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11장. 해일처럼 부서지는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푸른 새벽빛에 몸을 뒤척이던 나는 결국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보이는 잘생긴 얼굴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자는 얼굴은 천사가 따로 없네…….’
하지만 밤새 저를 괴롭힌 딜리언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였다.
어젯밤을 떠올린 나는 눈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끝까지 안 가기는!’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딜리언의 얼굴을 향해 휘두른 나는 한숨을 내쉬며 검지만 쏙 빼내 뺨을 콕 찔렀다.
“얄미워 죽겠어.”
나는 뺨을 찌르다 말고 그의 눈썹을 더듬었다.
어젯밤, 계속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려 달라 보채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전생의 그와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린 나와 달리,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영 신경 쓰이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기억하고 있으면 되지, 뭐.’
분명 좋은 기억도 많았지만, 그만큼 아프고 슬픈 기억이었다.
그런 건 나 혼자만 갖고 있어도 충분했다.
푸른 새벽이 지나고, 멀리서 동이 터 올랐다.
“나단한테 혼나겠다.”
외박이라니. 무슨 소리를 들을지 벌써 무서웠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지.
몸을 일으키자 허리가 욱신거렸다.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으, 허리 아파.”
허리를 콩콩 두드리며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민 순간이었다. 이불 속에서 뻗어져 나온 손이 허리를 잡아당겼다.
“악.”
찌릿, 울리는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모든 원흉인 딜리언을 향해 눈을 흘기자 그가 요망하게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지금 저 몰래 도망치려고 했죠?”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이거든요?”
도망이라니, 딜리언의 말만 들으면 상대의 하룻밤을 훔치고 몰래 도망치는 사람 같지 않은가.
“텅 빈 침대를 보고 슬퍼할 제 심정도 헤아려 주셨어야죠.”
딜리언은 헛소리를 정성스럽게 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정도로 그 화법에 익숙해진 후였다.
“이제 진짜 가야 해요. 나단 엄청 화났을 거란 말이에요.”
어젯밤, 언뜻 방 밖에서 나단의 절규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단호하게 그의 손을 떼어내자, 딜리언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불이 밀려 내려가며 그의 성난 상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긴 딜리언이 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파인 건 못 입겠네요.”
“왜요?”
“있어요. 그런 게.”
딜리언은 끝내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싱겁긴.
* * *
“딜리언 이, 이 나쁜 놈!”
방으로 돌아와 뒤늦게 목을 확인한 나는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깨물어 놓았는지, 목이 얼룩덜룩했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목을 더듬던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세라와 나단을 보고 멈칫했다.
나만큼이나 얼굴을 붉힌 세라가 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고, 나단은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다.
이런 민망한 모습을 무방비하게 보이다니.
나는 목을 가리며 씨근덕거렸다.
‘내가 못 살아! 조금 이따 만나기만 해봐. 가만 안 둬!’
자리에서 방방 뛰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던 그때였다.
연신 헛기침을 하던 세라가 별안간 사색이 되어 풀썩 주저앉았다.
“안 돼! 오늘을 위해 주문한 스페셜 연회 드레스를 못 입잖아……!”
세라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했다.
“내 딜리언 이놈을 죽이고 지옥에 가겠다…….”
나단은 어디서 찾아낸 것인지 단검을 입에 무섭게 물고 날아올랐다.
“나단!”
“오벨러스 님께서 나를 버리셔도! 딜리언 그놈만큼은! 용서하지 않아!”
살기등등한 모습에 나는 재빨리 나단을 품에 안고 그의 입에서 검을 빼냈다.
“리아! 당장 내놓거라!”
그러자 나단이 발버둥 치며 딜리언을 향한 저주를 쏟아냈다.
“내 그놈을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게야!”
“안 돼! 어떻게 만났는데 다시 헤어지게 만들 셈이야?”
그 순간, 나단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기억을 다 찾은 게냐.”
“응. 다 찾았어.”
“그래. 드디어 찾았구나.”
나단이 날개를 뻗어 내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느냐. 고생했어.”
“위로는 모든 일이 다 끝나면 받을게. 아직 어둠을 제거하는 게 남았잖아.”
공작성에 렉스터와 어둠과 깊이 연관되어 있어 보이는 3황자가 있다.
안심하긴 일렀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너는 다 잘할 거란다.”
“응, 난 잘할 수 있어.”
무슨 일이든 전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는 나단 뒤로, 재빨리 검을 서랍 안에 쑤셔 넣었다.
그 사이 옷장에서 드레스를 꺼내온 세라가 울먹거렸다.
“제가 이날만을 기다렸는데…… 전하, 어째서……!”
세라가 침대 위에 펼친 드레스는 어깨를 훤히 드러내는 오프숄더 드레스였다.
그 과감한 디자인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세라, 혹시 이 드레스 딜리언 씨한테 보여준 적 있어?”
“아뇨. 이런 건 당일에 공개해서 깜짝 놀라게 해드려야 하는 거랍니다.”
