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 *
살랑살랑, 무언가 내 뺨을 간지럽혔다.
“으음.”
간지러운 뺨을 문지르며 미간을 좁히던 나는 낯선 감각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 거친 움직임에 내 밑에 깔린 꽃이 크게 흔들렸다.
“테르제 님?”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테르제와 카시스가 사라지고, 들꽃이 내 주변을 감쌌다.
익숙한 몽환적인 분위기에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또 꿈인가…….”
처음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문제는 왜 갑자기 꿈을 꾸냐는 건데. 성검과 관련이 있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나는 뒤늦게 무언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 움직이네?”
지금까진 전생에 끌려 다니며 기억을 훔쳐보는 게 고작이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의지대로 움직이는 몸에 들뜬 나는 팔을 휘두르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몇 번이고 확인한 나는 가볍게 몸을 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지금까지 내가 꿈에서 본 곳은 빌헬름의 성과 새하얀 눈밭이 다였다.
나는 손 그늘을 만들어 높게 솟아오른 탑 꼭대기를 주시했다.
“명망 높은 귀족의 성인가…….”
확실한 건 빌헬름의 내 성은 아니라는 거였다.
‘그럼 그 사람의 성인 걸까?’
내가 꾸는 꿈은 전부 과거의 잔상들이다. 이번에도 분명 그렇겠지.
어쩌면 드디어 그 사람에 대한 단서를 찾을지도 몰랐다.
문제라면, 이 꿈이 언제 깰지 모른다는 것.
조급해진 나는 재빨리 정원의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얼마나 멀리 들어온 거야?”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길은 아니었다.
“묘하게 익숙한데…….”
기억을 더듬어 차근차근 출구를 찾아 나가던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공작성이잖아?”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긴 하나, 여긴 분명 공작성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내가 이리도 길을 잘 찾을 리가 없잖아.
내 집 앞마당을 거닐듯 출구로 빠져나온 나는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확신했다.
“공작성이 확실해. 그런데 왜 공작성이 꿈에 나온 거지?”
중얼거리며 성을 바라보던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리아.”
“아…….”
다정한 그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화를 하는 게 처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런 나를 보고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또 꽃밭에 누워있었습니까.”
“그걸 어떻게…….”
뭐야, 나 감시라도 하나? 놀란 내가 눈을 깜박이자 그럴 줄 알았다며 그가 내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었다.
“이렇게 꽃을 달고 오는데 모를 수가 없죠.”
그가 하얀 꽃잎을 가볍게 흔들며 짓궂게 나를 놀렸다.
“잘 어울리네요. 누가 꽃인지 모르겠어.”
“……그건 좀 느끼해요.”
“이상하다. 전에는 이렇게 말하면 좋아서 더 해달라고 했는데.”
“……날조하지 마세요.”
그럴 리가 없어. 전생의 내가 나르시시즘에 걸렸을 리가 없다고!
얼굴을 붉히며 질색하자, 그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환하게 빛나는 그 미소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역시 다르다. 3황자와는 얼굴만 비슷하지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저 버릇도 비슷하지만…….
‘아니, 얼굴도 아닌 것 같아.’
나는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콕 찔렀다.
의문스러운 내 행동에 그가 눈을 깜박였다.
“다시 웃어봐요.”
“갑자기?”
“얼른요. 빨리 웃어봐요.”
억지나 다름없는 요구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자 검지로 찌른 부분이 폭 들어가며 짙은 보조개가 파였다.
뺨을 쓰다듬던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갑작스러운 손길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건만 그는 피하기는커녕 맘껏 만지라며 허리를 숙여주었다.
나는 주름 하나하나 뜯어보며 그의 얼굴을 눈에 새겨 넣었다.
‘뭐야, 하나도 안 닮았잖아. 그런데 왜 그런 착각을 했지?’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딜리언 걱정이나 시키고.
‘3황자가 약속을 아는 것도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3황자는 이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약속을 알았지?
개수작이 분명한데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딜리언이랑 카시스를 양옆에 끼고 털어보면 실토하려나?’
어떤 방법을 써야 황자가 순순히 실토할까?
‘협박해도 되나……?’
원작을 기억하는 나는 3황자의 약점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워낙 뒤가 구린 인간이라 노예상 정도는 기본으로 갖고 있었으니까.
꼬리를 잡기 어렵다는 게 문제지만 카시스에게 넘기면 알아서 잡아주지 않을까?
협박이라는 귀여운 방법부터 다소 과격한 방법까지 떠올리던 그때였다.
“우리 마님은 또 뭐가 마음에 안 드실까.”
심각해진 얼굴을 오해한 것인지, 그가 구겨진 내 미간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나 되게 자주 칭얼거렸나 보네.’
나를 달래는 손길이 익숙해 보였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어제 만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그와 대화를 나누던 그때였다.
소리 없이 나타난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이만 가셔야 합니다.”
“폐, 하……?”
