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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128)화 (128/143)

128화.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딜리언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면 내가 허상을 보고 있는 걸까?

“절 버리고 도망치더니 이번엔 뭘 주운 겁니까.”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딜리언이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타박했다.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딜리언 씨……?”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딜리언이 내게로 걸어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 걸음에 애가 타는 건 나였다.

자리를 박차고 달려간 나는 딜리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안고 싶다. 그를 두 팔로 껴안고, 그의 목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픈 아레스트를 두고 격한 포옹을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아쉬운 대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딜리언의 향기가 가슴 깊숙이 차오르며, 안도가 몰려왔다.

안식처를 찾은 것처럼.

“진짜네. 진짜 딜리언 씨야.”

“네, 접니다. 리아 씨가 무참히 버리고 간 딜리언 시나이즈입니다.”

내가 손을 잡아주지 않은 걸 마음에 담아뒀는지, 딜리언이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버려졌다고 여길 줄 알았다니까.’

딜리언은 제 기분이 상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면서도 내 허리를 껴안은 팔은 절대 풀지 않았다.

저 모습까지 귀여워 보이다니. 나도 참 중증이었다.

“오해예요. 버리고 간 게 아니라 지키려고 그런 거예요.”

“단테를 지키려고 그런 거겠죠.”

“아니에요. 물론, 단테를 지키려고 한 건 맞지만 제가 정말로 지키고 싶었던 건 딜리언 씨예요.”

나는 진심을 다해 그의 오해를 풀어주려 했지만, 딜리언에겐 닿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 그 증거였다.

“당신을 또 잃을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코마는 나한테 해코지를 할 수 없으니 혼자 끌려가는 게 안전하다고 여겼어요.”

말을 하면 할수록 딜리언의 얼굴이 굳어갔다. 그 얼굴에 초조해진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부디,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불안했어요. 딜리언 씨가 코마에게 끌려가면 분명 죽을 것 같았어요. 그때처럼 날 두고 갈 것 같아서, 그래서…….”

“리아 씨 눈엔, 제가 어둠에게 죽을 것처럼 보입니까? 리아 씨도 지키지 못할 반푼이처럼?”

횡설수설하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딜리언 씨는 강해요. 분명 날 지켜주겠죠. 그래서 안 된다는 거예요.”

“도대체 뭐가, 해보지도 않고 단정 짓지 마십시오.”

“해봤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난 안다고요. 다 알아요.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다고!”

내 만류에도 어둠에게서 저주를 빼앗아 오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거라는 불길한 예감.

그때 느꼈던 불안하고 싸한 감각은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테르제의 탄신 연회 내내 계속해서 내 뒤를 쫓아다녔다.

“이번에도 잃으면 더는 버틸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 혼자-!”

격해진 감정에 목소리가 높아지고, 가슴이 들썩거렸다.

“내가 다 떠안고 가면 딜리언 씨는 괜찮을 테니까-!”

그때였다.

커다란 손이 내 뺨을 감쌌다. 눈 깜빡할 사이에 딜리언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입술이 맞닿았다.

나비가 내려앉듯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맞춤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자꾸 못된 말 할 겁니까.”

“모, 못된 말이라니.”

“왜 자꾸 혼자가 될 거라고 말합니까. 내가 이토록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이를 세운 딜리언이 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멋대로 끝을 생각한 나를 벌주듯이.

“읏-!”

아랫입술에 느껴지는 미미한 통증에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내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집어삼키려는 강렬한 눈빛에 민망해진 나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그게 정답이었나 보다.

딜리언이 심술을 부려서 미안하다며 다정하게 나를 어루만졌다.

차게 식었던 몸에 열이 올랐고, 반대로 불안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부드럽던 입맞춤이 어느새 거칠어졌다.

‘숨 막혀.’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낭떠러지로 밀리는 기분이었다.

“그, 그만…….”

“후…….”

간신히 딜리언을 밀어낸 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딜리언은 그 짧은 순간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턱을 들어 올린 손이 내 입술을 쓸며 괴롭혔다.

“리아 씨와 달리 저는 그때 기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딜리언을 바라봤다.

“당신을 두고 간 내가 개새끼라는 걸.”

“……그 정도는 아닌데…….”

“맞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걱정하게 만들다니, 내가 잘못했어요.”

입술을 만지던 손이 뺨을 타고 올라와 붉어진 눈가를 어루만졌다.

“두 번이나 같은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이번엔 절대 두고 가지 않아요.”

딜리언이 나를 품에 안았다. 두 번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코마도, 오벨러스가 내려준 시험도, 모든 복잡한 일을 전부 집어던지고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큼, 크음!”

눈을 감은 채 딜리언의 품에 안겨있던 나는 별안간 날아든 헛기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리아, 방해해서 미안한데, 나 여기 있거든? 그리고 얘도 있어.”

아이나가 아래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림자가 몸을 배배 꼬며 요상한 소리를 냈다.

[꺄! 꺄!]

“얘 얼굴 좀 봐. 애한테 그런 수위 높은 장면을 보여주는 건 아니라고 봐.”

아이나의 말처럼 그림자의 검은 얼굴엔 희미하지만 홍조가 보였다.

