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나는 전에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몸이 들썩일 때마다 함께 흔들리는 상자가 가슴을 짓눌렀지만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이 안엔 테르제에게 부탁해 받아온 성검이 들어있었으니까.
‘성검을 빌려달라고? 무엇을 하려고?’
‘주인을 찾으려고요.’
‘이 검의 주인이 될 사람이 여기에 있느냐?’
‘아마도요. 제가 찾아올게요.’
온통 의문스러운 말이었지만 내 결연한 표정 때문일까, 테르제는 별말 없이 성검을 넘겨주었다.
어쩌면 딜리언 때문에 가라앉은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걸지도 몰랐다.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고 기분 풀라는 거겠지.
어떤 이유든 간에 예전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관대한 처사였다.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가질 수 없어요.’
과거의 내가 말했듯이 성검은 나도, 카시스도, 테르제도 가질 수 없었다.
이건 오로지 리산드로만이 가질 수 있는 검.
선택받지 못한 자가 성검을 만지면, 희미하게 새어나오던 빛마저 꺼지고 말았다.
상관없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니까.
커다란 보폭으로 복도를 걸어가던 그때, 별안간 커다란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마누스였다.
“리아.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딜리언 씨께 가는 길이에요.”
나는 성검이 든 상자를 꽉 쥔 채 걸음을 물렸다.
그러자 마누스가 안타깝다며 눈을 일그러트렸다.
“지금까지 너를 속인 사람인데, 보고 싶은 거야?”
지금껏 나는 그 사람이, 리산드로가 다시 태어나지 못했다고 믿었다.
저주받은 영혼은 구원받을 수 없으니까.
“리아.”
그러던 어느 날 마누스가 약속을 말하며 내 앞에 나타났다.
부끄럽지만, 처음엔 리산드로와 닮은 저 얼굴에 방황하며 혼란스러웠다.
하나, 이젠 알겠다.
‘3황자는 진짜가 아니야.’
나는 무감정한 눈으로 마누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 앞을 막아선 그를 무시하고 딜리언의 방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억센 힘이 내 팔을 붙들었다.
“리아. 왜 자꾸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거야.”
“이거 놓으세요.”
“날 구해주기로 약속했잖아. 그럼, 가짜가 아니라 날 봐야지!”
감정이 격해진 모양인지 마누스가 나를 향해 소리를 쳤다.
‘가짜? 그래, 누가 그 가짜인지 한번 알아보자고.’
서늘한 내 눈빛에 아차, 했는지 마누스가 당황하며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리아. 그게 아니라…….”
“황자님. 이거 받아주세요.”
무슨 헛소리를 하든 들을 마음이 없었던 나는 마누스의 말을 끊어내며 상자를 열었다.
“이게 뭔데?”
“황자님이 이 검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면 황자님과의 관계, 생각해볼게요.”
그러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누스가 냉큼 검을 낚아챘다.
“어때, 어울려?”
마누스가 온갖 멋진 척을 하며 자세를 잡았지만, 내 시선은 오직 성검에 향한 채였다.
‘마누스가 진짜라면 성검이 빛나겠지.’
하지만 성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검을 바라보았다. 꽈악,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흐음, 이건 너무 투박한데 더 좋은 검으로 해볼까?”
“됐어요. 조심히 가세요.”
나는 들썩이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재빨리 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리아?”
뒤에서 마누스가 애타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를 무시한 채, 복도를 내디뎠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체면을 차리던 걸음은 서서히 빨라지더니 이내 뜀박질을 했다.
드레스 자락이 다리에 스치고 곱게 묶어둔 머리카락이 흐트러졌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아니었어!’
마누스는 리산드로의 환생이 아니었어. 그 사람이 아니었다고.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가 가짜라는 것을.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하.”
만약 3황자가 내 운명이라면 어떡하지, 고민한 날들이 바보 같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딜리언을 걱정시켰나. 왜 그와 감정을 소비하며 싸웠는가.
하지만 그것도 이제 안녕이다.
얼른 이 소식을 딜리언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전에 없을 정도로 활짝 웃으며 딜리언의 방 문을 열어젖혔다.
“딜리언 씨!”
무법자처럼 딜리언의 방에 침입한 나는 그를 찾아 넓은 방을 두리번거렸다.
“리아 씨?”
테라스의 커튼을 걷으며 방으로 들어선 딜리언을 발견한 나는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리아 씨, 어제 일은.”
“이거 받아주세요.”
나는 다짜고짜 상자를 열어 검을 내밀었다. 활짝 웃으며 말하는 내 모습에 딜리언의 얼굴이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이걸로 제 목을 치라는 의미입니까?”
“네?”
왜 말이 그렇게 되는 거야? 황당함에 재빨리 손을 내저었지만 딜리언의 헛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럼 리아 씨를 속인 혓바닥을 자르라는 의미입니까?”
“아니, 무슨.”
