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쿨럭! 컥!”
코마가 울컥 피를 쏟아냈다.
덜덜 떨리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자, 리아의 싸늘한 눈과 시선이 얽혀들었다.
“리아…….”
하지만, 리아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코마가 아닌, 그의 뒤로 일렁거리는 문을 향해.
멍하니 리아를 바라보던 코마는 힘겹게 시선을 내렸다.
“……저 머저리가.”
그 잠깐을 못 버티고 당하다니.
리아의 발밑에 깔린 렉스터가 애벌레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그 꼴사나운 모습에 코마가 눈을 왈칵 구겼다.
“내가 이렇게 갈 줄 알아?!”
코마가 몸을 들썩이며 딜리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옥 길동무라도 만들 작정인지 그 손길이 질척하다 못해 끈적거렸다.
“치워, 내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건 리아 씨뿐이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코마의 손을 쳐낸 딜리언이 입술을 비틀었다.
“리아 씨가 왜 너를 끔찍이도 싫어했는지 알겠군. 나라도 질리겠어.”
“너!”
“이봐.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 없어.”
언젠가 메이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날려주자 코마가 발악하며 몸을 비틀었다.
“아, 너는 애초에 인간이 아니지. 리아 씨가 주웠을 땐 먼지나 다름없었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상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군.”
역시, 지옥의 주둥아리다. 딜리언은 웃는 얼굴로 코마의 속을 박박 긁었다.
“이, 자식이! 죽여버릴 거야!”
코마가 딜리언을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잔뜩 힘을 준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난 이렇게 안 죽어, 안 죽는다고!”
코마의 지독한 발악에도 리아는 시선 한 번을 주지 않았다.
그저 신성을 증폭시켜 만들어낸 화살로 문을 겨눌 뿐.
“나단. 지금이야. 결계를 닫아.”
* * *
“지젤, 준비하거라.”
나단이 눈을 감고 지젤에게 명했다.
소란 속에서도 지쳐 잠들어 있는 단테를 구석에 눕힌 지젤이 비녀를 뽑으며 크게 심호흡했다.
‘나단, 너는 지젤과 함께 결계를 닫으러 가. 우리에겐 마도구가 없으니까 너랑 내가 신성력으로 대화하는 방법뿐이야.’
‘그리고 지젤, 제가 신호하면 결계를 닫으세요. 반드시 닫아야 해요. 실패하면 어둠이 도망칠 거예요.’
‘단번에 성공해서 단테를 아프게 한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고요. 그리고 렉스터도 잡아다 줄게요.’
‘그러니 지젤. 꼭 성공해야 해요. 결계를 닫을 수 있는 건 당신뿐이에요.’
시나이즈의 피를 이은 사람만이 결계에 손을 댈 수 있다.
‘내가 실패하면 모든 게 엉망이 될 거야. 반드시 성공해야 해.’
제 손을 잡고 피로를 회복시켜 주던 리아의 따뜻한 체온이 아직도 제 곁에 맴도는 듯했다.
‘그동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뒤늦은 후회가 그녀를 덮쳤다.
“지젤, 지금이다.”
하지만, 그 후회도 살아남았을 때 할 수 있다. 지젤이 결계 안으로 열쇠를 집어넣었다.
달그락거리는 열쇠를 돌리려던 그 순간.
푸욱!
날카로운 손이 지젤의 배를 관통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쿨럭, 역류한 피가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제 배를 뚫고 나온 손의 주인을 알아차린 지젤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쏟아졌다.
“어, 어떻게…….”
둘을 향해 씨익 웃은 말간 얼굴이 이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 아…….”
“지젤! 정신 차리거라, 지젤! 결계를 닫아야 해, 지젤!”
나단이 어떻게든 결계를 닫기 위해 지젤의 팔을 끌어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지젤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 * *
슈욱-!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문을 통과했다.
새카만 어둠으로 덮여있던 문 뒷면이 번쩍, 하고 빛났다.
그 짧은 순간, 마주친 수십 개의 눈동자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전부 마물의 눈이야…….’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타악, 소리를 내며 꽂힌 화살이 이내 펑, 터졌다.
