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차 괴물 공작이 나를 아내로 착각한다 (126)화 (126/143)

126화.

벽에 기댄 채 앉아있던 아이나가 몸을 일으켰다.

“정말 너야?”

“어떻게 알았어?”

나는 쓰고 있던 토끼 가면을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정말이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어쩌다 갇힌 거야? 어둠의 흔적을 쫓다가 잡혔어?”

“……응. 함정에 빠졌어.”

감옥에 갇힌 게 민망한지 아이나가 붉어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하지만 민망함도 잠시. 창살을 잡아 얼굴을 바짝 들이민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리아, 오면서 그거랑 마주친 적 없어?”

“그거라니? 마주친 건 아까 그 문지기가 다야. 뭐가 또 있어?”

“그림자, 어둠의 분신 말이야.”

나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데.’

보이는 거라곤 쓰러진 문지기뿐이었다.

“내가 쫓던 그림자는 꼭두각시인 다른 그림자와 다르게 자아가 있어. 어둠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거든.”

아이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함정을 파서 여기로 유인할 정도로 똑똑하고 영악한 녀석이야.”

창살 사이로 손을 뻗은 아이나가 내 팔을 밀었다.

“리아, 우선 여기서 벗어나. 여긴 위험해.”

“안 돼. 너도 같이 가야 해.”

아이나는 이번 대의 성녀다.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만약, 악의 계략에 빠져 성녀를 잃는다면 큰 혼란이 찾아오겠지.

“아이나. 네 사명과 내 사명은 별반 다르지 않아.”

악인 어둠을 소멸시키고, 제국을 지키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내가 지켜야 할 대상엔 분명, 아이나도 포함되어 있다.

“그걸 다 떠나서 너는 내 친구잖아. 반대로 내가 너처럼 갇혀 있으면, 그땐 날 두고 갈 수 있어?”

“그럴 리가, 당연히 구해야지!”

냉큼 고개를 젓던 아이나가 아차, 하며 입술을 말았다.

“하지만, 우리처럼 갇히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란 말이야. 그 녀석이 노리는 건 너라고.”

“우리……? 설마, 다 같이 잡힌 거야?”

때마침 조금 떨어진 곳에서 키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해리스 님, 여기에 계셨습니까.”

“키라. 여전하구나. 좀 더 놀란다거나, 안도해줄 수는 없을까.”

“충분히 놀라고 안도했습니다.”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이나와 마찬가지로 갇혀있는 그를 발견했다.

“해리스 씨?”

“리아 씨,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해리스 씨는 썩 좋아 보이진 않네요.”

“하하, 그렇긴 하죠.”

갇혀 있긴 해도 손발이 자유로운 아이나와 달리 해리스는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있었다.

“난동을 좀 부렸더니, 이 꼴이 돼버렸네요.”

내 시선을 읽은 해리스가 멋쩍게 웃었다.

“리아 씨, 염치없지만 도와주시겠습니까?”

“……리아 님? 리아 님이십니까?”

“파비안 경?”

해리스 옆방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파비안이었다.

그리고 파비안도 해리스와 마찬가지로 손과 발이 묶인 상태였다.

“리아 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네, 네에…….”

뭐지. 이산가족 상봉 같은 이 분위기는.

격하게 나를 반기는 파비안의 태도가 영 어색했다.

“일단, 나와서 이야기하죠.”

아이나의 앞으로 다가간 나는 창살을 붙잡아 흔들었다.

‘또 그 마도구야.’

내 신성력을 모조리 막아버린 족쇄와 같은 마도구였다.

‘나처럼 꼼짝도 못 하고 잡혀 있었던 거네.’

나는 단단하게 잠긴 자물쇠를 매만졌다.

‘열쇠가 필요한데…….’

감옥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내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키라가 때려눕힌 그 문지기였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 주머니를 뒤졌다. 껌과 담배 등 자잘한 물건을 집어 던진 나는 눈을 찌푸렸다.

‘분명 열쇠가 있을 텐데.’

바지까지 벗겨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내 곁으로 다가온 키라가 내 손을 말렸다.

“리아 님. 더러운 건 제가 만질게요.”

키라가 거침없이 문지기의 허리춤을 잡았다.

“어떻게 할까요? 발가벗겨서 던져버리실 건가요? 아니면, 잘라-”

“큼, 큼! 그게 아니라 열쇠가 없어서 그래.”

“열쇠라면 여기에 있습니다.”

키라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열쇠 꾸러미에 입을 뻐끔거렸다.

“어디서 났어?”

“문지기를 기절시키면서 슬쩍했죠.”

허어. 나는 헛숨을 뱉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뒤져도 열쇠가 안 나오지.

저 당당한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키라는 손도 빠르네.”

“암살, 아니 하녀의 기본 소양이죠.”

재빨리 말을 바꾸고 모른 척하는 그 얼굴에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잘했어. 우선 아이나부터 열어줘.”

다행히 일은 순조롭게 풀렸다.

철컥.

감옥 문이 열리기 무섭게 달려 나온 아이나가 나를 껴안았다.

“리아, 고마워!”

“그래, 그래. 인사는 나중에 하고 얼른 나가자.”

얼른, 성기사단을 구해서 함께 나가야지. 하지만 아이나는 이런 내 마음과 전혀 다른 행동을 했다.

“미안, 리아. 구해준 건 고맙지만 나는 아레스트 님을 구하러 가야 해.”

“잠깐, 아레스트가 여기에 있어?”

나는 깜짝 놀라 아이나의 손을 붙잡았다.