흘끔, 나를 곁눈질하던 수줍은 얼굴이 이내 희게 질렸다.

[리아……. 무서워…….]

그 말에 딜리언을 바라보니,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림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으로 찢어 죽이겠는데……?’

딜리언의 살벌한 모습에 겁을 먹은 그림자가 내 뒤로 몸을 숨겼다.

그 의존적인 모습이 딜리언의 심기를 거슬렀다.

“정말이지.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이상한 것들이 달라붙어서 큰일입니다.”

“이상한 건 아니고 음…… 얘는 까망이예요.”

누가 들어도 급조한 이름이었다.

[까망이!]

하지만 그림자는 몸을 들썩거리며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몸짓이었다.

“이젠 마물에게 이름까지 지어주는 겁니까? 그것도 어둠에게?”

“정확히는 어둠의 분신이에요.”

“그게 그겁니다.”

충족감으로 나른하게 풀렸던 눈이 순식간에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그 안에 떠오른 감정은 명백한 질투였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은 이내 내 품에 안겨있는 아레스트에게로 향했다.

“또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얘는 아레스트예요. 아레스트 신전을 지키는 신수. 나단 친구예요.”

그제야 딜리언의 눈에서 힘이 빠졌다.

“상태가 안 좋군요.”

“네. 치료를 해야 하는데 여기선 못 해요. 신성한 곳에 가야 해요.”

여기는 어둠의 요새다. 삿된 기운이 넘치는 이곳에선 아레스트를 치료할 수 없었다.

급하게 계단으로 향하던 그때, 새하얀 물체가 빠른 속도로 내게 날아왔다.

“리아!”

“나단!”

저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울컥했는지 나단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내 뺨에 얼굴을 비볐다.

“얼굴이 반쪽이 됐어!”

“반쪽이 된 건 너 같은데…….”

기껏 해봐야 하루하고 반나절인데, 나단은 일 년간 나를 못 본 사람처럼 얼굴이 해쓱했다.

“아레스트!”

“나단, 불러도 소용없어. 그동안 너무 많은 신성력을 뽑힌 탓에 완전히 의식을 잃었어.”

“코마, 그놈이 아레스트를…….”

나단이 참담한 얼굴로 아레스트를 바라보았다.

“나단, 신전에 가면 치료할 수 있지? 그렇지?”

“그래. 분명 그럴 거다.”

오랫동안 아레스트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단의 시선은 이내 내 옆에 달라붙은 까망이에게로 향했다.

“이놈은…….”

나단은 단번에 까망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분신이지만 다르구나. 그 녀석과 분리된 건가?”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까망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다.

아레스트를 미끼로 삼은 것도 몰랐고, 그저 잠에서 깨어났을 뿐이라고 했다.

“코마가 마누스의 몸을 버리면서 까망이와 의식이 끊겼을 거야. 그러면서 아예 독자적인 개체로 남은 거 같아.”

“이 녀석을 키운다고 꽤나 공을 들였을 텐데 속이 쓰리겠군.”

“우리한텐 잘됐지. 까망이는 나를 우선으로 따르고 있거든.”

먼 옛날, 그때처럼.

빼꼼, 고개를 내민 까망이가 딜리언을 흘끔거렸다. 저를 훔쳐보는 그 눈빛에 딜리언이 눈을 찌푸렸다.

“호기심이 많아서 그래요.”

“이게 말입니까?”

“코마가, 그러니까 어둠이 옛날에 그랬거든요.”

하지만 까망이는 과거의 코마와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딜리언만 보면 경계하고 질색했던 코마와 다르게 까망이는 호감을 보이며 먼저 다가갔다.

하지만 어둠이라는 말에 딜리언의 경계는 더욱 높아졌다.

“뭘 봐.”

[리아가 좋아하는 사람, 무서워.]

하지만 말만 그렇지, 까망이는 딜리언의 눈치를 보면서도 계속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리아 씨, 거슬리는데 죽여도 됩니까.”

[헉! 맞아! 못생긴 괴물 한 번에 죽였어!]

저를 죽인다는 말은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모른 척 넘긴 것인지.

까망이가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강해! 엄청 엄청 강해!]

샛노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순수한 감정에 딜리언이 제 턱을 매만졌다.

“이제 보니 어둠과는 다르군요.”

“그렇죠?”

“네, 물러 터졌습니다.”

[물러터져. 무슨 뜻이야?]

까망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랑말랑하다는 뜻이야.”

[말랑말랑? 말랑말랑! 귀여운 거!]

떨떠름한 우리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건지, 까망이는 우리 주변을 크게 맴돌며 몸을 흔들어댔다.

[나, 귀여워! 까망이 귀여워!]

까망이가 몸을 흔들면 흔들수록 딜리언의 얼굴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변했다.

“어둠이 옛날에 이랬단 말입니까?”

“그 징그러운 게 저랬다니, 나 소름 돋았어.”

아이나가 제 팔을 쓸어내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성녀와 마음이 맞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런 날도 있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작.”

처음으로 마음이 맞은 두 사람은 별종을 보는 눈으로 까망이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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