쿠쿠쿠쿵-!
엄청난 흙먼지를 일으키며 문이 무너졌다.
동시에 딜리언이 코마의 심장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축 늘어진 몸이 허물어졌다.
털썩, 무너진 몸을 향해 검을 겨누던 딜리언이 조심스럽게 그의 목에 손을 올렸다.
“죽었습니다.”
딜리언의 말대로 무너진 육신은 숨이 끊겨 싸늘하게 식었다.
하지만, 코마는 어딘가에 살아있다.
나는 딜리언의 목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주가 그대로예요. 살아있어요.”
여전히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렉스터의 저주도 그대로였으니까.
“지젤이 제때 결계를 닫았다면 성안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결계와 문을 동시에 닫으려고 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문을 닫아도 공작성의 결계가 열린 상태라면 코마가 그림자를 통해 도망칠 수 있으니까.
“리아 씨, 익숙해 보입니다.”
“네. 전에도 이런 식으로 계속 숨어 다녔거든요.”
애초에 이번 한 번에 끝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서 나단과 합류해서 결계를 닫았는지 그것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 전에.
나는 손을 뻗어 불만스럽게 굳은 뺨을 문질렀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심통이 난 얼굴이에요?”
“리아 씨도 알고, 그 벌레 같은 새끼도 아는 걸 저만 모르는 게 싫어서요.”
“……별로 좋은 기억도 아닌걸요.”
그런 아프고 힘든 기억 따윈 없는 게 나을 텐데. 딜리언은 그 고통까지도 갖고 싶어 했다.
“얼마나 욕심쟁이인 거예요.”
“욕심쟁이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습니다.”
“거짓말. 욕심이 가득한데?”
“리아 씨 한정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요.”
딜리언이 눈꼬리를 휘며 내 허리를 껴안았다.
“아직 다 끝난 거 아니거든요?”
“반은 끝냈잖아요?”
딜리언의 나른한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응큼하긴.”
말은 이렇게 해도 나도 그처럼 마음이 어느 정도 놓인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뒤엔 당연히 진한 입맞춤 아니겠어?’
나는 딜리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천천히 발꿈치를 들었다.
“정말로 응큼한 게 누군지 모르겠군요.”
피식 웃은 딜리언이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얼굴 위로 뜨거운 숨이 흩어지던 그때였다.
“시X. 사랑 놀음 할 거면 내가 없는 곳에서 하라고.”
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야릇한 분위기를 산산조각 내는 게 아닌가.
“꼭 내 앞에서 입술을, 부비, 읍, 으읍!”
나는 렉스터가 상스러운 말을 뱉기 전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끊어졌던 풀들이 다시 렉스터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으읍!”
“어쩌라고, 조용히 안 해?”
하여튼 이 자식은 도움이 안 돼요. 감정을 실어 렉스터의 옆구리를 툭툭 치던 그때였다.
바람처럼 달려온 작은 몸이 내 허리를 껴안았다.
“윽, 단테?”
무슨 일인지 잔뜩 겁에 질린 단테가 몸을 떨며 내 품에 파고들었다.
“리, 리아 님. 엄마가, 엄마가……!”
단테가 울먹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지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엄마가 쓰러졌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엄마를 두고 왔어요……. 내, 내가 지켰어야 했는데.”
겨우 울음을 참고 있던 단테는 이내 으아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피로 붉어진 손을 닦아주며 아이를 달랬다.
“괜찮아. 엄마 곁에는 나단이 있어. 전에 봤지? 귀여운 부엉이. 그 부엉이가 구해줬을 거야.”
피범벅이 된 손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나단이 없었으면 큰일 났겠어.’
대충이나마 피를 닦아낸 나는 단테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단테, 엄마는 어디에 있어?”
“결계가 있는 방에, 쓰러져서 못 일어나요…….”
단테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 순간, 딜리언이 단테의 손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악!”
“딜리언 씨!”
