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무슨 수로.”
딜리언이 근본적인 문제를 꼬집었다.
“마법사도 없는데 무슨 수로 닫겠다는 거지?”
한번 깨진 결계를 복구하기 위해선 막대한 마나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소란 속에서 마법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열쇠만 있으면 결계를 닫을 수 있어요.”
지젤이 제 머리를 틀어 올린 비녀를 뽑아 딜리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게 열쇠입니다.”
테르제가 그녀를 믿고 맡긴 증거가 바로 이 열쇠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믿음을 배반했다.
“전하, 저는 결계를 부수지 않았어요. 잠시 열어둔 것뿐입니다. 그러니 다시 닫기만 하면 되는 일이에요.”
어떻게 해도 그 믿음을, 신뢰를 되찾을 수는 없겠지.
뼈마디가 희게 불거질 정도로 비녀를 세게 잡은 지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누구도 말릴 수 없어 보였다.
“좋아요. 그럼 지젤이 결계를 닫아요. 제가 문을 닫을게요.”
“리아 씨.”
“말려도 갈 거예요.”
“리아!”
결국, 딜리언이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걸까. 만약 어둠이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간다면, 그땐 어쩌려고.
이런 애타는 마음을 왜 모르는 걸까.
“나는 분명 안 된다고 했어.”
여기서 다시 고집을 부린다면, 그녀를 기절시켜서라도 안전한 곳으로 보내버릴 작정이었다.
‘엄청 화났나 보네. 갑자기 반말을 하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딜리언의 눈동자에 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딜리언. 나는 혼자 간다고 한 적 없어.”
“…….”
“당연히 같이 가야지. 설마 혼자 보내려고 했어?”
“그럴 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준다고 약속했으니까 지켜.”
하여튼, 내 남자는 착각이 심해서 탈이라니까.
홀로 중얼거린 리아는 하얗게 불거진 딜리언의 손을 두드렸다.
“말싸움은 여기까지 하고, 잠시 모여요. 작전이 있어요.”
* * *
펑! 퍼엉!
정원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치솟은 불길이 공작성을 뒤덮었다.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온 코마는 제 곁으로 달려오는 기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황자님! 이곳은 위험합니다! 어서 안전한 곳으로……. 컥!”
가시처럼 뻗어져 나온 그림자가 입을 벌려 기사를 한입에 삼켰다.
아드득,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코마가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리운 냄새야. 이런 게 향수인 걸까.”
“네놈에게도 추억이라 부를 만한 게 있나 보지?”
코마는 제 곁으로 다가온 렉스터를 향해 인자하게 웃었다.
“있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억이거든.”
이곳에서 리산드로, 아니, 딜리언 그 자식이 뒤졌으니까.
코마는 즐겁게 웃으며 피로 물든 히아신스를 짓밟았다.
퍽, 퍽퍽, 퍽.
렉스터는 그 광기 서린 모습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친 새끼.”
“그런 미친놈의 개 노릇을 하는 게 쪽팔린 줄 알아야지.”
저벅저벅, 불길 속으로 들어온 리아가 렉스터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그러니까 네가 평생 딜리언 씨를 이기지 못하는 거야.”
“감히, 뚫린 입이라고, 윽!”
리아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렉스터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리아를 보고 흥분한 코마가 렉스터를 밀쳐낸 탓이었다.
“리아. 왔구나.”
“말했잖아.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겠다고.”
“정말 죽일 수 있을까? 그때도 봉인으로 그쳤잖아.”
“…….”
“그것도 리산드로의 목숨값이었지. 이번에도 그 녀석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날 봉인할 생각이야?”
“……아니야.”
그 순간, 애써 외면했던 불안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마는 동요로 인해 생긴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리아, 너만 내 곁으로 오면 그 녀석을 죽이지 않을게. 내가 원하는 건 너니까.”
히죽거리며 리아를 향해 손을 뻗은 그 순간,
붉은 피가 쏟아지며 바닥에 무언가 툭 떨어졌다.
“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뇌가 멈췄다.
‘언제……?’
바닥에 떨어진 제 손을 보며 눈을 깜박이던 그때였다.
거부감이 드는 목소리에 코마가 눈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한 번만 더 리아 씨를 더러운 눈으로 쳐다보면 그땐, 죽여버린다고 했지.”
딜리언의 붉은 눈이 매섭게 타올랐다.
“리산드로, 너 이……! 컥!”
딜리언은 재빨리 검의 궤도를 틀어 심장을 찔러 넣었다.
“커헉!”
검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며 딜리언이 눈을 찌푸렸다.
오랫동안 검을 잡아 온 딜리언은 단번에 눈치챘다.
제 검이 빗나갔음을.
“이것도 그 빌어먹을 힘인가?”
아무리 힘을 줘도 무형의 힘에 막힌 검이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
“쯧.”
딜리언이 혀를 차며 검을 비틀어 뽑았다.
“쿨럭,”
코마의 입가에 붉은 핏덩이가 쏟아졌다.
“으윽. 큭.”
가슴에 검을 꽂은 채 코마가 어깨를 들썩였다.