“아레스트 님을 구하러 왔다가 함정에 빠진 거야. 그 녀석이 아레스트 님을 미끼로 썼거든.”

그 당시를 떠올린 아이나가 입술을 씹었다.

‘신전에 있어야 할 아레스트가 여기에 있다고?’

당황하던 그때, 다시 한번 신성력이 느껴졌다.

‘아이나의 신성력이 아니었어.’

아이나가 갇혀 있던 감옥엔 신성 억제가 걸려있다. 절대 신성력이 흘러나올 수가 없어.

마도구의 억제를 뚫고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건 신성한 존재인 신수뿐.

“좋아. 같이 가자.”

키라에게 열쇠를 맡긴 나는 그녀에게 당부했다.

“키라, 갇힌 사람들을 전부 풀어주고, 이 문을 막아줘.”

“네? 하지만.”

“다 같이 가는 게 안전하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한시가 급해. 그리고 아이나와 나는 어둠과 상극이니까 안전할 거야.”

오히려 걱정되는 건 키라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열쇠를 받아든 키라가 결연한 눈으로 내게 말했다.

“제게 맡겨주세요.”

“고마워. 부탁할게.”

나는 신성력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아이나를 이끌었다.

“이쪽이야.”

아레스트는 이 감옥 지하에 있어.

* * *

지하 감옥 한편에 숨겨진 문을 찾아낸 우리는 지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우리를 맞이한 건 가파른 계단과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끝없는 펼쳐진 어둠은 마치 우리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아이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횃불이 있어야겠어.”

“괜찮아. 없어도 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비들이 날갯짓하며 어두운 지하를 밝혔다.

“대단하다.”

“너도 할 수 있잖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아이나가 손을 내저었다.

“장소가 신전이라면 모를까, 어둠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쓰긴 힘들지.”

손가락에 앉은 나비를 바라보며 아이나가 중얼거렸다.

“세계의 거대한 흐름이 한낱 인간을 따를 리가 없잖아.”

나비를 바라보던 아이나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래서 단번에 네가 특별하다는 걸 알았어. 세상이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게 보였거든.”

그 말에 나는 멋쩍게 목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힘을 그대로 받았네.’

다시 태어나면서 모든 힘을 잃을 줄 알았는데, 내 힘은 그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아직 그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겠지.’

오벨러스는 시험이라 말했지만, 이건 그가 준 기회였다.

절대 놓칠 수 없지.

“가자.”

나비의 도움으로 어둠을 몰아낸 우리는 달렸다.

깊이 들어갈수록 삿된 기운이 짙어졌다. 그 사이로 희미한 신성력이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끓는 분노가 함께 느껴졌다.

“……아레스트가 엄청나게 화내겠는데.”

“그러게. 아레스트 님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 싫어하시잖아.”

“맞아. 어두운 곳은 더 싫어하고.”

여긴 아레스트가 싫어하는 걸 모두 모아둔 곳이었다.

“자존심 강한 분이 답답하시겠지.”

아레스트를 주제로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당연하지. 자존심이 좀 세? 나오면 가만 안 있을걸? 깨끗한 곳에 갇혀 있어도 자존심 상하는데 더러운 곳에 미끼 취급이라니.”

“우리 나중에 전부 다 혼나겠지? 큰일이네. 아레스트 님 화나시면 엄청 무섭잖아.”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잔소리 한 시간은 기본인데. 귀마개부터 준비해야겠다.”

그 순간, 나는 발을 멈췄다.

“리아?”

“어떻게 알았어?”

내 물음에 앞장서던 아이나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깜박였다.

“뭘?”

“전부 다. 아레스트가 더럽고 지저분한 곳을 싫어하는 것도, 자존심이 센 것도, 잔소리가 기본 한 시간인 것도 말이야.”

“……친해져서. 그래서 알았어.”

“거짓말.”

나는 단번에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아레스트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가 성녀든 대신관이든 말이다.

신의 사랑을 받는 나도 그의 마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그런데 아이나가 그 짧은 시간에 아레스트의 마음을 열었다고?

‘여기가 소설 속 세계였다면 주인공 버프라고 믿었겠지.’

나는 분명 아이나가 주인공인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었지만, 이곳은 소설 속이 아니다.

‘내가 소설이라고 믿은 것뿐이지.’

여기는 모두가 살아있는 하나의 세계였다.

오벨러스는 내가 돌아올 세계를 보여준 것이었다. 내 고향을.

그렇다면 나는 미래를 본 것인가?

‘아니. 이미 일어난 일이야.’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녀보다 높은 계단에 있었기에, 그녀의 흔들리는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이나. 뭘 숨기고 있는 거야?”

“…….”

“다 알고 있었지?”

분명 다 알고 있었을 거다.

카시스가 위협에 빠지는 것도, 슈만이 저주받은 물건을 만져서 저주에 걸린다는 것도.

그래서 막은 거다. 그리고 내가 아는 이야기가 비틀렸고.

“다시, 돌아왔니?”

그 순간, 아이나의 숨이 멎었다.

“돌아왔구나. 기회를 얻은 거야. 그렇지?”

확신하는 말에 아이나가 체념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하면, 믿을 거야?”

“응. 믿어.”

나도 다시 태어났으니까.

몇 번이고 돌고 돌아, 결국 이곳으로 돌아왔으니까.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겠어.”

“리아……!”

아이나가 내 몸을 와락 껴안았다.

“역시 너는 내 천사님이야!”

“이걸로 천사까지야.”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고생했어. 혼자서 힘들었겠다.”

이전 생도, 그리고 이번 생도.

홀로 모든 걸 떠안아야 했을 그녀를 힘껏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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