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미끼가 있다더니 그게 렉스터였어요?”
그리고 살아있는 저주는 또 뭐야?
당황한 눈으로 렉스터를 바라보던 그때, 눈이 마주쳤다.
나를 알아보았는지 렉스터가 더 격하게 몸을 비틀었다.
“훌륭한 미끼죠. 이 요새의 위치도 알려 주었으니 말입니다.”
딜리언이 삐뚤어진 내 가면을 제대로 씌워주며 입매를 비틀었다.
“살다 보니 저 머저리가 쓸모 있는 날이 다 옵니다.”
“읍! 우웁! 우우우우!”
“……그러게요?”
생긴 것만 보면 미끼처럼 보이긴 했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꿈틀거리는 모양새를 보아, 대어를 낚을지도?
“어둠이 저 머저리를 보면 고기를 본 개처럼 달려들 겁니다.”
딜리언이 말하기 무섭게 사회자가 렉스터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등 위로 검은 저주가 선명하게 찍혀있는 게 보였다.
‘확실히, 힘을 찾기 위해서 렉스터에게 접근하겠네.’
렉스터가 몸을 흔들자, 목에 걸린 붉은 보석이 눈에 띄었다.
“딜리언 씨, 저 목걸이는 뭐예요?”
“어둠이 렉스터의 기척을 읽지 못하게 만드는 마도구입니다.”
그리 말한 딜리언이 소매를 들어 커프스 버튼을 보여주었다.
“설마? 이것도 마도구예요?”
“저주로 위치가 발각되면 일을 그르칠 테니까요.”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을 줄이야. 반드시 여기서 어둠을 잡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렉스터의 몸으로 어둠을 옮길 겁니다.”
“그 녀석이 단테의 몸을 포기할 리 없어요.”
“지금은 그렇겠죠. 하지만 언제까지고,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겁니다.”
딜리언은 확신하고 있었다.
“다 크지도 못한 아이의 몸으로는 리아 씨의 마음을 얻을 수 없으니까요.”
나를 갖기 위해서 몸을 바꿀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이 딜리언의 신경을 건드렸다.
어둠이 눈앞에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마주친 눈빛이 싸늘했다.
“이성으로서 어필할 수 없다는 게 어둠에겐 가장 큰 콤플렉스일 겁니다. 그러니 분명 새 몸을 원하겠죠.”
“……저주를 가진 렉스터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네요.”
“그렇습니다. 어둠이 렉스터를 숙주로 삼는다면 단테는 자연스럽게 풀려날 테니 더는 거리낄 게 없어지는 셈이죠.”
단테와 달리, 평생 그의 적이었던 렉스터의 목을 치는 건 거리낌이 없을 터.
‘신성력으로 억지로 뽑아낼 필요가 없으니 단테가 다칠 일도 없어.’
솔직히 놀라웠다. 단테가 몸을 빼앗기고, 내가 사라진 지 기껏 해봐야 하루하고 반나절이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작전을 세웠다고?
딜리언이 말한 작전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누가 짠 작전이에요?”
“딜리언이다.”
나단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정말요?”
“제가 쓸 만한 방법은 아니죠?”
“솔직히, 네.”
평소의 딜리언이라면 단테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곧바로 치워버렸을 테니까.
“단테를 죽이면 쉬운 일이지만, 리아 씨가 슬퍼할 테니까요.”
“…….”
“죄책감에 시달릴 얼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죄책감으로부터 나를 구하기 위해서, 딜리언은 최선을 다해 모두가 만족할 작전을 짠 것이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초승달처럼 눈매를 휜 딜리언이 다가와 입술을 훔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엔 정말 다 끝날 테니까.”
애정행각에 나단이 웩,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렉스터의 몸값은 무섭게 치솟았다.
사는 게 지루한 귀족나리들에게 살아있는 저주는 퍽 구미가 당기는 장난감인지,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사지 멀쩡하고 꽤 반반하게 생긴 얼굴이라 더 그렇겠지.’
개중엔 렉스터의 얼굴을 알아본 자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채 경매장에 잠입한 동료들이 보였다.
그 속에서 아이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만약 딜리언의 방법이 실패하더라도…….’
아이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사회자. 진짜 저주에 걸린 게 맞는지 어떻게 확인하지? 손에 색칠만 하고 저주라고 우기는 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줄 알고 준비했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사회자의 여우 가면 아래로 드러난 붉은 입술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보여드리죠.”
그가 렉스터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움켜잡았다.
“설마……?”
내 귀에 입술을 붙인 딜리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 올 겁니다.”
툭둑, 목걸이가 끊겼다.
* * *
정적이 경매장을 휩쓸었다.
한동안 이어진 고요한 분위기는 한 사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보여주긴 뭘 보여준다는 거야!”
그 외침을 시작으로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그러게, 도대체 뭐야, 아무 일도 없잖아.”
“에라이, 지금 장난쳐?”
“지금 우리한테 사기를 친-!”
쾅!
커다란 문이 뜯겨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회자를 향해 비난을 쏟아내던 사람들이 일제히 문을 돌아보았다.
“이런 뻔한 수에 내가 걸려들 정도로 멍청해 보이나?”