빨리 검을 들어서 확인해도 모자라는데 이런 어이없는 말씨름이라니.
“제가 자르라고 하면, 자를 거예요?”
“리아 씨에겐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혓바닥을 자르는 건 곤란합니다.”
그래, 당연하지. 나를 속인 건 잘못했지만 그게 혀를 자를 만큼은 아니……!
“혀가 없으면 더는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잖습니까.”
“……딜리언 씨. 나쁜 의미가 아니고 그냥 한번 들어주기만 하면 돼요.”
내가 졌다, 졌어.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끔찍한 일은 못 하겠다고 하지, 사랑을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대지 않는다고.
정상이 아닌 사고방식에 어이가 없는 한편, 지극히 딜리언다운 모습이라 웃음이 나왔다.
그 미소에 딜리언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화 풀렸어요?”
“풀렸는데 딜리언 씨가 자꾸 헛소리하니까 다시 나려고 해요.”
나는 팔을 흔들며 재촉했다.
“나 팔 아파요. 얼른 들어요.”
“이리 주세요.”
딜리언의 손이 성검에 닿은 순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웅웅-
성검이 울리며 딜리언과 공명했다. 마치, 주인을 만나 기쁘다는 듯이.
“마도구입니까?”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는지 딜리언이 검 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묘하게 익숙하네요.”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구든 이 광경을 봤다면 알 것이다.
딜리언이 이 검의 주인이라는 것을, 성검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날뛰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던 몸은 이내, 카펫 위로 무너지고 말았다.
“리아 씨!”
놀란 딜리언이 성검을 내팽개치고 내게 달려왔다.
“리아 씨, 어디 아픕니까? 안색이 안 좋은데 지금 당장 의원을…….”
머리 위에서 걱정이 쏟아졌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딜리언을 바라볼 뿐이었다.
“리아 씨, 말 좀 해봐요.”
딜리언이 조급한 손길로 내 뺨을 매만졌다. 그 온기에 정신을 차린 나는 간신히 한마디를 뱉었다.
“……당신이었어.”
딜리언이었다. 딜리언이 그 사람이었어. 후손이라고 착각했지만, 아니었다.
딜리언 시나이즈가 리산드로 로하임이었다.
내 연인의 환생이었다.
‘처음부터 내 옆에 있었는데, 바보처럼 그걸 몰라서……. 그를 못 알아봐서…….’
내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그도 다시 태어났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처럼, 눈이 세상을 뒤덮은 날 다시 만나러 올게.’
딜리언과 내가 만난 그날은, 유례없는 폭설로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날이었다.
정말로 그는 약속대로 눈과 함께 나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기억을 잃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내 얼굴이 왜요?”
“울 것 같잖아요.”
딜리언은 제가 더 아픈 얼굴을 하며 내 눈가를 매만졌다.
그의 엄지에 눌린 눈물방울이 툭 터지며 눈가를 적셨다.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 내가 울고 있었구나.
“어디가 아픕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제가 뭔가를 잘못했습니까?”
나를 달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또 그 꿈을 꿨어요?”
내가 전생의 연인 때문에 울고 있다고 단단히 오해했는지 딜리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물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팔을 뻗어 딜리언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별안간 덮쳐온 내 무게에 균형을 잃은 딜리언이 휘청거리며 다급히 내 나를 껴안았다.
한 손은 내 허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은 바닥을 짚어 균형을 잡은 딜리언이 놀란 듯 나를 불렀다.
“리아 씨?”
하지만 그것도 잠시, 딜리언이 익숙한 손길로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 따스한 손길에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내 운명이었어요.”
“화낸 거 아닌데……. 그래도 달래려고 하는 말이라면 성공했어요.”
전생의 기억이 없는 딜리언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낮게 웃었다.
“좋은 말이네요. 운명.”
음미하듯 중얼거리는 딜리언의 목을 세게 껴안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딜리언 씨가, 내 전생의 연인이라고요.”
울먹거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내 등을 쓰다듬던 손이 멈칫했다.
“3황자 따위가 아니라, 당신이었어.”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리고, 울음을 억지로 참아낸 숨이 헐떡거렸다.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났다고.”
별안간 커다란 손이 나를 떼어내고 시선을 맞췄다.
얽혀든 시선 속, 붉은 눈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아듣게 얘기해줘요.”
“딜리언 씨가, 그 사람이었어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요.”
“정말로 제가…….”
혼란스러운지 딜리언이 말끝을 흐렸다.
“그 새끼가 아니라 나였군요.”
딜리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떠올랐다.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내 허리를 휘감은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나였어.”
딜리언이 나를 부술 것처럼 힘껏 안았다.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혹은 놓아줄 수 없다는 듯이.
나는 딜리언의 커다란 품에 안겨 코를 훌쩍였다.
너무 기뻐서, 너무 좋아서, 벅차올라서.
그를 다시 만났다는 기쁨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