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아이나는 그동안 많이 힘들었는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한동안 훌쩍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 나 진짜 열심히 했는데. 그래서 돌아왔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어.”
나는 아이나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를 위로했다.
“힘들었겠다.”
“응. 날 못 알아보는 건 참을 수 있어. 예상했으니까. 그런데 전이랑 완전히 다른 일들이 자꾸만 터지는 거야.”
그건 아마 나 때문일 거다.
나 때문에 어둠도 깨어난 거야.
그 녀석은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을 테니까.
‘징그러운 집착이야.’
과거와 달라진 일들에 아이나는 많이 힘들었는지,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둠이라고 불리는 이상한 마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잡아먹질 않나, 악당이었던 공작은 사랑에 빠져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얌전하게 지내지. 뭐가 뭔지 모르겠는 거야.”
코를 훌쩍이던 아이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랑 공작이 운명이었다니. 초대 성녀와 초대 황제의 환생이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지금도 얼떨떨하다며 아이나가 코를 훌쩍였다.
아이나가 내게 비밀을 알려준 직후, 나도 그녀에게 내 비밀을 알려주었다.
“신기하다. 천 년을 돌아서 다시 만난 사랑이라니.”
운명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며 놀라워하던 아이나가 별안간 카시스를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공작도 알아보는데 카시스는 뭘 한 거야? 당연히 알아봐 줄 줄 알았는데. 개뿔. 걔도 몰라봤어.”
물기가 남은 목소리에 희미한 분노가 서렸다.
“근데 나 보자마자 반한 게 웃기고 귀여워서 봐줬어.”
아니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제 연인 자랑이었다.
‘이 팔불출.’
카시스나 아이나나 둘 다 사랑에 돌아버린 건 똑같았다.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은 나는 길고 긴 계단을 지나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이게 뭐야.”
“……새장?”
그래, 그건 분명 새장이었다.
천장에 박혀 길게 늘어진 쇠사슬 아래로 매달려 있는 새장.
‘진짜 악취미다.’
새의 형태를 한 신수에게 새장이라니.
아레스트에게는 퍽 치욕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레스트는 그 치욕스러움을 느낄 정신도 없어 보였다.
“으, 으으. 윽.”
아레스트는 그 새장 안에서 신성력을 뽑히고 있었다.
뽑혀 나가는 신성력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몸을 달달 떨며 괴로워하는 아레스트와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 신성력.
상반되는 그 장면은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기괴하고, 끔찍했다.
“아레스트!”
그를 부르며 새장에 손을 댄 순간,
치직-!
엄청난 빛과 함께 손이 튕겼다.
“윽.”
화상을 입은 듯 피부가 벗겨진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살이 타는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리아!”
한걸음에 달려온 아이나가 내 손을 치료했다.
아이나는 내가 또 달려 나갈까 봐 걱정인지 내 손을 꼭 잡고 새장을 가리켰다.
“리아, 주변을 잘 봐. 장막이 쳐져있어.”
그녀의 말대로였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 걸음 물러나자, 새장 주위로 검은 빛이 전류처럼 흐르는 게 보였다.
“아이나. 신성력이 없는 사람은 들어갈 수 있을까?”
“글쎄.”
모르면 해봐야지. 신성력을 거둬들인 나는 조심스럽게 새장에 손끝을 댔다.
파직-!
하지만 이번에도 내 손은 새장에서 튕기고 말았다.
“신성력이 중요한 게 아니야. 누구도 못 들어오게 막은 거야.”
곤란했다. 우리 수중엔 새장을 부술 무기가 없었다.
신성력으로 만든 활과 화살이 있었으나, 그마저도 순식간에 부서지고 말았다.
남은 방법은 두 가지다.
지금이라도 가서 해리스를 불러오거나, 아레스트가 깨어나거나.
하지만 후자는 힘들어 보였다.
“아레스트! 내 말 들려?”
“틀렸어. 정신이 망가진 거야.”
이제 겨우 만났는데, 첫 만남이 이런 모습이라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던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손이 앞으로 나아갔다.
탁, 아이나가 내 손을 잡았다.