그 거친 행동에 깜짝 놀란 나는 어떻게든 딜리언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딜리언 씨, 갑자기 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단테를 바라보는 얼굴이 전에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결계가 있는 곳은 저기가 아닐 텐데. 단테 유스틴.”
“전하, 왜, 왜 이러세요. 흑……. 흐윽, 큭.”
울먹거리던 목소리가 한없이 가벼운 웃음으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빌어먹을, 항상 네가 방해한다니까. 하지만 뭐. 이 정도면 충분해.”
“너…….”
빠득, 빠드득, 콰직.
단테의 손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손목뼈를 조작해 딜리언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낸 코마가 씨익 웃었다.
타악, 그가 엄지를 튕겼다.
쿠웅!
불길한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구오오오-
휘이이잉-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고,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렸다.
나는 시야에서 사라진 딜리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딜리언 씨!”
“소용없어. 안 들릴 거야.”
그의 말대로다. 아무리 목놓아 소리를 질러도 딜리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타는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돌아올 뿐이었다.
모두 헛수고라는 걸 깨달은 순간, 어깨에 힘이 빠졌다.
“……지젤이 실패했구나.”
“다행이지. 조금만 늦었으면 완전히 닫을 뻔했거든.”
“지젤을 죽인 거야?”
“글쎄. 나단이 있으니 목숨은 붙어있겠지.”
내 허리를 껴안은 손이 깍지를 꼈다. 절대 풀어낼 수 없도록 강하게.
“상냥한 리아. 그 여자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걱정해주는 거야? 나라면 잘됐다고 웃을 텐데.”
아이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강한 힘이 나를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구멍과 가까워질수록 몸이 휘청거리며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휘날린 머리카락이 내 뺨을 아프게 때렸다.
그 머리카락 따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래 봤자 아이의 몸이야. 신성력으로 제압하면 분명…….’
푸욱.
나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숨을 멈췄다.
뚝, 뚝, 뚝.
붉은 피가 여린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단테의 얼굴로 해맑게 웃은 코마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제 목을 짓눌렀다.
“리아, 이 아이가 죽게 내버려 둘 거야?”
흘러내린 피가 단테의 흰 셔츠를 점점 붉게 물들였다.
나는 허겁지겁 단테의 목을 잡아 신성력을 흘려보냈다.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아이를 노릴 걸 그랬네.”
반박할 정신도 없었다. 나는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목을 치료하기 급급했다.
“리아 씨!”
멀리서 딜리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딜…….”
“리아, 날 버리면 이 아이는 죽어.”
“리아 씨! 어디에 있습니까!”
단테의 목숨을 쥐고 나를 협박하는 코마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 발만 더 물러나면, 어둠에 삼켜질 거다.
그럼 언제 다시 딜리언을 볼 수 있을지 몰랐다.
“……딜리언.”
마지막으로 불러본 그 이름. 그 미약한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딜리언이 모래바람을 뚫고 나타났다.
“이제야 겨우 대답해주는군요.”
“딜리언 씨…….”
“내가 미치는 걸 보고 싶어서 그럽니까.”
달려온 딜리언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아요. 당장.”
저 손을 잡고 싶다. 잡고,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안 돼. 그럴 수 없어.’
나는 그 간절한 손을 애써 외면한 채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해요.”
나는 이 작은 생명을 포기할 수 없다.
코마의 비틀린 욕망에 희생당한 이 어린 생명을 버릴 수 없었다.
“아까 못 한 입맞춤 말이에요. 다음에 만나면 할까요?”
“리아 씨……. 안 됩니다.”
“그땐 아주 진하게 해봐요.”
“가지마.”
마지막 한 걸음.
문에서 뻗어져 나온 수십 개의 손이 나를 끌어당겼다.
“걱정 마세요. 아주 짧은 시간일 거예요.”
나는 짙은 어둠이 눈앞을 가릴 때까지 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얼굴을 망막에 새기듯이.
* * *
휘몰아치던 모래바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꿈처럼.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빌어먹을 악몽이었다면 좋을 텐데.
딜리언은 모든 것을 잃은 듯, 텅 빈 눈으로 리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