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 *
딜리언과 내가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소란스럽던 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나를 훑어내렸다.
‘우리에 갇힌 동물이 된 기분이네.’
시선이 쏠릴 건 예상했지만, 전부 다 나를 쳐다볼 줄은 몰랐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선율 덕분에 정적은 면했지만,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다들 리아 씨를 보고 있습니다.”
“알아요.”
과연 시나이즈 공작이 선택한 여인이 누구인지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시선들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못 떼나 보군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고 있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딜리언과 시선이 부딪혔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딜리언 씨와 어울리는 사람인지 보는 거잖아요.”
딜리언에게만 들리게 소곤거리자, 그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너무 순진해서 걱정이네.”
순진이라니, 내가? 황당함에 입을 벌리자 딜리언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보십시오. 리아 씨를 훑어보는 저 음흉한 눈들을.”
음흉하긴 뭐가 음흉해. 굳이 따지자면 의문을 품은 눈들이잖아.
“그리고 대부분 영애들이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여자라고 리아 씨에게 음흉한 마음을 품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딜리언이 이렇게 편견 없는 사람이었던가?
‘하긴, 부엉이인 나단도 질투하던 사람이니까.’
어쩌면 지나가는 개를 보고도 질투할지 몰랐다.
개를 질투하는 딜리언을 떠올리자 픽 웃음이 나왔다.
“이제 긴장 풀렸습니까.”
“덕분에요.”
딜리언 덕분에 굳었던 어깨가 느슨하게 풀렸다. 나를 향한 시선에 당당하게 맞서며 홀을 가로질렀다.
연회의 주인공인 테르제에게 다가가자, 그가 이를 활짝 드러내며 우리를 반겼다.
“할아버님, 생신 축하드려요.”
“그래, 고맙구나.”
팔짱을 낀 채 딱 붙어있는 우리를 보며 테르제가 흐뭇하게 웃었다.
“화해했다는 말은 들었다만, 같이 있는 모습을 보니 좋구나.”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건 없지.”
내 등을 가볍게 토닥인 테르제가 딜리언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너는 리아한테 잘해라. 기분 상하게 만들지 말고.”
“할아버님이 말씀 안 하셔도 알아서 잘합니다.”
“어이구, 잘하는 놈이 그 사달을 만들었느냐.”
떼잉. 쯧쯧. 테르제가 혀를 차며 딜리언을 타박했다.
누가 보면 딜리언이 아니라 내가 그의 손주라고 착각할 정도로 극명한 온도 차이였다.
“아가, 잠시 이리 와보거라. 내가 네 자랑을 실컷 해뒀어.”
순식간에 딜리언에게서 나를 낚아챈 테르제가 내 손을 덥석 잡고 지방 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는 내 손주며느리.”
테르제가 어깨를 으쓱이며 나를 소개했다. 나는 테르제가 깔아준 판을 놓치지 않고 가슴에 손을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리아 델리스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반듯한 인사에 테르제의 입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예비 공작부인께서 소문대로 아주 아름다우십니다.”
“그뿐입니까. 눈이 초롱초롱한 게 아주 총명하고 영리해 보이는군요.”
아부성 짙은 말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나는 입꼬리를 당기며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할아버지뻘의 귀족들이 내게 머리를 숙이는 상황이 어색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상황이고, 테르제는 물 만난 고기처럼 내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아이가 내 은인이야. 사냥터에서 곰이 달려드는데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테르제는 작정을 했는지 내가 곰을 잡은 이야기부터, 다친 그를 치료해준 이야기까지 빠짐없이 생생하게 전달했다.
문제라면, 앙념을 너무 팍팍 쳤다는 거?
잔뜩 과장된 이야기에 나는 입술을 말았다.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
테르제의 말만 들으면 나는 세기의 천재이자, 딜리언도 뛰어넘을 엄청난 전사였다.
과장된 영웅담에 지쳐 슬그머니 빠져나온 그때였다. 등 뒤에서 부루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쳇, 결국 인정하셨잖아.”
“비앙카 님.”
아는 얼굴에 반갑게 맞이하자, 비앙카가 내 손을 잡았다.
“리아 양, 전하와 다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화해한 건가요?”
“네.”
그러자 기대감에 부푼 얼굴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었다.
“아쉽네요. 리아 양을 내 며느리 삼고 싶었는데.”
“네?”
“어때요, 리아 양. 지금이라도 내 며느리가 되지 않을래요? 잘해줄게요.”
이게 무슨 소리야, 며느리라니?
당황한 내가 어버버거리던 그때,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싸늘한 기운을 풍기는 딜리언이었다.
“백작. 그대의 아들은 이제 15살이 아닌가.”
뭐 15살? 어린애잖아!
“비앙카 님! 저 수갑 차고 감옥에 들어가요!”
“이런, 리아 양. 나이 차이 좀 난다고 감옥에 가진 않아요. 원래 귀족들은 열다섯에도 혼인을 하고 그런답니다.”
안다. 여자는 열넷, 남자는 열다섯이면 혼인을 올릴 수 있는 세계라는 걸.
“그리고 사랑에 나이는 상관없답니다. 저도 남편이랑 일곱 살이나 차이 난다고요.”
물론 제가 연상이랍니다. 그렇게 덧붙인 비앙카가 내게 윙크했다.