“리아, 만지면 다쳐.”
“하지만 아레스트가 너무 아파하잖아. 손이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강제로 뜯어내면-.”
“안 돼. 절대 안 돼.”
아이나가 단호히 나를 말렸다.
“해리스 경에게 신호를 보냈어. 우리가 올라가는 것보다 빠를 거야. 그동안 뭐라도 부술 걸 찾아보자.”
“……응.”
새장으로부터 나를 멀리 떨어트린 아이나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나를 감시했다.
“리아. 너는 이쪽을 뒤져봐. 나는 저쪽으로 가볼게.”
우리는 흩어져, 새장을 부술 물건을 찾았다.
‘뭐라도 던질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지하 구석구석을 살피던 그때였다.
“리아!”
아이나가 무서운 얼굴로 나를 향해 달려왔다.
‘왜 저런 얼굴……!’
그때였다. 등 뒤로 쭈뼛 소름이 돋았다.
재빨리 뒤를 돌자, 바닥에서 솟아오른 검은 덩어리가 나를 덮칠 것처럼 달려들었다.
“리아!”
깜짝 놀라 전투 자세를 갖췄던 나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눈을 깜박였다.
통, 통, 통.
“……뭐야.”
이 공은?
위협적으로 덮칠 것처럼 굴던 것과 달리 동그란 덩어리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처치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떨떠름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것도 잠시.
달려온 아이나가 내 앞을 막아섰다.
“리아, 이게 그 분신이야. 저게 우리를 여기까지 유인했어.”
“……저게?”
눈코입이 달린 저 공이……?
통, 통, 통.
동그란 공이 위아래로 튀며 우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때랑 생긴 게 좀 다르긴 하네.”
날카롭게 날을 세우던 아이나도 당황한 눈치였다.
‘공격할 생각은 없나 본데?’
공격을 하긴커녕, 내 주변을 맴도는 저 모습은 마치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분명 저게 맞는데, 모습이 달라졌어.”
아이나도 이 모습은 처음 보는지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어둠과 연결이 끊긴 걸까? 다른 지성 없는 그림자와 비슷해.”
[리아. 리아.]
하지만 지성이 없다는 말은 틀렸다. 저 분신은 분명 나를 알아보았다.
[리아, 나 싫어? 눈, 무서워.]
아이와 같은 말투,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나는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넌 코마랑 한편이잖아. 난 코마가 싫어.”
[코마, 싫어?]
“응, 싫어. 너무너무 싫어. 날 아프게 했어.”
과장된 몸짓과 표정을 지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벌어진 손가락 틈으로 당황하는 아이나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만 보이게 입을 뻐금거렸다.
‘쉿.’
내게 계획이 있다는 걸 눈치챈 아이나는 얌전히 내가 하는 걸 지켜보았다.
“너도 날 아프게 할 거야? 너도 코마의 일부잖아.”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나는 그림자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난, 난 아니야. 나는 리아 편이야! 나도 코마 싫어!]
“정말?”
그림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날 도와줘. 너는 내 말을 아주 잘 따랐잖아.”
[응. 나 할 수 있어. 걔랑 연락 안 할게.]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코마가 봤어?”
[아니. 코마, 못 찾아와. 내가 숨겼어. 안 보여줄 거야.]
다행이다. 나는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고마워. 날 도와주는 건 너뿐이야.”
그러자 그림자가 부끄럽다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에게 색이 있다면 지금쯤 얼굴에 홍조가 가득하지 않을까.
“못 봐주겠네.”
아이나는 못 볼 꼴을 봤다며 질색했지만, 내겐 익숙한 모습이었다.
코마가 아직 흑화하기 전에 저런 모습이었으니까.
내 눈물 한 방울에 안절부절못하던 때가 있었다.
우울한 나를 웃겨주려 재롱을 부리던 때가 있었다.
내 미소에 세상을 가진 것처럼 기뻐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다 과거일 뿐이야.’
내 앞에 있는 이 녀석은 코마가 남긴 잔재일 뿐.