여기서 나올 리 없는 낯선 호칭에 입을 뻐금거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어색하게 그런 호칭은 쓰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멍했다.
“아, 나으리라고도 그만 부르기로 한 거 기억하죠?”
“그럼……?”
“리산드로.”
그 다정한 울림에 숨이 멎었다.
“그렇다고 정 없이 리산드로 로하임이라고 부르지 말고.”
“리산드로 로하임……?”
“부르지 말라고 하면 꼭 부르는군요.”
얄밉다며 고개를 저은 그가 내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나는 붉어진 코를 매만지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내 연인이 리산드로 로하임이었다고? 건국왕? 초대 황제?
그제야 그의 허리에 매달린 검이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빛을 뿜는 저 검은 조금 전까지 내가 만지던 성검이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리산드로가 성검을 매만졌다.
“이 검이 절 지켜줬습니다.”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로 검을 쓰다듬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부 리아 씨 덕분입니다.”
그 순간, 잔상처럼 짧은 기억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리산드로. 곧 황제가 될 분이 이런 투박한 검을 가져서 되겠어요? 이거 받아요.’
‘당신에게 승리와 행운을 가져다줄 거예요.’
이 검은 내가 그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온갖 신성과 축복을 넣어 만든, 내 손에서 탄생한 성검이었다.
내가 준 거다. 이 사람에게.
리산드로, 나의 연인에게.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가질 수 없어요. 검을 만든 저도 마찬가지죠.”
나는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읊은 동시에 그에게 확인을 받듯이 물어보았다.
리산드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매만졌다.
“신기하죠, 리아 씨가 만든 검인데 가질 수 없다니.”
“당신 거니까요. 오로지 당신만 가질 수 있어요.”
오직 그를 지키기 위한 마음으로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검이다.
그렇기에 오로지 리산드로에게만 반응했다.
보아라. 내가 성검을 만져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것만 있으면 당신을 찾을 수 있겠네요.”
나는 성검을 두드리던 손을 거두며 리산드로와 눈을 맞췄다.
시선은 곧장 얽혀들었다. 그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으로 있든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확인받고 싶은 것처럼 팔을 붙잡자, 리산드로의 눈매가 서서히 휘었다.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소로 답했다.
“물론이죠. 언제나 절 먼저 찾아내는 건 당신이었으니까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무한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애정이 느껴졌다.
그 말이 너는 할 수 있다고 응원하는 것처럼 들려, 나는 안도했다.
“이번에도 반드시 찾아낼게요.”
“기다릴게요.”
끝까지 내가 원하는 답을 해준 리산드로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서서히 흐려졌다.
이만 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리산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나를 품에 안았다.
지독히도 익숙한 품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 * *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아가?”
나는 막,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그런 내 모습에 놀란 테르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놀라긴 카시스도 마찬가지인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있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 것이냐?”
솥뚜껑만 한 손이 내 이마를 푹 덮었다.
“열은 없는데……. 불러도 정신을 못 차리고, 머리가 멍하고 어지러워?”
그럴 리가. 먹구름이 낀 듯, 흐릿하던 머리가 처음으로 맑게 갠 기분이었다.
“아뇨.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요. 많이 놀라셨어요?”
“안 아프면 됐다. 찬바람을 너무 쐐서 고뿔이라도 든 줄 알고 깜짝 놀랐구나.”
딜리언 그놈이 알았으면 노발대발 난리를 쳤을 거라며 테르제가 혀를 내둘렀다.
나는 정자 주변에 피어난 히아신스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언젠가 딜리언과 히아신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꽃은 리산드로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청혼할 때 준 꽃.
그래, 나는 분명 이 꽃을 받았다.
‘하지만 식은 올리지 못했지.’
전부 어둠 때문이었다.
어둠을 봉인하기 위해 희생한 리산드로와 마지막 기회를 얻고 그 뒤를 따라간 나.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고,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사람도…….
“히아신스구나.”
꽃을 발견한 테르제가 턱을 문지르며 내게 물었다.
“꽃말을 알고 있느냐?”
“네. 변치 않는 사랑.”
“그래서 내가 그 꽃을 참 좋아해.”
“저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에요.”
나는 히아신스를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익숙한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지긴 했으나, 이곳은 꿈에서 본 그곳.
조금 전, 리산드로와 대화를 나누던 그 장소였다.
“할아버님, 운명을 믿으세요?”
“그럼, 믿고말고.”
“저도 믿어요.”
다시 태어난 나와 오벨러스의 시험. 꿈에서 본 공작성, 다시 내 앞에 나타난 성검, 그리고 피어난 히아신스…….
이 모든 게 우연일 리가 없다.
이건 필연이자 운명이었다.
나는 후련해진 얼굴로 활짝 웃었다.
“할아버님. 저 부탁이 있어요.”
“부탁?”
물론, 들어주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부디,
“들어주셨으면 해요.”