‘아이고, 두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나는 딜리언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비앙카는 제 아들이 아직 어리지만 3년만 지나면 훌륭한 사내가 되어 있을 거라며 어필했다.
“……비앙카 님, 아드님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철회해주세요.”
여기에 없는 도련님을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살기를 뿜는 딜리언이 안 보이는 거냐고.
“정말 아쉽네요.”
쩝, 입맛을 다신 비앙카가 틈새를 공략했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비앙카.”
여기까지가 딜리언의 한계인지, 그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아까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 비앙카가 아차, 하는 얼굴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럼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자꾸만 나를 흘긋거렸다.
“비앙카 님, 즐거운 연회 되세요.”
행복한 연회가 피의 연회로 변할까 봐 걱정된 나는 딜리언의 팔을 잡아당겼다.
한 발 옮길 때마다 낯선 사람들이 다가와 제 소개를 하며 눈도장을 찍으려 들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쉴 틈 없이 몰려드는 사람들에 점점 지쳐갔다.
그런 내 시야 끝에 누군가 걸렸다.
바로, 황태자인 카시스였다.
‘카시스 옆에 있으면 더는 안 오겠지.’
나는 딜리언을 옆에 끼고, 냉큼 카시스를 향해 다가갔다.
“황태자님.”
“리아 양. 공작. 화해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축하해.”
“감사합니다……?”
아니, 화해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어디까지 소문이 퍼진 거야?
그리고 이게 축하받을 일인가?
당황을 애써 감추며 웃자, 카시스가 갑자기 헛기침을 시작했다.
“큼, 리아 양.”
“네?”
언제나 딜리언에게만 시선을 주던 사람이 웬일로 나를 부르지?
나를 부른 카시스는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그럴수록 딜리언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안 그래도 비앙카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딜리언이다.
그런데 황태자마저 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자, 딜리언의 신경이 극에 치달았다.
재빨리 나를 품에 안은 딜리언이 싸늘한 낯으로 물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잠깐, 공작. 그런 게 아니네.”
카시스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저었다.
“그런 게 아니면 뭡니까. 눈이 불순하군요.”
“그게 아니라……, 아이나에게서 연락이 끊겨서 그래. 혹, 그대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나 싶어 물어보는 거야.”
연인의 행방을 다른 이에게 묻는 게 퍽, 수치스러운지 그의 얼굴에 미약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 안타까운 모습에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지만, 나는 아이나가 어둠을 잡으러 떠났는지도 몰랐던 사람이다.
“저는 모르지만, 딜리언 씨는 알지도 몰라요.”
처음부터 신전과 공조하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락을 주고받은 그다.
하지만 딜리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성녀와는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닌지라 모르겠군요.”
“어쩔 수 없군.”
카시스는 내심 안도한 듯 보였다.
하긴, 그를 두고 딜리언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이상했다.
“아무래도 아레스트 영지에 가봐야겠어.”
카시스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공작, 불러준 건 고맙지만 연회가 끝나는 대로 일찍 떠나보겠네.”
“그럼 황태자님도 같이 가실래요? 저희도 아레스트 영지로 갈 예정이거든요.”
예상과 달리 렉스터가 공작성에 나타나긴 했지만, 아레스트 영지에 가기로 한 계획은 변함이 없다.
나는 어둠과 렉스터가 아니더라도, 아레스트 영지에 볼일이 있었으니까.
‘아레스트 영지라면, 그 녀석이 있는 곳이군.’
‘그 녀석?’
‘마지막 신수, 아레스트가 그곳을 수호하고 있단다.’
그땐 완전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몰랐지만, 아레스트의 행보는 수상쩍었다.
아레스트는 엉덩이가 무겁고 인간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나만큼은 예뻐하고 아껴주었다.
그런 아레스트가 나를 보러 오지 않은 건 이상했다.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몰라.’
만약 아레스트가 위험에 빠졌다면, 그를 도와줄 병력이 많을수록 좋았다.
“함께 가면 적적하지도 않고, 덜 위험할 거예요.”
그에게 동행을 제안하자, 딜리언의 얼굴이 단번에 가라앉았다.
“그럴까? 함께 가면 적적하진 않겠군.”
카시스는 냉큼 내 제안을 수락했다. 딜리언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보고도 모른 척하며 말이다.
“좋은 선택이 아닌 듯합니다만.”
“연인 사이에 끼어 미안하지만, 나도 마음이 급해서 말이야.”
지금까지 무서운 딜리언을 어떻게 상대했나 했더니, 카시스도 한 뻔뻔 했다.
“하, 저는 리아 씨만 챙길 겁니다. 그러니 알아서 따라붙으십시오.”
“공작에게 챙김받는 것도 이상하지.”
생각지도 못한 게릴라 원정대가 꾸려진 그때였다.
입구가 소란스럽게 술렁였다.
“정말 왔잖아?”
“이럼 어떻게 되는 거야?”
“그래도 시나이즈 공작가는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지 않을까?”
“모르지. 블렌트 백작가가 3황자에게 붙었잖아.”
수군수군, 주변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연회장에 발을 들인 마누스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자, 내 어깨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요.”
딜리언의 손을 토닥이던 나는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인물에 멈칫했다.
렉스터와 함께 마누스의 뒤를 따라서 온 그는,
지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