 렉스터와 코마를 감쌌다.
그 순간, 코마의 발버둥이 멎었다.
‘이상해.’
언뜻 보기엔 마법이 성공했다고 착각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와 접촉하고 있는 아이나에겐 느껴졌다.
코마가 포기한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게. 날 여기까지 밀어 넣다니. 다시 태어나도 리산드로 너는 날 성가시게 해.”
순식간에 터져 나오는 삿된 기운에 아이나가 몸을 움츠렸다.
“윽.”
“그래서 죽여버리고 싶어.”
씹어내듯 뱉어낸 말은 분노로 지글지글 끓었다.
“갈기갈기 찢어서, 짐승의 먹이로 던져줄 거야.”
들썩, 코마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아이나는 온몸으로 코마를 누르며 버텨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안 돼. 못 버텨. 마법이 시전되기 전에 여길 벗어날 거야.’
아이나가 재빨리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여기서 끝내야-!’
높게 치솟은 검이 코마의 목을 노리며 꽂혔다.
닿으려는 순간,
채찍처럼 뻗어져 나온 그림자가 넝쿨처럼 아이나의 손목을 휘감았다.
“어떻게……?”
“아이나. 잊은 건 아니겠지? 여기가 내 요새라는 걸.”
코마가 아무리 약해졌다지만, 그 모든 걸 보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그가 제 입맛대로 만들어낸 요새였다.
비릿하게 웃은 코마가 손을 들어, 아래로 휘둘렀다.
그 움직임에 아이나를 휘감고 있던 그림자가 그녀를 바닥에 처박았다.
“윽!”
“여기서는 내가 왕이고, 신이야.”
꾸욱. 코마의 발이 아이나의 머리를 짓밟았다.
조금 전, 제가 당한 수모를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듯이.
아이나가 재빨리 신성력을 끌어올렸지만, 보고 있을 코마가 아니었다.
일찌감치 아이나의 패턴을 읽은 코마가 비소를 흘리며 그녀의 손에 검을 박아 넣었다.
“아악!”
“쉬, 아이나. 저길 봐.”
코마가 아이나의 머리를 잡아당겨 한 곳을 가리켰다.
바닥 아래서 무언가 꿈틀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각인형처럼 삐거덕거리던 몸이 빙글 돌아 정확히 아이나를 바라보았다.
[몸, 몸이다, 신선한 몸, 건강한 몸…….]
쥐가 파먹은 듯, 텅 빈 눈이 아이나를 노려보며 손을 뻗었다.
“널 원하고 있어.”
킬킬거리는 웃음이 귓가에 파고들었다.
“말도 안 돼…….”
제 몸을 짓누르는 힘이 사라졌음에도 아이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왜, 그때와 같은 일이…….’
멍하니 마물을 바라보던 그때, 억센 힘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이나, 정신 차려!”
“카시스 님…….”
“일어나!”
빠르게 아이나를 일으킨 카시스는 저를 향해 달려드는 마물을 베어냈다.
그러자 썩은 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 전하. 전하.]
“……윈터?”
단숨에 마물의 목을 치려던 카시스는 익숙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전하, 전하.]
그는, 공작성에서 어둠에게 잡아먹힌 제 부하였으니까.
[전하, 제, 제발, 죽여주세요…….]
하지만 인간이었을 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타르처럼 끈적한 덩어리가 뚝뚝 떨어지고, 몸에선 썩은 냄새가 풍겼다.
당연했다. 이미 죽어버린 몸이었으니까.
“어때? 쓸 만하지? 지금까지 내가 잡아먹은 사람들이야.”
코마가 다가오자 마물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 충직한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코마가 마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내 충실한 종이지.”
“너는, 정말 최악이군.”
“저주에겐 최고의 칭찬이야.”
마물의 팔을 두드린 코마가 속삭였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전부 죽여.”
코마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물로 변한 사람들이 그들을 덮쳤다.
* * *
싱크홀처럼 커다랗게 뚫린 구멍에서 마물이 쏟아져나왔다.
지금까지 코마가 잡아먹은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마물로 새롭게 태어난 그들은 코마의 명령대로 사람들을 공격했다.
“리아 씨,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딜리언 씨나 제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서로 등을 맞댄 딜리언과 리아는 달려드는 마물을 해치웠다.
리아가 화살을 쏘아 달려드는 마물을 정화하고, 그녀를 공격하는 마물을 딜리언이 베어내고.
둘은 완벽한 페어였다.
하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마물에 두 사람도 점점 지쳐갔다.
“저 구멍을 막아야겠어요.”
코마가 만들어낸 저 구멍만 막는다면 의미 없는 소모전을 멈출 수 있을 터.
“딜리언 씨.”
“여긴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이젠 말 안 해도 척하면 척.
단번에 리아가 원하는 것을 알아차린 딜리언이 막힌 길을 뚫었다.
그가 뚫어준 길로 달려간 리아는 아이나의 등을 노리는 마물을 처리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이나!”
마주 본 아이나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떨리는 눈이 꼭,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