“우연히 봤을 가능성은?”
“그럴 리가…… 아! 공작성에 도착한 후에 주름이 진 곳을 편다고 꺼내 놓은 적이 있는데 그때 보셨을지도 몰라요.”
젠장, 일부러 그런 거잖아!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세라는 눈물을 머금고 두 번째 드레스를 꺼냈다.
이번엔 노출을 최소화한 하이넥 드레스였다.
어깨가 훤히 보이긴 마찬가지였지만 목과 팔을 전부 덮고 있어서일까, 훨씬 차분해 보였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목에 남은 자국쯤이야 신성력으로 손쉽게 지울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지웠다간 어깨를 훤히 드러낸, 화려함의 극치인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거기다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보고 눈이 돌아버린 딜리언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이렇게 된 거 고혹적인 분위기로 밀고 가요!”
울먹이면서도 빠르게 해결 방안을 떠올리던 세라가 두 손을 맞잡고 물었다.
“리아 님, 혹시 신성력으로 지울 수는 없을까요?”
“이, 이상하게 안 지워지네?”
세라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나단이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뻐끔거렸다.
나는 혀를 씹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네요. 최선을 다해서 꾸미겠습니다.”
“적당히 해도 돼.”
“그럴 수는 없어요. 오늘 주인공은 어르신이지만, 리아 님께서 공식적으로 데뷔하는 날이니까요. 절대 가볍게 할 수는 없죠!”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세라의 손끝에서 나는 새롭게 태어났다.
섬세하게 수놓은 꽃과 나비 자수가 강렬한 붉은색과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아쉽긴 하지만 이 드레스도 정말 잘 어울리세요.”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어 가지런히 늘어트린 세라가 감동하며 박수를 쳤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리아 님!”
“그럼, 우리 리아한테 안 어울리는 게 어디에 있어.”
내 드레스에 맞춰 붉은색 보타이를 맨 나단이 흐뭇하게 웃었다.
나단과 세라의 칭찬 감옥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 오셨나 봐요!”
나보다 더 들뜬 세라가 문을 활짝 열었다.
“전하, 리아 님께서도 막 준비를 마치셨답니다.”
문 뒤로 가려져, 딜리언을 보지 못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습을 드러냈다.
“리아 씨, 준비는 끝…….”
나를 본 딜리언이 말을 잃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몽롱해진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나는 딜리언의 시선을 뒤로한 채 그의 모습을 살폈다.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과 몸에 딱 맞는 검은 수트. 그리고 소매에 장식된 붉은색 커프스 버튼이 반짝였다.
‘내가 준 선물이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자 딜리언이 한참 만에 입술을 달싹였다.
“……리아 씨.”
“딜리언 씨.”
멋있게 차려입은 딜리언을 보며 은은하게 미소 짓던 나는 순식간에 돌변했다.
맹수가 사냥감을 노리듯, 냅다 달려들어 딜리언의 등을 세게 때렸다.
“내 목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내 손이 얼얼할 정도로 세게 쳤는데도 그에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는지, 딜리언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좋아 죽겠다며 실실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어깨를 들썩이며 식식거리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 그가 속삭였다.
“목에만 했을까요?”
“쉿, 조용히 안 해요?!”
왁, 소리를 지른 내가 입을 때리려 달려들자, 그가 재빨리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일부러 그런 거죠? 내가 저 드레스 못 입게 하려고!”
침대 위에 애처롭게 널브러진 드레스를 가리키자 세라가 충격에 비틀거렸다.
“그, 그런…….”
털썩, 주저앉는 세라가 보이지도 않는지 딜리언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후, 가벼운 한숨을 쉰 딜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리아 씨, 언제 이렇게 눈치가 좋아졌어요.”
“이, 이……!”
“보자마자 지워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보기만 해도 좋은지 딜리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세라! 내가 복수해주마!”
한편, 버럭 외친 나단은 카펫 위를 빙글빙글 돌며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검이 어디 갔지?”
이럴 줄 알았어. 몰래 치우길 잘했다.
“흥,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물면 된다! 딜리언 네 이놈!”
몸통 박치기를 하듯 날아온 나단이 날카로운 부리를 딜리언의 머리에 조준했다.
하지만 그 공격은 단번에 막히고 말았다.
“리아 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정돈한 머리다. 건들지 마.”
“그럼 더더욱 물어뜯어야지!”
나단이 왁왁거리며 달려들었지만 딜리언 앞에선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장인어른. 나이에 걸맞지 않은 유치한 보타이군요.”
“뭐, 뭐라!”
나단이 깃털을 마구 부풀리며 방방 날뛰었다.
장인이라는 호칭에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행색이 유치하다고 놀린 것에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는 눈치였다.
“내, 내 보타이가 어때서!”
그쪽이었냐.
나단이 거울을 향해 날아간 사이, 딜리언이 팔을 내밀었다.
“장인어른도 해치웠겠다, 가볼까요. 부인.”
웃음기 서린 한숨과 함께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네, 가봅시다.”
연회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