고통으로 인한 발작인 줄 알았으나, 별안간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피를 토해내며 웃은 코마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귀걸이가 일렁거리며 신성력을 뿜어냈다.
구멍이 뻥 뚫린 가슴이 아물며 새살이 돋았다. 구멍이라곤 난 적 없던 것처럼.
“고맙다. 죽을 자리도 알아서 찾아와주고.”
완전히 상처를 회복한 코마가 피 묻은 입가를 훔쳐내며 이죽거렸다.
“리산드로.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왔냐?”
코마는 뭉개져 형체도 찾아볼 수 없는 히아신스를 다시 한번 짓밟았다.
“네가 처음으로 죽었던 곳이야.”
퉤, 핏물이 섞인 침이 히아신스 아래 뿌려졌다.
“그리고 네가 다시 죽을 장소지.”
코마의 뒤로 쏟아져나온 마물이 딜리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몇 마리인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숫자가 동시에 딜리언을 덮쳤다.
“딜리언 씨……!”
순식간에 마물들에게 둘러싸여 모습을 감춘 딜리언에 놀란 리아가 달려 나가려던 순간.
억센 힘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딜 가려고.”
렉스터가 얼굴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바닥에 구르며 이마를 찧었는지 피가 흐르는 얼굴이 섬뜩했다.
“이거 놔!”
“괜히 저 안으로 들어가서 몸에 흠집 내지 말고 얌전히 있어.”
렉스터가 거칠게 팔을 당기자 리아의 여린 몸이 휘청거렸다.
“윽!”
“그때처럼 화살을 만들어서 쏴보지 그래. 아니면 귀여운 부엉이라도 불러보든지.”
부를 수 없다. 나단은 지금 지젤과 함께 결계를 닫으러 갔으니까.
“…….”
“아, 팔찌도 없고, 부엉이도 없으니 아무것도 못 하겠군. 딜리언도 곧 뒈질 텐데 이걸 어쩌나.”
렉스터가 이죽거리며 리아의 신경을 긁었다.
무어라 지껄이든 조금도 변하지 않는 저 무미건조한 얼굴을 엉망으로 망가트리고 싶었다.
“어둠만 아니었다면 너를 갈기갈기 찢어 마물의 밥으로 줬을 거다.”
그녀를 위협해 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건 한심하다는 눈빛이었다.
“너 한 가지에 집중하면 주변을 볼 줄 모르지?”
“뭐?”
“네가 멍청해서 다행이야.”
“무슨 소리……. 이, 이게 뭐야?”
땅에서 솟아오른 풀이 렉스터의 팔다리를 휘감았다.
“이게, 놔! 이거 풀어!”
“발버둥 칠수록 점점 더 조여들 거야. 얌전히 있어.”
시끄럽게 꽥꽥거리는 렉스터에게 싸늘하게 일갈한 리아는 신성을 조작해 렉스터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으읍. 읍!”
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활이 없으면 만들어내면 돼.’
리아는 평소 쓰던 활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손을 펼쳤다.
그러자 손에서 은은한 빛이 돌며, 따뜻한 기운이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넌 얌전히 기다려. 널 끝장내는 건 내가 아니라 딜리언 씨와 지젤이니까.”
활대를 움켜쥔 리아는 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 * *
“처음부터 네가 싫었다.”
코마는 꿈틀거리는 마물 더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사랑하던 리아가 유일하게 마음을 준 사내를 향해.
“네가 그 성에 발을 들인 순간 알아차렸거든. 너를 바라보는 리아의 눈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호수처럼 잔잔하던 그 눈동자에 처음으로 파도가 들이쳤던 날이었다.
“다 죽어가는 네 목을 비트는 건 일도 아니었는데……. 그땐 리아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했었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리아의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널 세상에서 지워버려야 했다.”
그랬다면 잠시 미움을 받을지언정, 실수로 넘어갈 수 있었을 거다.
상냥한 리아는 다시 자신을 바라봐 주었을 테니까.
“똑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지.”
한참을 들썩이던 마물의 움직임이 멎었다.
“리아의 기억을 전부 지우고, 처음부터 시작할 거다. 너 같은 건 영영 기억에서 지워버릴 거라고.”
한참을 홀로 중얼거리던 코마는 산처럼 쌓인 마물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쿵!
마물이 들썩였다.
쿠웅!
마물의 시체가 바닥을 굴렀다.
“……징그러운 새끼.”
마물의 시체 사이로 유유히 걸어 나온 딜리언이 검을 한번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그래서, 개소리는 다 끝났나?”
여유롭다 못해 지루해 보이는 그 얼굴에 코마가 이를 빠득 갈았다.
“끝났으면 이제 내 차례군.”
“벌레 같은 새끼. 죽여도 죽여도 죽질 않아!”
코마의 발아래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딜리언을 향해 휘둘러졌다.
하나 그보다 딜리언이 더 빨랐으니.
푸욱!
날카로운 검 끝이 코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쿨럭,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윽.”
“그건 두고 봐야지.”
딜리언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순간, 날카롭게 날아온 새하얀 화살이 코마의 뺨을 스쳐지나 귀걸이를 깨트렸다.
쨍-!
부서진 신성력이 허공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