코마가 죽일 듯이 밉다가도 과거의 모습을 보자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런 내 감정을 깨트린 건 다름 아닌 아이나였다.
“아레스트 님을 미끼로 쓸 땐 언제고 이젠 우리 편이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이나가 그림자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윽, 악. 어지러워.]
아이나가 흔드는 대로 종잇장처럼 흔들리던 그림자가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나, 잠깐만.”
그러자 아이나가 왜 그러냐며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딱히 쟬 도와줄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닌데.’
아이나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린 사이 내 뒤로 숨은 그림자가 시무룩하게 몸을 웅크렸다.
[나는 몰라. 아무것도 기억 안 나. 나는 그냥 깨어난 것뿐이야.]
그 모습에 가증스럽다며 아이나가 그림자를 노려봤다.
“잠깐만. 진정 좀 하고.”
나는 뒤를 돌아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네가 내 편이라면 증명해 봐.”
[어떻게 하면 돼?]
“저 문을 열어줘.”
새장을 가리키자 그림자가 나와 문을 번갈아 보았다.
[그거면 돼?]
“못 하겠어?”
그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할 수 있어! 이것만 하면 리아 편 되는 거야?]
“그래.”
내 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잔뜩 신이 난 그림자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바로 열어줄게!]
폴짝, 뛰어오른 그림자가 새장을 향해 몸을 들이받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무식한 방법이야.”
아이나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코웃음을 치며 무시한 그 행위가 정답일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철컥.
끼익-.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열리지 않던 문이 몸통 박치기 한 번에 열리고 만 것이다.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아레스트를 새장에서 꺼냈다.
“아레스트!”
가까이서 보니, 아레스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미약하지만 작은 숨결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살아있어.’
그제야 굳어있던 어깨가 느슨하게 풀렸다.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아레스트를 감싼 나는 동그란 눈을 깜박이는 그림자를 향해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
[칭찬받았다! 나 너무 기뻐!]
진심이 가득 담긴 내 인사에 신이 난 그림자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이건 어쩔 거야?”
“일단 데려가도 될 거 같은데.”
잘만 구슬리면 코마의 요새를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나의 생각은 달랐다.
“뒤통수를 치면 어쩌려고.”
날카로운 아이나의 눈빛에 몸을 움츠린 그림자가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깜박였다.
“…….”
“……그래, 뒤통수를 치기보단 뒤통수를 맞게 생기긴 했어. 그래도 이건 어둠과 같은-!”
쿵!
땅이 흔들렸다.
쿠웅!
이번엔 벽이 흔들렸다.
“……아이나. 이거 무슨 소리야?”
그림자를 경계하며 거리를 벌렸던 아이나가 재빨리 내 곁에 붙었다.
“해리스 경 아닐까……?”
“해리스 씨가 걸을 때마다 땅이 울릴까……?”
“그새 몸이 불었나 봐.”
당황한 아이나가 되는대로 말을 뱉어냈다. 그야말로 헛소리 대잔치였다.
콰앙!
고막이 터질 것처럼 커다란 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입구의 문이 부서져 바닥을 굴렀다.
휘몰아치는 강한 바람에 눈살을 찌푸렸다.
“커, 커억!”
곰처럼 덩치가 커다란 마물이 피가 섞인 침을 뚝뚝 흘리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반쯤 뒤집힌 눈이 소름 끼쳤다.
“하하, 해리스 경이 아니네?”
“딱 봐도 마물이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자 덩달아 놀란 그림자가 소리를 지르며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모, 못생겼어! 내 눈! 눈 아파!]
무섭다는 것도 아니고, 못생겼다니.
갑작스러운 얼굴 평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일단 얘가 부른 건 아니네. 같은 편한테 딜 넣는 거 봐. 진심이야.”
아까부터 산통을 깨부수는 호들갑에 아이나가 이마를 짚었다.
“……리아. 얘 진짜 뭐 하는 녀석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숨이 멎었다.
그리운 목소리에 심장이 뛰었다.
쿠웅!
마물의 육중한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마물의 목에 검을 찔러 넣은 딜리언이 예쁘게 웃었다.
“거슬리는데 죽여도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