변성기도 오지 않은 소년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뭐야, 저 꼬마는. 까불지 말고 집에나, 컥!”
단테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코마를 향해 위협을 가하던 남자는 이내 바닥을 나뒹굴었다.
코마의 발 아래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쩍 벌렸다.
“으아악!”
콰직.
그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막을 새도 없이, 그림자가 사내를 잡아먹었다.
비현실적인 장면에 넋이 나간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에 몸이 굳은 것인지 사람들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드득, 뼈가 씹히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
“놔, 이거 놔!”
콰직, 우드득.
사람들은 도망치며 서로를 밀치고 밟고,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소란의 한가운데서 유유히 서 있던 코마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소름끼칠 정도로 생생한 장면에 리아가 숨을 삼켰다.
“리아. 방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잖아.”
즐겁게 그 장면을 바라보던 코마가 정확히 리아를 찾아냈다. 거기에 있을 줄 알았다는 것처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책망하는 목소리에 리아가 눈을 왈칵 구겼다.
“내가 미쳤냐? 네 말을 듣게.”
“너 때문에 이 사람들이 죽는 거야.”
“개소리 집어치워.”
가면을 집어 던진 리아는 제 앞에 있는 여인을 잡아먹으려는 마물을 신성력으로 부쉈다.
파스스-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제 분신을 보고 쯧, 혀를 찬 코마가 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렉스터를 이용해서 날 잡고 싶었어?”
“…….”
“내가 저 몸으로 옮겨가길 원하지?”
말갛던 얼굴이 비열하게 물들었다.
“내가 그걸 들어줄 리 없잖아.”
손톱을 세운 코마가 제 목을 긁었다.
날카로운 손톱에 베인 여린 피부에서 피가 흘렀다.
“말했잖아. 이게 네 약점인 이상 난 절대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이건 도발이었다.
자신을 흥분하게 만들어, 정신을 어지럽히려는 비열한 도발.
그걸 알면서도 리아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리아의 싸늘한 눈빛을 고스란히 받은 코마가 몸을 떨며 제 팔을 쓸어내렸다.
“그 눈빛, 나만 보는 눈빛을 기다렸어.”
희열에 물든 목소리가 떨렸다. 한껏 고양된 기분에 취한 코마는 곧이어 들려온 말에 끝도 없이 추락했다.
“듣고 있기 거북하군.”
“뭐……?”
“죽어도 사랑은 받지 못하니, 경멸 섞인 시선 한 줌이라도 받아보려는 꼴이 우습다고.”
리아의 앞을 막아선 딜리언이 비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쪽팔린 줄 알아야지.”
“너, 이 새끼.”
역으로 도발에 넘어갈 뻔한 코마가 애써 웃었다. 하지만 떨리는 입매까지는 숨기지 못했으니.
“발버둥 쳐봤자 리아 씨에게 너는 눈앞에 알짱거리는 벌레일 뿐이다.”
결국, 그 도발에 넘어가고 말았다.
“마음이 바뀌었어. 너부터 죽여야겠어.”
느긋하게 사람들을 잡아먹던 코마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딜리언을 노려봤다.
“내 힘만 되찾으면 너는!”
촤악!
단상 뒤로 솟아오른 그림자가 렉스터를 삼키려 입을 벌렸다.
기분 나쁠 정도로 더운 숨결과 피가 덕지덕지 묻은 날카로운 이에 렉스터가 비명을 질렀다.
“으읍! 읍!”
“얌전히 나와 한 몸이 되어라. 렉스터 블렌트.”
“그건 곤란하겠는데.”
콰직.
가만히 이 참상을 지켜보던 사회자가 발을 들어 그림자를 짓밟았다.
리아는 전과 달라진 사회자의 목소리에 눈을 키웠다.
이 목소리는…….
“공작, 이제 그만 치워도 되냐? 이거 은근히 마나 소비 심하다고.”
“그래.”
그 순간,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무슨!”
스르륵, 연기처럼 사라지는 사람들에 놀란 코마가 다급히 주변을 훑었다.
방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이 전부 사라졌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뭐야, 뭐냐고!”
예상치도 못한 일에 코마가 당황한 그때,
“뭐긴. 전부 허상이지.”
아이나가 코마를 덮치듯 찍어 눌렀다.
아이의 몸, 그것도 또래보다 작은 몸은 손쉽게 무너졌다.
“넌 마탑주가 만든 마법에 속은 거야.”
“마법……?”
“우릴 장난감 취급하고 갖고 놀더니, 이제 반대가 됐네?”
“성녀……!”
“철저하게 농락당한 기분이 어때?”
내가 장난감이라고? 농락당했다고?
“아니야! 누구 마음대로 나를 농락해!”
이거 놔! 코마가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댔다.
“가만히 있어.”
아이나를 필두로 달려온 성기사들이 코마의 주변에 검을 박아 넣었다.
신성력이 깃든 검이었다.
성검처럼 강한 힘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약해진 코마의 움직임을 봉쇄하기엔 충분했다.
“크윽!”
바닥에 처박힌 머리를 간신히 든 코마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키웠다.
아이나는 전부 허상이며, 마법이라 말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딜리언과 리아의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